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형집행인, 망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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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형집행인, 망나니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0.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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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③_ 사형집행인 이야기
 

이방인이 목격한 참수형 집행 장면

머리를 풀어 헤친 망나니가 큰 칼을 들고 이러 저리 춤을 춘다. 이윽고 들이켠 술을 입으로 뿜어 칼날을 적신 후 마침내 칼을 휘두른다... 과거 사극에서 조선시대 사형집행 장면을 묘사할 때 으레 등장하는 망나니 칼춤이다. 조선의 망나니는 사람이 차마 하기 힘든 사형집행 일을 맡아 하던 자들을 말한다.

워낙에 천한 일을 하는 자들이라서 그런지 이들 사형집행인과 집행 장면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별로 없다. 일제강점기에 경성형무소장을 역임했던 나카하시 마사요시(中橋政吉)는 1936년에 쓴 책(『朝鮮舊時の刑政』)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라는 단서를 달아 망나니의 행동을 묘사하였다. 형을 집행할 때 망나니는 칼을 머리 위로 쳐든 채 잠시 동안 난무를 추고, 스스로 흥분 상태에 들어간 때 그 여세로 칼을 내리쳐 한칼에 참했다고 한다.

▲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 사진과 그의 싸인
▲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 사진과 그의 싸인

형 집행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쓴 가장 생생한 기록 중 하나는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화가이자 여행가인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Arnold H. Savage-Landor: 1865~1924)의 글이 아닐까 싶다. 그는 조선을 방문하여 당시 생활상, 풍물, 제도 등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책으로 남겼는데 그것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orea or Cho-sen: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이다. 책에는 그가 목격한 1891년 2월 6일 한양의 시구문(屍口門) 밖에서 진행된 대역죄인 처형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죄인을 묶은 십자가들이 달구지에 튼튼하게 설치됨으로써 모든 준비가 끝나면, 구식 화승총이나 창을 가진 몇몇의 사형집행인들이 선두를 이룬 공포의 행렬이 마을의 길을 따라 서서히 움직인다... 길가에 손님들이 북적대는 주막이 나타나자 그들은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시켜 먹었다... 마지막 밥 한술을 떠 넣고 마부에게 다음 주막으로 출발하라고 명령했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그들은 이따금씩 “이랴! 이랴! 비켜 서!”하고 고함을 질렀다... 석양이 질 무렵에 행렬이 어느덧 마을을 벗어나 성문에 이르자, 그들은 죄인을 참수할 적당한 장소를 찾아 길을 맴돌았다... 소달구지가 언덕 아래의 평지에 멈춰 섰다. 그 가여운 사람들은 한 사람씩 차례로 끌려 내려와 난폭하게 십자가에서 풀린 다음 사형집행인에게 인계되었다... 경험이 없기 때문인지 숙취 때문인지 몇 명의 죄인들은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죽었다. 세 번째 남자는 건장한 어깨의 소유자였는데, 사형집행인이 목을 내리친다는 것이 그만 빗나가는 바람에 신호와 함께 그의 어깨가 순식간에 잘려 나갔다.

▲ 랜도어가 1891년 2월 6일 목격한 처형 장면을 그린 그림. 화가이기도 한 그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조선 관련 여러 그림을 남겼다.
▲ 랜도어가 1891년 2월 6일 목격한 처형 장면을 그린 그림. 화가이기도 한 그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조선 관련 여러 그림을 남겼다.

랜도어의 사형집행 장면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중단된다. 더 이상의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이때 처형된 자들은 궁궐로 쳐들어가는 변란을 기도하다가 체포된 이근응(李瑾應), 윤태선(尹台善), 승려 가허(駕虛) 등 일곱 명이었는데, 이들을 참수하여 효수(梟首)하라는 처형 명령은 그 한 해 전인 1890년 12월 28일에 내려졌다. 처형을 맡은 군대는 총어영(摠禦營)이고 처형 장소는 시구문 밖의 지금의 미아리 일대로 확인된다. 아마도 요즘 사극에 등장하는 술 취한 망나니 모습은 여기서 힌트를 얻은 것이 아닐까 싶다.

사형집행인에 얽힌 일화

흔히 망나니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조선시대 사형집행인은 소속 기관에 따라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군영의 회자수(劊子手), 지방에서는 도우탄(屠牛坦), 한양에 있던 감옥의 행형쇄장(行刑鎖匠)이 바로 그들이다.

