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에 대한 몇 가지 노트 : 시네마와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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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에 대한 몇 가지 노트 : 시네마와 미디어
  • 김지훈 중앙대·영화미디어학
  • 승인 2020.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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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훈의 '영화미디어학의 스크린'

이 글은 영화미디어학이 한 편의 영화를 넘어 현상이 된 <기생충>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한 몇 가지 접속 코드를 소개하는 짧은 노트다. 이 코드에 따른 연구는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의 비영어권 영화 작품상 및 감독상 수상이라는 사건의 문화적, 산업적 여파와 그 진폭을 기록하는 것을 포함하는 조금 더 긴 호흡이 요구된다.

1. 적어도 텍스트의 내재적인 차원에서 볼 때 <기생충>은 ‘봉준호의 영화이론 교육법’이다. 여기서 나는 영화이론을 토마스 앨새서와 말테 하게너의 의미에서 사용한다. 이들은 영화이론 및 이와 병행하여 전개해 온 영화 스타일과 제작 양식의 역사를 신체와 감각이라는 라이트모티프로 다시 분류한다. 즉 고전 영화이론 및 현대 영화이론은 영화와 지각, 인간 신체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다양한 개념 및 관념의 집합이다. 이와 같은 주장에 호응하여 앨새서와 하게너는 다양한 영화이론이 제안해 온 이 개념 및 관념이 제시하는 모델을 설명하기 위해 창/프레임, 문/스크린, 눈/응시, 얼굴/거울, 피부/접촉 등의 은유를 고안한다.

<기생충>을 주의 깊게 분석해 보면 봉준호가 이 은유들을 감각하게 하는 영화적 요소들인 촬영, 화면구성, 편집을 주의 깊게 설계하고 작동시킨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먼저 문턱의 은유가 있다. 봉준호는 영화의 오프닝 10분 동안 기택 가족의 반지하 집을 충분하게 소개하고 기우가 박사장의 대저택으로 진입하는 과정을 문턱을 넘어가는 것처럼 전개해 나간다. 대저택 정원으로 진입하면서부터는 촬영과 화면구성이 문턱의 은유를 강화한다. 기우가 계단을 올라갈 때 카메라는 햇빛 너머로 산란될 만큼 찬란한 대저택의 위용을 강조하듯 위를 바라보고, 실내로 진입할 때 대저택의 공간은 깊은 심도를 과시하며 내부의 여러 문을 전개한다. 그리고 지하실로의 숨겨진 문턱을 넘어설 때, 한 장르에서 다른 장르로의 문턱 또한 넘어서면서 또 다른 세계와 존재가 밝혀진다. 즉 문턱의 은유는 <기생충>이 자신의 세계와 관련된 정보를 관객에게 지연시키고 드러내는 과정을 가리키며, 화면구성과 촬영은 바로 관객이 이 정보의 유예와 획득을 시공간적 블록으로 감각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 이 블록의 감각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은 기택 가족이 문광-근세 부부와의 사투 이후 탈출할 때 전개되는 급격한 하강감과 광대한 공간감이다(그전까지 영화적 공간은 반지하와 대저택으로 거의 제한되어 있었음을 기억하자).

‘창으로서의 영화’라는 은유 또한 강력하게 감각된다. 기우가 바라보거나 등을 지는 지하방의 창문과 박사장의 집을 밝히는 넓은 거실 창은 서로 강렬하게 대비된다. 반지하의 창은 소독차의 소독 가스와 취객의 오줌을 향해 개방된 ‘창’이지만, 종국에는 아버지의 부재를 메우는 책무와 밑바닥을 넘어서고자 하는 기우의 (좌절된) 욕망이 투영되는 스크린이 된다. 정원을 향해 환히 개방된 대저택의 넓은 창은 박사장 가족이 자리를 비운 동안 기택 가족이 일시적으로 자리하는, 이후에는 다송이 박사장 부부의 성행위를 외부에서 바라보게 되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시나리오를 투영하는 환상의 스크린이다. 그리고 피부와 접촉의 은유가 있다. 현상학적 영화이론과 접속하는 이 은유는 영화적 경험이 신체의 다른 감각과 분리된 시각중심적인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상정한다. 이 은유는 보이지 않는 계급의 선을 세계의 표면에서 그리게 하는, ‘선을 넘는’ 냄새의 감각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해외의 여러 비디오 에세이들이 탁월한 몽타주의 사례로 분석한 ‘복숭아 장면’은 복숭아 알레르기의 충격과 이를 자극하기 위한 기택 가족의 음모를 압축하기 위해, 카메라 운동 방향과 쇼트의 길이 및 음악이 정확한 평행을 이루며 대비되고 반복될 때 얻어지는 바로 그 리듬의 감각을 조율하고 증폭한다. 

