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림 이병주의 문학세계 … 그를 회고한다
상태바
나림 이병주의 문학세계 … 그를 회고한다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5.22 09: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림 이병주 문학세계]

‘태양에 바래이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 

                                                         나림 이병주 문학관

지난해 나림 이병주(1921~1992) 탄생 100주년에 이어 올해 타계 30주년을 맞아 그의 평전과 다양한 연구서가 출간됐다.

한국 근현대사를 문학으로 기록해온 작가 이병주는 1921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일본 메이지대 문예과를 졸업했다. 해방 후 귀국해 진주 농과대학과 해인대학 교수를 지내다 부산 국제신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엿새 만에 ‘조국은 없고 산하만 있다’는 논설을 썼다는 이유로 혁명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아 2년7개월을 복역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65년 중편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세대>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그는 44세의 나이에 작가의 길로 들어서 1992년 지병으로 타계하기까지 27년 동안 80여권의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관부연락선> <지리산> <산하> <소설 남로당> <그해 5월> 등 한국현대사를 기록한 대하 장편소설을 펴냈다. 작가의 고향이자 작품의 주요 무대였던 경남 하동에 이병주문학관이 있다.

 

 

■ 『월광에 물든 신화: 작품으로 읽는 이병주 평전』 (김종회 지음, 바이북스, 236쪽, 2022.05)

『월광에 물든 신화』는 이병주 선생 타계 30주년 추모 특별기획의 일환으로 작품으로 읽는 이병주 평전이다. 이 책의 제목을 ‘월광에 물든 신화’라고 한 것은, 장편소설 『산하』의 에피그램 ‘태양에 바래이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에서 따온 것이다. 실재적 사실로서의 역사는 인간사의 깊은 굴곡에 숨어 있는 슬픔이나 아픔을 보여줄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장르가 소설이라는 선생의 확고한 지론(持論)을 기리는 것이다.

조국이 없다

“조국이 없다. 산하가 있을 뿐이다. 이 산하는 삼천리강산이란 시적 표현을 가지고 있다. 삼천리강산에 삼천만의 생명이 혹자는 계산하면서 혹자는 계산할 겨를도 없이 스스로의 운명대로 살다가 죽는다.”

1960년 12월과 1961년 1월에 이병주는 두 편의 논설을 썼다. 앞의 것은 당시 월간 《새벽》의 주간을 맡고 있던 신동문(辛東門) 시인의 요청으로 1960년 12월 그 잡지에 실은 「조국의 부재(不在)」라는 글이었고, 다음의 것은 1961년 1월 1일 자기 신문의 연두사(年頭辭)로 「통일에 민족역량을 총집결하자」는 글이었다. 결과부터 말하면 5·16 군사쿠데타 이후 그는 이 글들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만약에 이 필화 사건으로 인한 감옥 체험이 없었더라면, 그는 언론인의 본업에 작가라는 부업을 갖고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2년 7개월의 절치부심 통한이 그 순서를 교정해버렸다. 어쩌면 그의 수감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한국문학의 한 세기를 가로지른 불세출의 작가 이병주를 얻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실록 소설가

“국내에서는 작가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역사 소재 장편소설들의 무대, 곧 하동·진주·부산 등이 생래적이고 체험적인 배경으로 도입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은 허구로서의 소설적 이야기에 사실성을 부여하는 효력을 발휘했다. 특히 이는 스스로 ‘실록 소설가’임을 자처하는 작가 이병주의 작품세계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소설적 요소라 할 것이다.”