군대에서 사형 집행을 맡아보는 병사 ‘회자수’는 평소 의장용 칼을 들고 대장을 호위하는 군인이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훈련도감, 용호영에 회자수가 6명, 4명이 각각 배치되었다. 이들은 붉은색 문양의 명주를 푸른색 명주에 붙인 귀신 모양의 두건을 쓰는데, 두건 뒤쪽은 발꿈치에까지 이를 정도로 길게 늘어뜨렸다고 한다. 또한 귀신 모양의 붉은색 무명옷을 입으며, 평상시에 협도(挾刀)를 들고 대장이 타는 말 머리에 마주 서 있었다고 한다.

▲ 조선말기 화가 김준근이 그린 회자수 모습. 붉은 두건을 쓰고 있다.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 조선말기 화가 김준근이 그린 회자수 모습. 붉은 두건을 쓰고 있다.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도우탄((屠牛坦)’은 도한(屠漢)이라고도 불리는 우리가 잘 아는 백정을 말한다. 죄인의 목을 베는 참수형, 사지를 절단하는 능지처참형을 집행하려다 보니 전문도살업자 백정이 동원된 것이 아닐까 싶다. 흥미로운 것은 ‘행형쇄장’이다. 이들은 한양의 대표감옥, 즉 지금으로 치면 서울구치소 격의 전옥서에 수감된 원래 사형수들이었다. 사형수가 사형집행인으로 변신한 사연은 뒤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하자.

사형집행인을 망나니라 부르게 된 사연은 뭘까? 영조 때 무신인 구수훈(具樹勳: 1685~1757)이 지은 『이순록(二旬錄)』에 따르면 과거 막란(莫蘭)과 희광(希光)이라는 자가 사형 집행을 맡아 일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사형집행인을 대개 ‘막란희광(莫蘭希光)’이라 불렀다고 한다. 실제로 이들 중 희광은 『광해군일기』에 활동 기록이 나온다. 1616년(광해군 8) 역모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된 해주목사 최기(崔沂)와 그의 열여섯 살 아들 최유석(崔有石)의 목을 벤 인물이 바로 그인데, 어찌된 일인지 사형 집행 당일에 희광 또한 갑자기 죽었다는 기록이다. 구수훈의 지적이 맞는다면 망나니라는 말은 실제 이 일을 맡았던 막란의 이름에서 온 것이 된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조선 말기 황현(黃炫: 1855~1910)은 『오하기문(梧下紀聞)』에서 “회자수를 속칭 ‘망난(亡亂)’이라고 부르는데, 극히 싫어하고 천시하는 말”이라고 하였다.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망난’보다는 ‘막란’이 망나니의 호칭 유래로서는 더 그럴듯해 보인다.

전해지는 관련 일화에 대개 사형집행인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명종 때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된 윤준(尹浚)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윤준이 수레에 실려서 처형장으로 끌려갈 때 그 아내가 길가에서 울고 있었더니 회자수 두어 사람이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윤준이 그 아내를 보고 “돈 준다고 내가 죽음을 면하겠는가”라고 거절하자 화가 난 회자수가 노해서 지극히 혹독하게 처형했다고 한다.

이식(李植)의 문집 『택당집(澤堂集)』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인조 때 역모를 꿈꾼 임경사(任慶思)란 자가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는 “내 이름이 장차 역사책에 오르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발로 옥졸을 차면서 오만하게 굴었다. 이에 회자수가 크게 노하여 그의 등에 칼을 세 번 내려찍은 뒤에 사지를 찢었다.

철종 때 『임술록(壬戌錄)』에는 회자수들의 횡포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설날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이 다가오면 떼 지어 쌀가게에 가서 쌀을 마구 퍼 갔다. 그러면 불결하여 제수용품으로 쓸 수 없다고 쌀가게 손님도 끊겼다. 또 시장을 다니면서 물건이나 돈을 멋대로 빼앗아갔다. 이들의 행패는 관아에서 할 수 없이 전답을 사서 그 수입을 이들의 급료로 지급하면서 겨우 마침표를 찍었다.