이 은유들은 <기생충>의 세계는 물론 그 세계가 관객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철저히 영화적임을 입증한다. 봉준호는 김기영, 알프레드 히치콕, 조셉 로지, 구로사와 아키라, 이마무라 쇼헤이, 스탠리 큐브릭, 루이스 브뉘엘, 로만 폴란스키, 끌로드 샤브롤 등의 영향을 체화하여 자신의 마스터플랜으로 연장하고, 모든 것이 결정된 닫힌 세계를 구축한다. 양극화 및 자본주의의 모순과 관련된 재현의 차원에서만 <기생충>을 바라본다면 이 세계가 감각되는 방식을 걸러내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2. 이와 같은 감독들이 구축한 닫힌 세계의 계보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기생충>은 일관되거나 단일한 해석의 판본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생충>은 마크 피셔(Mark Fisher)가 말한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 즉 “자본주의의 대안보다는 파국 자체를 상상하는 게 나은 상황”을 제시하면서도 ‘가난 포르노’에 가깝다는 일부의 비판은 물론(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생태주의(기택 가족과 다른 하층민들이 겪는 갑작스런 수재) 및 페미니즘(왜 기정이 희생되고 결말은 가부장적 가족주의를 긍정하는가) 입장에서의 해석마저도 자극한다. 앨새서는 이와 같이 다양한 정체성과 입장, 배경을 가진 대중을 향해 말을 거는 제임스 카메론과 같은 동시대 할리우드 작가의 전략을 설명하며(예를 들어 <아바타>는 다양한 인종과 이데올로기적 해석에 열려 있었다) ‘모두를 위한 접근(access for all)’이라는 용어를 쓰고, 이 전략은 “텍스트적으로 일관된 모호성”이나 “내러티브의 자기-모순”마저도 포함하는 계산된 통제를 의미한다고 말한 바 있다.

<기생충>의 경우 이 일관된 모호성 또는 자기-모순이 기입된 일종의 얼룩은 산수경석(landscape/scholar stone)이다. 산수경석은 철저히 영화적으로 구축되고 감각되는 극적인 세계의 일관성을 뒤흔드는 일종의 외부 원인으로 삽입되고, 이 세계에 알레고리의 분위기를 드리우는 데 기여한다(박서준이 ‘특별 출연’한 친구 민혁은 오프닝 이후 사라지고, 그가 전한 돌마저도 그의 ‘할아버지’가 준 것이다). 기우가 애초부터 상징적(metaphorical)이라고 말하는 산수경석은 교환의 산물로 변환되지 않고 오히려 지나친 상징적 무게를 담보하면서 (그리고 한편으로 그 무게를 비워버리면서) 극적 세계의 그럴듯함이라는 중력을 벗어나 떠오른다. 이와 관련하여 봉준호는 “한국 관객이 영화의 모든 상징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데 매우 민감함”을 수석 선택의 배경으로 제시하면서 이 선택이 ‘의도적으로 이상한(deliberately strange)’ 것이었음을 말한 바 있다. 기우가 수석 케이스를 여는 순간 수석의 시점에서 돌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앙각 쇼트는 이후 수몰된 집에서 기우의 시점으로 돌을 건져내는 부감 쇼트와 호응한다. 이와 같은 호응은 다양한 상징적 해석을 견인하는 일종의 대상a(objet petit a)로 삽입되었으면서도 최소한의 영화적인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으로 이상함을 뒷받침하는 의도성, 모순의 삽입과 작동마저도 포함된 통제를 시사한다. 

3. 자기-모순마저도 통제의 일부로 삼는 봉준호의 작가적인 면모는 <기생충>이 접고 펼치는 프레임 내부만으로는 입증되지 않는다. <기생충>과 관련된 봉준호의 작가성은 티모시 코리건(Timothy Corrigan)이 말한 ‘상업적 작가(commercial auteur)’의 경로를 통해 구축되고 강화되어 왔다. 코리건은 뉴 할리우드(New Hollywood)가 수립된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영화문화에서 감독의 작가성이 작품 자체뿐 아니라 영화제, 홍보, 인터뷰, 미디어 노출 등을 포함하는 텍스트-바깥의(extra-textual) 행위들로 결정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오늘날의 작가는 그들이 원하든 아니든 간에 스타로서의 지위를 막 획득하려는 행위자(agent)다.”

