한국정치사상학회 학술회의…‘동서양 외교개념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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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사상학회 학술회의…‘동서양 외교개념사 연구’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5.28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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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회의]_ 한국정치사상학회·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공동학술회의

 

한국정치사상학회(회장 안외순 한서대 교수)는 지난 5월 21일(토) 국립외교원 외교타운 12층 KNDA홀에서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와 공동주최로 <동서양 외교개념사 연구>를 주제로 한 공동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이화용 경희대 교수의 사회로 열린 이번 학술대회의 제1부(전통시대 동아시아의 외교 관념)에서는 장현근 교수(용인대)의 “중국 춘추전국시대 외교 개념 및 외교 사상의 전개: 존왕양이에서 합종연횡으로”, 윤대식 교수(한국외대)의 “조선의 외교 관념”, 송완범 교수(고려대)의 “일본 고·중세의 ‘외교사’: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을 중심 소재로”가 발표됐으며, 각각에 대해 안효성 교수(대구대), 송재혁 교수(고려대), 김태진 교수(동국대)가 토론을 맡았다.

제2부(근대 서구의 외교 관념)에서는 오영달 교수(충남대)가 “베스트팔렌  강화조약  전후  근대유럽  외교개념의  등장과 변천”, 최형익 교수(한신대)는 “미국의 외교 개념과 대외 인식: 불간섭, 중립, 비동맹 개념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발제를 했으며 각각에 대해 강진옥 교수(성균관대)와 김주형 교수(서울대)의 토론이 이어졌다.

발표 내용을 요약해 아래 소개한다.

 

【제1부: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외교 관념】

■ 제1발표: 장현근(용인대) - “중국 춘추전국시대 외교 개념 및 외교 사상의 전개: 존왕양이에서 합종연횡으로”

이 연구는 춘추전국시대에 어떤 외교 관련 개념들이 있었으며, 국제관계를 둘러싸고 제자백가는 어떤 정치사상적 지향을 보였는가를 살펴보려는 데 있다. 그리하여 외교의 지향점이 춘추시대엔 화합의 숭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가 주된 사상적 경향이었다면, 전국시대로  넘어오면서 현실주의 힘의 정치가 중시되면서 합종연횡(合從連橫)의 실력주의와 권모술수의 외교로 전환되었다는 결론을 얻고자 한다. 현대 국제정치학의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 접목해서 중국 고대 외교 사상을 재해석해보려는 것이다.

연구 결과 중국이 전통 외교의 성취를 활발하게 연구하기 시작한 ‘최근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외교가 근대 서양에서 발전한 diplomacy와 개념적으로 그리고 사상적으로 동일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함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서주 시대 외교는 power politics가 아니라 천하의 화합을 목적으로 두고 덕과 예를 강조하는 일종의 harmony politics를 추구한 것이었다. 

이어 독립된 국가체계를 가지고 여러 가지 외교 교섭이 이루어진 춘추시대는 교황을 중심으로 복잡하게 얽힌 유럽 국가들의 외교관계와 비교해 볼 수 있는데, 중국의 경우 종교적 권위가 아니라 전통적 화이분변(華夷分辨) 사유에 기초한 전통적 권위가 지배하였고, 춘추시대 외교는 전통의 주 왕실을 받들며 평화와 화합을 명분으로 내걸었다는 점에서 이상주의적 존왕양이(尊王攘夷)를 특징으로 한다. 그것은 강력한 패자가 주도한 ‘제후국들 간 맹약’ 외교의 형태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춘추시대 외교는 강대국의 신의에 기초한 강제적 화합과 평화를 추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천하를 뒤덮은 전국시대에 이르면 국가 간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며 현실주의적 힘의 질서가 국제관계를 구성하였다. 그러한 현실에 대응하며 도덕과 화합의 평화외교를 주창하는 사상이 출현하기도 하였으며, 실력주의와 권모술수의 외교를 주창하는 사상도 출현하였다. 묵자는 외교를 공리주의에 입각한 이해관계로 접근하며 soft power를 통한 외교가 훨씬 큰 국가적 이익을 가져온다고 강조하였다. 맹자와 순자는 인의, 왕도, 덕과 예에 입각한 국제질서를 강조하며 power politics가 현실이 아니라 moral politics가 현실이라고 강변하였다. 노장(老莊)은 군사적 패권과 도덕적 국제질서 둘 다 반대하며 자연회귀의 소극적 평화를 추구하였다. 한비자는 힘의 정치를 긍정하며 강력한 법치와 중앙집권을 통한 실력중심주의를 제창하였다.

