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영어 공용화, 다문화, 촛불 혁명, 그리고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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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영어 공용화, 다문화, 촛불 혁명, 그리고 이젠?
  •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22.05.22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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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명의 생활에세이]

 

박근혜가 탄핵되고 감옥에 가자 ‘촛불 혁명’을 이루었다고 흥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결과는 너저분했다. 당시 어느 토론회에서 60대 중반에 이른 어느 교수가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핏대를 올리는 것을 보고 옆자리의 토론자가 “왜 저리 흥분해?”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범법자가 처벌받았을 뿐이고 체제와 제도가 그대로이고 정권 교체만 이루어졌을 뿐인데, 도대체 무엇이 혁명이었단 말인가?

그 원로 교수는 원로 교수가 되기 이전부터 한국에 지역감정이 심하니 연방제를 해야 한다는 둥 세계화, 세방화가 대세이고 국경이 사라진다는 둥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앞서가고 흥분하기를 좋아하여, 다른 일에는 흥분하나 이런 일에는 좀체 흥분하지 않는 나의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세계화는 김영삼이 해외 순방에서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 국정과제로 선택한 것이었다. 1994년이었다. 당시 사정 개혁과 ‘역사 바로 세우기’가 약발을 다하고 인기가 떨어져 가고 있던 상황에서 하나의 돌파구로 내세운 구호였다. 

사람들은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베이징에서 저녁은 뉴욕에서 먹는 ‘새로운 유목민’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떠들기도 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과연 그렇게 되었는가? 국경은 더 강화되고 전쟁은 더 빈번해졌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신성모 당시 국방장관이 전쟁이 일어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점심은 신의주에서 먹겠다고 떠들었다는데...(혹시 식당 이름들이었나?)

2000년대에 들어서자 어느 신자유주의적 논평가가 영어 공용화를 주장하는 시론을 썼다. 그런가 보다 했는데, 웬걸, 그것을 계기로 마치 영어 공용화가 현실적인 대안이나 되는 양 여기저기서 토론을 하고 영어 마을을 만들고 하는, 윤석열 연설대로 ‘반지성주의’적인 코미디가 벌어졌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것도 시들해졌다. 그 여파로 영어 교육은 매우 강화되었지만 말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문화주의란 것이 나타나서 ‘폐쇄적인 우리’에 대한 반성이 시대의 유행이 되었다. 급기야 한국인 남편을 여읜 어느 필리핀 여성이 국회의원 자리까지 얻어 받았다. 이런 (무)경력의 사람이 귀화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국회의원으로 모셔지는 나라가 또 어디 있을까? 한국 지성의 얄팍함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세계화와 다문화는 정부뿐 아니라 학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숟가락을 얹어 전파하기에 앞장섰다. 정부 기관과 기업에서 연구 용역들이 쏟아져 나오니 학자들이 전공과 무관하게 끼어들어 토론회와 논문을 쏟아내었다.

이제 이것도 좀 시들해진 것 같다. 그 뒤를 무슨 구호가 이을 것인가? 여성주의인가? 검찰 개혁인가? 동성애인가? 어느 분야에서든 앞서서 나서고 설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또 출세도 곧잘 한다. 세계화, 영어 공용화, 다문화, 촛불 혁명, 검찰 개혁, 여성주의... 이슈에 올라타고, 그것을 선도하고, 그리하여 이름을 내고 돈을 벌고. 한 10년 지나 약발이 떨어지면또 다른 구호를 찾고. 이슈를 선점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성공의 지름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땅히 학자라면 그보다는 좀 더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길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남이 알아주지 않고 유행하지도 않는 문제를 자기 나름대로의 시각과 연구 방법으로 풀어나가는 사람은 어디 있을까? 어딘가 있긴 있으리라 기대한다. 알아주지도 않고 유행하지도 않으니 내가 모를 뿐이겠지.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최근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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