해외 여러 대륙에 걸쳐 그야말로 종횡무진한 소설의 지역적 환경은 작가의 곤고한 체험과 지적 편력, 그리고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그의 관심이 집중된 작품은 결국 고난의 세월을 보낸 자신의 개인사 및 우리 근대사의 질곡과 그 형상이 닮아 있는 경우였다. 학병, 군사독재에 의한 강제 해외 경험의 아픈 경험이 오히려 그에게 ‘실록 소설가’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동시대의 작가 가운데 이병주처럼 광폭(廣幅)의 공간적 행보를 보인 작가가 드물었다는 측면에서 길이 그 의의를 새겨둘 만하다. 그것이 이 글로벌 또는 글로컬 시대에 있어서 우리 문학이 개척하고 추동해 나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큰 별 지고 더 빛나는 성좌(星座)

“이병주는 자신의 호(號)를 ‘나림(那林)’이라고 썼다. 작가 스스로 1984년 11월 월간《마당》과의 인터뷰에서 나림은 ‘어떤 숲’을 의미한다고 말한 바 있다. 조금 유별난 ‘나(那)’는 우리가 통용하는 한자어에서는 쓰지 않는 말이고, 중국어의 의문 접두어로는 흔히 사용된다. 그러하니 ‘어떤 숲’이라는 부정형으로 열려있는 개념의 숲, 그것도 문학의 숲을 지칭하는 듯한 그 풀이는 사뭇 설득력이 있고 눈길을 끌기도 한다.”

이병주의 문학관, 소설관은 기본적으로 ‘상상력’을 중심에 두는 신화문학론의 바탕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기록된 사실로서의 역사가 그 시대를 살았던 민초들의 아픔과 슬픔을 진정성 있게 담보할 수 없다는 인식 아래, 그 역사의 성긴 그물망이 놓친 삶의 진실을 소설적 이야기로 재구성한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이 책은 그러한 역사의식의 기록이자 성과로서, 한국문학사에 돌올한 외양을 보이는 이병주 소설의 세계를 증언하고 있다. 또한 기존의 연구가 역사 소재의 작품에만 주목한 나머지, 대중 성향의 작품들이 어떤 진보와 성취를 이루었는가에 대한 논의의 장(章)을 여는 역할도 한다. 나림의 소설들은 한국의 어느 작가도 흉내 내기 어려운 이야기의 재미로 풍성하기 때문이다.


■ 『역사와 신화의 행적: 이병주 작가·작품론』 (김종회 외 17명 지음, 바이북스, 516쪽, 2022.04)

이병주 선생 타계 30주년 추모 특별기획 연구서다. 작가 이병주는 당대의 한국문학에 보기 드문 면모를 남긴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병주의 소설을 두고 우리 한국문학이 연구 및 비평과 평가의 지평에 있어서 놓친 부분이 있었다. 

이 책에는 이병주의 생애와 문학에 대한 총론 8편, 역사 소재의 장편소설 연구 8편, 대중성을 가진 장편소설 연구 8편, 중·단편소설 연구 3편 등 모두 27편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역사와 신화의 행적

이병주는 『산하』의 서문에서 “우리의 산하(山河)는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단언했다. 문학비에도 새겨진 이 말은 낮에는 역사를 말하지만 밤에는 신화를 이야기한다는 뜻으로도 읽히며, 우리의 산하 곳곳에 스며 있는 통한의 역사와 수다한 이야기는 후대들에게는 엄밀한 텍스트와 시정 넘치는 설화로 기억된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는 이병주의 또 다른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병주의 내면에는 작가 이전에 기록자라는 명징한 사명이 드리워져 있었던 것 같다. ‘한국의 발자크’ 이병주 문학정신이 오늘에도 유효한 것은, 창작자 이전에 글을 쓰는 기록자라는 명제를 안고 평생을 소설이라는 무거운 바위를 밀어 올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은폐되고 침묵되어온 인물이 되살리는 역사

“역사를 지배적 영웅이나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 중심의 공적 서사 양식으로 보는 이병주는 공적인 역사에서 은폐되고 침묵되어온 인물에 초점을 두어 역사를 다시 기술하고자 한다. 때문에 이병주 소설에서 소환된 개인적 역사체험 기억은 정전화된 공적 역사에 균열을 낸다.”