끝내는 덕이 힘을 이길 수 없었고, 사상이 책략을 이길 수 없었다. 합종과 연횡의 책략만이 모든 나라의 조정을 덮어버렸다. 소진과 장의는 hard power 외 관찰력, 책략, 기회 포착능력 등 ‘종합 국력’을 제시하고 이간질과 속임수를 가리지 않은 외교 전략을 통해 외교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소진은 Shuttle diplomacy를 창안하였고, 장의는 balance of power를 깨뜨리는 외교 전략으로 성공하였다. 진시황의 통일로 중국은 춘추전국의 다양한 국제관계가 소멸되고 대통일의 제국시대가 열리게 되었고, 외교는 전혀 다른 형태를 띠게 되었다.

 

■ 제2발표: 윤대식(한국외대) - “조선의 외교 관념”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의 구조적 특징을 말할 때 흔히 조공-책봉체제라고 말한다. 그리고 조공-책봉이라는 용어와 동반되는 개념이 사대(事大)이다. 중국을 천하(天下)라는 공동체 개념으로 정의하고 통치자인 왕을 천자(天子)라고 명명했던 고대 동아시아의 정치문화에서 왕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질서가 구축되는 것을 하늘의 원리에 부합하는 자연스럽고 정당한 현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고대 동아시아 정치문화의 원형으로 알려진 삼대(三代)의 정치로부터 출발한 질서관념은 유교교의에 의해 이론화되었다. 특히 국가 간 사대와 사소의 개념은 동아시아 질서구조에서 국제관계를 규정하는 기본원리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화와 이해는 고대부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최근의 현상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보편사의 맥락에서 원 제국의 멸망과 명나라의 출현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역사적 전환을 의미했고, 코스모폴리탄적인 유목제국의 멸망과 함께 중화문명의 회복과 군주집권체제로 회귀한 명나라의 질서관념은 대외적으로도 일관되게 세계의 중심으로서 명을 정점으로 하는 규범적 위계질서의 국제관계를 상정했다. 이를 규제하는 원칙이 사소-사대이다.

반면 명 왕조의 출현과 함께 조선왕조도 동시적으로 출현하면서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구조에 편입되었는데, 이 지점에서 동아시아 질서구조 내에 보편사적 흐름과 일국사적 흐름, 즉 명을 중심으로 하는 규범적 사소-사대의 국제관계와 조선을 중심으로 하는 규범적 사소-사대의 국제관계라는 이중적 구조의 특징이 드러나게 된다. 사실 조공-책봉체제라고 불리는 동아시아 질서구조가 명 왕조의 출현과 함께 본격적으로 작동했던 시기부터 조선은 명에 대한 지성사대의 태도를 일관되게 취함으로써 자주적 외교노선이 아닌 종주국인 중국왕조의 속방 또는 속국으로 사대주의 외교노선을 밟았던 것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동아시아 질서구조 자체가 보편사와 일국사의 흐름이라는 두 가지 차원의 접점을 이루며 운행되었기 때문에 조공-책봉체제 역시 중층적 구조로 운영되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은 항상 사방으로 팽창하려는 동서남북의 파장을 흡수하여 분열보다 질서로 전환시켜주는 에이전트로의 역할을 수행한 독자성을 보여준다. 

이 연구는 바로 동아시아 질서의 이중성을 가져온 중층구조 속 행위자들을 매개하는 에이전트로서 조선의 대외정책이 단순히 사대주의로 매도되기보다 얼마나 외교의 정의에 충실했는지를 당대 동아시아 질서의 참여자들이 갖는 외교 관념과 대외정책에서 추출하려는 것이다. 

 

■ 제3발표: 송완범(고려대) - “일본 고·중세의 ‘외교사’: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을 중심 소재로”

1.  고대의 함의

당과 신라는 한반도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양국은 배후의 안정을 위해서 왜와의 국교정상화를 노리고 다투어 통교를 구하게 된다. 그 때문에 왜는 실제의 전쟁에서는 졌지만 동아시아세계의 위상에서 보면 전쟁 이전보다 오히려 입장이 강화된 느낌마저 든다. 이러한 왜의 입장은 후의 일본율령국가의 대외관 형성에 있어서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율령국가의 성립의 배경에는 7세기의 대외적인 위기감을 기회로 한 많은 지방 호족층의 선진문물에 대한 강한 욕구와 부단한 노력이 있었던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그 위에 백촌강싸움과 672년의 ‘임신(壬申)의 난’이라는 미증유의 대혼란이 열도의 구성원들을 자극하고 일본율령국가 확립의 궤도를 깔게 하였던 것이다. 일본율령국가의 대외관은 중국으로부터의 중화의식을 흉내낸 「소중화제국」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對반도우위관」의 형성은 8세기 이후의 일본율령국가의 부동의 언설로서 자리 잡아 9세기 중반 이후에는 「반도멸시관」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런데 일본율령국가의 「對반도우위관」은 실태에서는 신라라고 하는 번국을 동반하는 데에는 실패한 관념상의 「중화제국」이었다. 그래서 일본율령국가가 집착했던 것이 망국 백제의 왕인 「백제왕」을 「항상적인 번국(蕃国)」의 역할을 하는 「백제왕씨」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에 의해 비로소 「동이(東夷)의 소제국(小帝國)」의 체면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2. 중세의 함의