죽어야만 그만둘 수 있는 사형 집행

▲ 경복궁과 육조거리. 지도 오른쪽 맨 하단에 ‘전옥(典獄)’이라 표시된 곳이 전옥서이며, 이곳에 행형쇄장을 두었다. 전옥서는 종로구 서린동 영풍문고 자리에 있었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이 체포된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전옥서에 갇혔다고 해서 서점 입구 쪽에 현재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한편 전옥서 길 건너에는 의금부가 있었는데, 현재 SC제일은행 본점 자리이다.
▲ 경복궁과 육조거리. 지도 오른쪽 맨 하단에 ‘전옥(典獄)’이라 표시된 곳이 전옥서이며, 이곳에 행형쇄장을 두었다. 전옥서는 종로구 서린동 영풍문고 자리에 있었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이 체포된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전옥서에 갇혔다고 해서 서점 입구 쪽에 현재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한편 전옥서 길 건너에는 의금부가 있었는데, 현재 SC제일은행 본점 자리이다.

앞서 한양의 감옥 전옥서에서 사형집행을 맡은 자를 ‘행형쇄장’이라 했다고 했는데, 이들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전옥서는 당시 행정구역으로 한양의 중부 서린방에 위치하였는데, 현재의 종로구 서린동 종각역 부근이다. 법전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에는 사형수 가운데 행형쇄장에 자원하는 자가 있으면 형조의 보고를 거쳐 국왕이 최종적으로 승인한다는 1703년(숙종 29)의 수교가 있다. 숙종 때부터 전옥서 행형쇄장을 사형수 중에서 선발했다는 얘기다. 전옥서에는 자신은 처형을 면하는 대신 다른 사형수들의 목을 베는 일을 행형쇄장 한 명이 전담했다.

『승정원일기』를 뒤져보면 행형쇄장에 이름을 올린 이들의 면면을 대략 확인할 수 있다. 행형쇄장에 선발된 자들은 숙종 때 마적(馬賊) 출신의 ‘의종(義宗)’, 영조 때 강도 살인을 저지른 ‘오험복(吳險福)’, 헌종 때 살인범 ‘김관흥(金寬興)’ 등 사형수들이었으며, 고종 때에는 전옥서에 중죄수가 없을 경우 ‘이순길(李順吉)’, ‘김학봉(金學奉)’, ‘이막동(李莫同)’ 등 포도청에서 이감되어온 죄수를 행형쇄장에 차출하기도 했다. 한편 전임자가 사망하게 되면 비로소 행형쇄장에 대한 교체가 이루어졌다. 이로 보건대 일단 행형쇄장에 임명되면 죽을 때까지 그 역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1676년(숙종 2) 5월 6일 탈옥에 성공한 숙종 대 사형수 ‘의종’만 빼고.

행형쇄장에 의해 처형된 인물 중 특히 불운한 이가 양덕 현감 이시복(李時復)이다. 그는 순조 장례 때 장지(葬地) 선정 일을 맡았다가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1835년(헌종 1) 3월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에 의금부 도사(都事)와 전옥서 관원 입회하에 전옥서 행행쇄장이 그를 처형하였는데, 참수형에 처하라는 판결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몸을 조각내는 능지처사형으로 형을 집행해서 문제가 되었다. 사형수의 죄명과 선고 내용을 적은 표찰(標札)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사형을 집행했기 때문이었다.

▲ 조선말기 화가 김윤보가 그린 참수형 집행 장면. 사형수 턱 밑에 나무토막을 괴고, 양쪽 귀는 접어서 관이전(貫耳箭)이라는 짧은 화살을 꿰어두었다. 상투에 줄을 매어놓은 것은 형 집행 후 줄을 잡아당겨 머리를 걸어놓기 위한 것이다. 칼을 든 이가 사형집행인이다.
▲ 조선말기 화가 김윤보가 그린 참수형 집행 장면. 사형수 턱 밑에 나무토막을 괴고, 양쪽 귀는 접어서 관이전(貫耳箭)이라는 짧은 화살을 꿰어두었다. 상투에 줄을 매어놓은 것은 형 집행 후 줄을 잡아당겨 머리를 걸어놓기 위한 것이다. 칼을 든 이가 사형집행인이다.

사극에서의 이미지 때문에 사형집행인하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술에 잔뜩 취한 채 추는 망나니 칼춤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런 망나니 모습은 혹시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의 목격담을 너무 일반화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제부터는 막란(莫蘭)이, 희광(希光)이, 의종(義宗)이 등등 이들의 이름과 비극적 삶도 한번 생각해보길 권한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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