이병주의 글쓰기는 다양한 기록과 역사체험 기억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창작방법을 토대로 한국 현대사의 문제와 모순을 지적하고, 나아가 역사 다시 쓰기를 시도한다. 이병주 소설에서 개인적 기억은 선택과 조합의 과정을 거쳐 역사를 기록하고 재현하는 수단이 된다. 동시에 공적인 역사에서 배제된 희생자들에 대한 망각에 이의를 제기하고 추모와 애도를 통해 그들을 역사적 공간으로 호출해낸다.

이병주가 문학을 통해 역사를 말하는 방식은 실질적인 자료와 자신의 체험 기억을 병치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패배의 기록이나 체험과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권력과 맞서 싸우는 행동과 작용이 좌절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결과를 낳게 된 과정에 관한 관심은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을 표명하기도 한다.

진실을 인간적으로 번역하기 위한 소설

“이병주는 ‘독특한 원근법에 의해 거시와 미시 사이로 유연하게 시점을 이동’할 수 있는 문학이야말로 인간의 실상을 기록하기에 적합한 담론 양식이며, 문학이 ‘인식과 감동으로써 엮어내는 자기 조명’인 동시에 ‘비참한 그대로, 추악한 그대로 그러나 맥맥한 생명감으로써 구원의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병주는 객관적 기록이 기록할 수 없는 원한을 기록하기 위해 허구로서의 소설을 선택했고, 소설의 허구는 거짓으로서의 허구가 아닌 “진실을 인간적으로 번역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인간의 진실을 해치지 않으면서 기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정감’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듯하다.

이병주는 자신이 경험하고 인식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자 노력했다. 현실을 사실에 가깝게 재현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소설가로서 자신의 책무라고 여겼던 때문이다. 


■ 『이병주 평전』 (안경환 지음, 한길사, 992쪽, 2022.05)

이 책은 72년에 걸친 이병주의 굴곡진 생애와 그가 쓴 방대한 작품 세계를 담아 이병주 연구를 집대성한 책이다. 나림 이병주는 일제강점기부터 혼란한 해방 시기, 한국전쟁, 이승만 시기, 박정희 시기를 거쳐 1980년대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에 걸친 한국 현대사를 소설로 압축해냈다. 그의 작품 세계를 ‘소설로 읽는 한국 현대사’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는 좌우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오로지 문학으로만 세상을 이야기하려 한 자유인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역사에 대한 희망, 인간에 대한 애정의 시선이 담겨 있다.

나림 이병주는 마흔네 살 늦깎이로 문단에 데뷔해 72세로 영면하기까지 80여 편의 장편소설을 포함해 원고지 수십만 장 분량의 글을 남겼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밟혀, ‘행간에 깔린 가냘픈 잡초’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작은 생명들의 서러운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작가가 되었다는 그는 당대 제1의 인기 작가였지만 주류 문학계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한 존재였다. 

이병주가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라고 밝혔듯이 ‘기록이자 문학’ 또는 ‘문학이자 기록’은 이병주 문학의 지향점이자 그의 소설을 일관하고 있는 작가 정신이다. 그는 책상에서만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 부지런한 발길로 조국 산천을 구석구석 다녔고 무수한 여인과 사랑을 주고받았으며 넓은 세계를 유람한 작가로 삶을 마음껏 즐기다 떠났다.

이병주를 말하다

대한민국 소설가 이병주(李炳注, 1921-92)의 고향은 산과 강과 바다를 함께 품은 경상남도 하동으로 그를 작가로 키워낸 정서적 자양분은 모두 지리산과 섬진강, 남해바다 하동 포구가 배양한 것이다.

그는 10대 후반에 반항아로 학교문을 뛰쳐나온 이래 일본 유학, 학병, 해방과 이데올로기의 대립, 군사 쿠데타와 투옥에 이르는 격동의 세월을 살았다. 대학교수에서 언론인을 거쳐 전업소설가로 변신한 후 짧지 않은 세월을 세인의 이목을 끌며 사랑과 증오를 함께 누렸다.