다음으로는 몽골의 일본습래라 하더라도 몽골과 일본의 양국 관계의 설명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운 저간의 사정이 있는데 이는 역시 동아시아적 시점을 받아들여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 다. 이 범주에는 제1차 습래를 전후해서는 고려(삼별초)와 몽골, 몽골과 일본, 일본과 고려와 의 설명들이 각각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제2차 습래를 전후하자면 남송과 몽고, 몽골과 일본, 일본과 고려, 몽골과 베트남 및 일본과의 관계가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몽골의 일본습래가 제대로 복원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가마쿠라막부가 제창한 이국정벌 계획은 막부를 중심으로 한 對 몽골 항전의 군사적 심리적 수단이었던 셈이다. 한편으로 이국 정벌계획이 초래한 결과는 이후 고려에 대한 적대적인 적국의식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중세한일관계를 부정적으로 만들게 한다. 이는 나아가 실제적인 적대적 관계였던 백촌강싸움의 잔영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사실의 반증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처럼 초유와 습래라는 화전(和戰) 양면의 상황이 거의 동시에 발생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른 말로 하면 당시의 가마쿠라막부가 초강대국 몽골의 내습에 대해 강 대 강(强 對 强)으로 맞대응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당시 일본 국내의 지배계층의 이반, 다시 말해 조정과 가마쿠라막부가 몽골에 대해 갖는 인식의 차가 노정된 것임은 추정하기 어렵지 않다. 

원래 율령법에 의거한 조정의 천황과 공경들이 외교권도 갖는 것이지만 13세기 중엽의 가라쿠라막부가 외교적 행위도 장악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이는 각각의 초유의 개별 상황에 대해 어떤 이가 왔고 어떠한 경과를 거쳤는지 또한 국서의 내용이 어땠는지 등에 대해 살펴보자면 조정은 대체로 몽골에 대해 유연한 스탠스를 갖고 있는 데 비해 막부는 강경일변도의 입장을 구사하고 있다. 이는 막부의 권한이 조정을 넘어서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고, 한편으로는 강경대응을 주장하는 막부의 본래적 성격이 무력적 기반 위에 형성된 것임을 감안할 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이상과 같이 초유와 습래라는 이질적인 요소가 같은 맥락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13세기 후반의 몽골과 일본의 관계는 그 중간의 고려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 나아가서는 동아시아 제국의 관계를 함께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동아시아세계라는 일국의 범위를 넘는 영역에서 벌어지는 국제전 중 일본이 관계된 전쟁은 고대 이래 근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네 차례 있어 왔다고 말해진다. 먼저 7세기 중반경의 ‘백촌강싸움’ 13세기 중엽의 ‘몽골습래’ 16세기 말의 ‘임진왜란’ 19세기 말의 ‘청일전쟁’ 이후 1945년의 일본패망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전쟁의 시기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일본이 관계하고 있는 이상의 전쟁은 예외 없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이익과 관계가 무척 깊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전쟁터가 거의 모두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특히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의 우크라니아 침략은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지만, 미국과 패권 경쟁하는 중국의 타이완 침공의 시나리오는 우리에게 너무나 현실적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제2부: 근대 서구의 외교 관념】

■ 제1발표: 오영달(충남대) - “베스트팔렌 강화조약 전후 근대유럽 외교개념의 등장과 변천”

이 논문은 오늘날 운용되는 주권국가 중심의 외교 개념이 근본적인 의미에서 근대 유럽의 국제사회에서 등장, 운용되어왔음에 유의하여 특히 베스트팔렌강화조약 시기에 초점을 두고 접근하였다. 왜냐하면, 바로 이 시기에 주권국가들이 중심적 주체가 되는 외교 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개과정을 고찰함에 있어서 이 논문은 유럽국가들이 자유주의적 이념 노선을 꾸준히 확대시켜왔음을 주장한다. 