이병주는 어린 시절부터 글을 읽고 쓰기를 즐긴 신체가 허약한 아동이었다. 그는 학교에서는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프랑스 문학에 감동받았고, 친삼촌에게서는 민족주의자의 험난한 생애의 비애를 배웠으며, 외삼촌에게서는 독일 과학에 대한 동경의 개안을 얻는다.

평생 이병주를 괴롭혔던 해묵은 의제는 빨갱이, 빨치산 전력 시비다. 그는 자신에게 따라다닌 좌익 혐의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반응했고 그의 사상적 편향에 대한 의심 때문에 숱한 오해와 불이익을 당했다.

이병주는 소설과 에세이집을 합쳐 어림잡아 단행본 100권 이상의 작품을 출간했다. 이중에는 여러 권짜리 ‘대하소설’을 포함하여 장편소설만도 80여 편에 이른다. 작품이 다룬 주제도 정치, 사상, 사회, 시정풍물, 기업행태 등 다양하며 지식인의 좌절과 정치적 항변을 소설에 담았다. 이병주 문학은 사회의식의 소설적 반영이었다.

1961년 8월, 이병주는 『새벽』과 『국제신보』에 실린 두 글로 인해 법정에 서게 된다. 대한민국 언론사를 장식한 수많은 필화사건의 한 단면이다. 분단 후, 작가 구속 제1호 사건이다. 필화가 없었다면 언론이 본업이고 창작이 부업이었을 그는 총칼로 당한 억울함을 붓으로 톡톡히 갚고자 본업을 작가로 바꿨다.

사람은 시대의 상황이 만드는 것이고, 인간은 운명의 이름 아래서만 죽을 수 있다는 그의 수사처럼 작가 이병주도 한국의 상황이 만들어내고 죽인 작가다. 문학이야말로 개인적이자 세대적 경험의 산물인 것이다.

비극으로 마감한 동갑내기 김수영

1968년 6월 15일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이병주와 함께 술을 마시다 폭언을 퍼붓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 김수영이 버스에 치여 세상을 떠난다. 김수영의 때 이른 죽음에 이병주가 관여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후세인들은 이병주를 미워했고 이병주는 그 미움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이병주와 김수영은 생전에는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지만 사후에는 도봉산 중턱에 두 사람의 문학비가 지척에 서 있다. 마치 이병주가 죽어서도 24년 먼저 떠난 김수영에게 상석을 내주어 미안한 마음을 표한다는 듯이.

한국이 낳은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

프랑스 문학 전공자로 자처한 이병주는 나폴레옹이 검으로 이룬 업적을 자신은 펜으로 이루겠다던 발자크처럼 탄탄한 이야기 전개와 구성을 바탕으로 자신은 ‘한국의 발자크’가 되겠다는 야심을 키웠다. 이병주와 발자크의 생애는 서로 닮은 점이 많다고 한다. 이병주의 문학사상을 형성하는 데 중심이 된 대가들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 대표적 3대 거인으로 니체, 도스토옙스키, 사마천을 들 수 있고 그외에 발자크, 알퐁스 도데, 앙드레 지드, 사르트르, 루쉰, 그리고 다산 정약용의 영향을 받았다.

이병주의 대중소설 내지는 ‘통속소설’이 동시대작가들의 작품과 결정적인 차이는 그의 대중소설에는 어김없이 시대현실에 비판적인 지식인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들 지식인 주인공 내지는 주역의 입을 통해 사회적 자의식과 세태비평이 빠짐없이 등장하며, 광범위한 범주의 지식인 딜레탕트가 개입한다. 특히 정치의식을 드러내는 소설들은 저널리즘적 대중성을 짙게 드러내면서, 대중의 교양 욕망, 사회와 정치현실에 대한 비평적 시각과 욕망을 유도하고, 텍스트를 통해 대리만족을 구하는 대중독자의 기호를 충족해주었다.