베스트팔렌 강화조약 자체가 가톨릭의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의 위계적 질서체제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이후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베스트팔렌 강화조약에서 시작된 유럽 국제사회의 평화공존원칙으로서 세력균형은 이후 종종 국가 통치자들의 힘의 경쟁 성향에 의하여 무너지기도 했지만 유트레히트조약 등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리고 프리드리히 겐츠의 저술이 보여주는 것처럼 유럽에서 평화를 위해 상호 공유하는 중요한 원칙이었던 것이다. 

근대 유럽외교사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조직원리로서 한편으로 자유주의적 이념에 의한 상호존중 외교와 다른 한편으로 자국의 국력배양을 바탕으로 상대국가에 대한 경쟁 중심의 국수주의 외교정책은 최종적으로 자유주의의 승리와 확대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제1차 세계대전을 종결하는 과정에서 나온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주주의 외교원칙과 민족자결주의는 자유주의적 이상주의의 중요한 이정표를 의미했다. 이후 이러한 자유주의적 경향은 계속 확대되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으로 나타났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자유주의 진영 국가들에 대한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의 정치체제가 후퇴하고 제한적이나마 자유주의적 시장경제가 전 세계에 걸쳐 전파되었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경향은 아직도 러시아, 중국, 북한 등 적지 않은 국가들에서 도전을 받고 있으며 그것은 국제사회의 외교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력 침공은 그 좋은 예이다. 이 전쟁은 베스트팔렌 강화조약이 체결된 지 400여 년 지난 오늘날에 있어서 다시 자유주의적 외교 개념이 도전을 받고 있으며 새롭게 형성되는 자유주의 국가들과 권위주의 국가들 사이의 단층선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즉, 자유주의 정신의 확대가 오늘날 국가들의 외교개념의 기초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제2발표: 최형익(한신대) - “미국의 외교 개념과 대외 인식: 불간섭, 중립, 비동맹 개념을 중심으로”

이 연구는 미국 독립과 건국시기의 외교 개념을 독립과 자치, 중립, 비동맹, 자유무역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독립과 건국 당시 미국은 유럽 열강과 비교했을 때, 군사력과 경제력을 포함한 국력에 있어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국력의 취약성을 미국의 건국시조들은 대서양이라는 지정학적 이점과 중립과 자유무역이라는 사려 깊은 외교 전략을 통해 보완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글은 건국 초기 미국 외교가 표방한 지향점을 ‘계몽적 실용주의’로 요약했다. 특히, 워싱턴의 고별연설이 미국의 전통적 외교 개념을 정립하는 데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다.
 
미국 헌법은 국익과 시민적 자유를 증진하기 위한 민주적 대표체계로서 갈등의 제도화를 표명했다. 건국 초기, 미국의 외교정책을 둘러싸고 연방파와 공화파의 갈등이 극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방파와 공화파는 워싱턴 대통령을 중심으로 미국의 국익증진을 위해 단결한 애국자들이었다. 일례로 연방파와 공화파의 핵심인물인 해밀턴과 제퍼슨이 협력해서 두 번째 출마를 고사하던 워싱턴을 설득해 재집권의 길을 닦았다는 사실이다. 당파의 지도자였지만 이들이 진정 우려했던 것은 미국의 파괴적 분열이었기 때문이다. 
   
중립과 자유무역, 곧 “상업관계는 늘리되 정치적 관계는 최소화해야 한다”는 미국이 따라야 할  행동의 대원칙으로 워싱턴이 제시한 ‘계몽된 실용주의’는 1823년 먼로 독트린으로 한층 구체화됐다. 먼로 독트린은 비식민화(non-colonization), 불개입(non-intervention), 고립(isolation) 등 세 가지 원칙에 기초했다. 먼로 독트린 이후 미국의 대통령들은 먼로 독트린에  대한 추론corollary 형식을 빌려 자신의 외교정책을 해석하고 정당화했다.

먼로 독트린은 1920년대 윌슨주의의 등장과 2차 대전 후 나토 등 각종 군사동맹을 맺기 전까지 한 세기 가량 미국의 외교정책을 비춰주는 개념의 등대로 지속됐다. 루스벨트 추론 등 미국 대통령들의 외교정책이 먼로 독트린에 대한 각주로 해석할 수 있다면, 먼로 독트린은 워싱턴 고별연설에 대한 추론이었다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워싱턴과 먼로 등 건국시조들의 통찰력 있는 혜안 덕에, 1812년 전쟁 등 외교적 실패가 있었긴 했지만, 19세기 내내 미국은 대외적 안보와 경제번영을 구가했고, 20세기에는 유럽 열강에 견줄 수 있는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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