『산하』(1~7)는 이승만 시대를 그린 대하 실록소설이다. 작품의 주인공 이종문은 맹목적인 이승만 숭배자다. 경상도 김해 출신 노름꾼 이종문은 무작정 상경하여 도박 실력을 십분 발휘해 재산을 모으고 회사를 이승만에게 바치고 대통령의 양자가 되고 건설회사의 거부가 되고 국회의원으로 영화를 누리다 몰락한다.

『관부연락선』(1~2)은 학병문학의 효시로 이병주 최초의 장편소설이자 대표작으로 당시까지 한일 관계를 다룬 작품의 백미로 인정받는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 중에 유독 이 작품만이 평단의 지속적인 관심과 주목을 받아왔다. 작품이 다룬 시기는 후속 작품 『지리산』과 유사하다. 『지리산』은『관부연락선』의 속편으로 인식된다. 『관부연락선』이 학병 체험에 기반을 둔 ‘허구적 사실’이라면, 『지리산』은 ‘만약 그때 학병에 지원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 하에 쓴 ‘사실적 허구’다.

『지리산』(1~7)은 격동기의 현장을 다루면서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평가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일제하의 창씨개명, 친일 유명인사의 행위에 대한 평가, 독일의 프랑스 침공, 스페인 내전, 일본 공산당의 움직임, 문학, 교육제도, 군국주의 철학, 천황제 등에 대한 논의가 담겨 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 농촌문제, 건준과 인공, 그리고 남북분단에 이르는 과정, 과격 폭동, 소시민적 부르주아 의식, 혁명적 인간상, 서대문형무소의 모습 등 시대적 삽화들이 만화경처럼 어우러져 있다. 이들 삽화는 궁극적으로 반공을 위한 기초자료 역할을 한다. 특히 여순 반란사건과 러시아혁명, 제주 반란사건의 분석은 탁월한 역사적 혜안을 느끼게 한다.

이런 역사적 비극의 뿌리를 다루면서 작가는 극한적인 대립 상황에서도 인간은 인간일 수밖에 없으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극단적인 비극은 예방될 수 있다는 신념을 작품 전편에 투영한다.

『그해 5월』(1~5)은 한마디로 박정희 정권 18년에 대한 정치적 단죄를 위해 쓴 것이다. 역사 드라마 속에 자신에게 내린 부당한 재판의 판결문을 전제하는 등 시종일관 박정희에 대한 개인적 원한을 감추지 않았다. 몇몇 장면에서는 이병주의 정치적 소신과 함께, 그 소신을 지켜나가는 데 수반된 인간적 고뇌를 감지할 수 있다.

『바람과 구름과 비』(1~10)는 이병주 역사소설의 백미로 세상과 시대에서 소외된 주변부의 비천과 비루함을 제 운명으로 타고난 인물들이 세상을 뒤바꿀 한마음으로 작당하여 결사에 이르는 것이 이 장편소설의 중심서사다. 작품의 중심인물들은 하나같이 박복한 사람들로 혁명가의 기질을 운명적으로 타고났다.

역사를 불신하고 현실에 분노하다

이병주는 산천을 사랑하는 양민이 전쟁의 두려움 없이 일상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영세중립국을 염원하고, 자유와 평등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 민주주의를 신봉하여 스웨덴과 같은 복지국가를 꿈꿨다. 그는 참된 지식인의 색깔은 흑도 백도 아닌 회색이고. 회색은 포용의 색이라면서 자신만의 회색 정원을 가꾸었다.

이병주는 역사에 대해 격렬하게 분노했다. 나라가 불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진보하기 마련이다. X세대, MZ세대 등 끝없는 분절에도 불구하고 세대를 이어 연면하게 전승되어야 하는 미덕은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과 포용이다. 문학이 세대를 넘어 전승되려면 상상의 고리가 이어져야만 한다. 이병주는 이른바 주류문학의 기준으로 볼 때 그를 기릴 이유만큼이나 미워할 이유도 많았다. 그러나 그가 작가로서 한국문학사에 기여한 공로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는 평론가나 동료문인의 작가가 아니라 오로지 독자만을 섬긴 작가였다.


■ 『밤이 깔렸다: 형법학자가 새긴 이병주의 법/문학/삶』 (하태영 지음, 함향, 439쪽, 2022.04)

『밤이 깔렸다』는 이병주의 작품 10편을 소개하며 해설과 줄거리, 어록을 담은 책이다. 나림 이병주 소설가의 작품을 문학적 탐구라기보다 법학자로서의 저자의 전문지식으로 비춰본 감상평 성격이 짙다.

저자는 형사법 전공학자의 바탕에서, 나림이 남긴 그 시대의 목소리를 찾아나섰다. 나림의 작품을 법률가의 눈으로 읽은 것이다. 해설-줄거리-어록을 요약하며, 깜짝 놀랄만한 문장을 정리했다. 저자는 평한다. 그의 사상은 밤이 깔린 시대의 절박함에서 나왔다고, 그의 작품은 유언이었고, 그의 문장은 행동이었다고. 글쓴이는 감히 추앙한다, 나림은 우리나라 제1의 정통 법률소설가라고.

“밤이 깔렸습니다. 살다보면 밤이 깔립니다. 밤이 깔렸지만 살아야 합니다. 그것도 잘 살아야 합니다. 밤이 깔린 시대를 거침없이 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운명에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이제 위대하고 거대한 것이 되었습니다.

나림 이병주는 다시 나오기 힘든 작가입니다. 지식과 구성 그리고 문장이 모두 탁월합니다. 잊힐 수 없는 작가입니다. 삶의 애환과 운명의 얄궂음에 대한 방대한 글을 남겼습니다.

이병주라는 거대한 산맥의 작은 골짜기 하나를 탐색했습니다. 바로 이병주의 법사상입니다. 이병주 소설 속 법사상에는 강력한 현재성이 있습니다. 법과 법률은 여전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밤이 깔렸다'라는 표현은 이병주의 등단작 <소설·알렉산드리아>의 첫 문장이다. "강렬하다. 위대하고 거대한 여정을 알리는 독백이다. 나림에게 그 암울한 현대사가 '밤'이 되었다. 우리들의 운명을 '깔렸다'고 표현했다. 야만의 시대를 말한 것이다."

저자 하태영 교수는 <소설·알렉산드리아>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림의 감옥 체험이 담긴 소설이다. 형의 육신은 서대문형무소와 부산교도소에 갇혀 있다. 정신은 꿈과 낭만과 욕망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있다. '나'는 해설자이다. 강력한 체험, 뛰어난 상상력, 해박한 근대사·현대사 지식, 문학적 세계관, 웅장한 작품 구조, 간결한 문체가 돋보인다. 이 작품에 복수·분노·자유·희망이 공존한다."

하 교수는 이 소설의 첫 문장 '밤이 깔렸다'를 "군사독재로 읽었다"고 해설했다. 이 소설은 이병주가 언론인 황용주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두 사람은 격동기 부산에서 언론의 중심에서 기개 있게 언론을 지켜낸 인물들이다. 소설에는 한국의 독재법정과 알렉산드리아의 자유법정이 소개돼 있는데, 하 교수는 그래서 이 작품을 "우리나라 법정소설의 효시로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이 책에선 <소설·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예낭 풍물지>, <패자의 관>, <겨울밤-어느 황제의 회상>,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 <운명의 덫> 등을 다시 읽고 정리했다. ‘해제-나림 이병주의 법사상’과 ‘후기 나림 이병주 탄생 101년(1921) · 타계 30년(1992)’도 함께 붙였다. 

하 교수는 해제 '나림 이병주의 법사상'에서 "그의 법사상은 밤이 깔린 시대의 절박함에서 나왔다. 그의 작품이 유언이었고 그의 문장은 행동이었다. 회의사상(懷疑思想)으로 일관했다"고 봤다. “나림 선생은 여러 작품에서 법학·정치·역사·철학·문화 사상이 농축된 자신만의 법사상을 펼쳐 보인다.” 저자의 결론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