“오스카는 로컬 영화 시상식”이라는 유명한 발언, 계급의 장벽을 넘을 수 없어도 넘을 수 있어야 했던 ‘자막의 1인치 장벽’, 그리고 NBC ‘투나잇 쇼’의 출연은 <기생충>과 관련된 많은 텍스트-바깥 행위들의 일부일 뿐이었다. 아카데미에서의 업적 덕택에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 지금까지 <기생충>의 북미 배급사 네온(Neon)과 CJ E&M의 주도로 봉준호가 참여한 미디어 캠페인의 이력은 빠른 속도로 국내 대중에게도 알려지고 있다. 칸에서부터 아카데미상 시상식 직전까지 봉준호는 500회 이상의 인터뷰를 했고, 이 캠페인에 참여하기 전 <옥자>의 제작자는 “<기생충>은 어워드 시즌 영화로 분류가 됐고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투수 등판하듯이 마운드로 가야 한다”라는 충고를 그에게 건넸다고 한다. 네온의 공동대표 톰 퀸(Tom Quinn) 또한 봉준호가 토론토영화제에서의 언론노출 이후 정신적인 ‘멘붕(meltdown)’을 겪었음에도 주변에서 그가 캠페인에 계속 헌신해야 한다고 말했음을 밝힌 바 있다. 그 충고를 받아들인 결과 봉준호와 배우들은 “봉고차를 타고 미사리를 도는 유랑극단처럼 움직여 온” 관객과의 대화 강행군과 다양한 상영회 및 파티와 미팅에 참석해 왔다. 모든 것에는 계획이 있었다.
 
4. 물론 스타로서의 작가라는 봉준호의 이미지는 그 자신을 둘러싼 다른 행위자들의 작용에 영향을 받는다. 아카데미에서의 업적 덕택에 이 행위자 중 네온과 CJ E&M은 물론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라는 제도적 행위자, 그리고 ‘oscarsowhite’ 해시태그 캠페인을 포함하여 이 행위자의 변화를 다양성의 포용(inclusion)이라는 이름으로 몇 년 전부터 요구해 온 다양한 젠더와 인종의 행위자들 또한 봉준호의 말과 행위를 기사화해 온 많은 미디어와 더불어 가시화되었다(봉준호의 아카데미 수상이 산드라 오와 같은 플레이어를 넘어 왜 북미 아시아계 미국인 공동체의 열광을 불러일으켰는가는 향후의 흥미로운 연구 과제 중 하나다). 이 점은 비록 봉준호의 스타로서의 작가성이 스필버그(‘봉필버그’라는 잘 알려진 또 다른 별명을 생각해 보자)나 카메론, 또는 타란티노와 유사한 텍스트-바깥 행위들을 통해 구축되었다고 하더라도 이전과는 다른 행위자들의 개입을 고려해야 함을 뜻한다. 이들의 존재는 <기생충>을 둘러싸고 빠른 속도로 소셜 미디어에 업로드되고 증식되어 온 파라텍스트(paratext)로 확인된다. 본래 제라르 주네트가 문학 텍스트를 둘러싼 주변적 텍스트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제시한 파라텍스트는 영화와 TV 연속물의 예고편, 스핀오프, DVD 보너스 영상, 속편은 물론 스포일러와 팬 픽션 등 대중이 만든 산물 또한 포함한다. 이와 같은 미디어 산업의 부산물을 연구한 조너선 그레이(Jonathan Gray)는 “파라텍스트가 영화나 TV 프로그램 자체만큼이나 서로 다른 대중 구성원이 이상적 텍스트를 구축하는 방식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라고 주장한다.

소셜 미디어의 네트워크 속에서 <기생충>의 파라텍스트는 기존 프랜차이즈 블록버스터의 파라텍스트인 예고편이나 매시업, 속편이나 프리퀄을 넘어선다. 네온이 업로드하여 53만 7천 회의 조회 수를 기록한 바이럴 비디오인 박소담의 ‘제시카 징글을 배워봅시다’처럼 미디어 산업 플레이어가 제작한 부가 콘텐츠에도 국한되지 않는다. 유튜브에 업로드된 리액션 비디오, 그리고 사용자가 제작한 영화의 리뷰 및 상징 해석 비디오는 국내 이용자만의 현상이 아니다. 대활약을 해 온 통역사 샤론 최의 원어민적 표현을 분석하고 칭찬하며 영어의 교본으로 제시하는 한 영어 강사의 영상은 ‘짜파구리’의 재료를 두고 한국의 음식 문화와 계급과의 관계를 해석하는 해외 사용자의 영상과 추천 알고리즘으로 연결된다. 칸 영화제 시사회에 참석한 몇몇 리포터가 가볍게 트위터에 시작한 ‘봉하이브(bonghive)’ 해시태그는 아카데미 시상식 무렵에는 봉준호 자신도 놀랄 정도의 팬덤으로 확산되었고, 이를 간접적으로 반영하듯 그는 수상 직후 인터뷰에서 오늘날의 관객이 자막의 장벽을 “스트리밍 서비스와 유튜브, 소셜 미디어를 통해 넘고 있으며” 이런 환경 내에서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이쯤 되면 <기생충>의 장소는 어디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기생충>과 나란히(para) 기생하는 텍스트는 영화관에 근거하는 <기생충>을 숙주(host)로 삼으면서도 하나의 장소(site)와 스크린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적 세계의 구축과 영화적 전통의 회복을 입증하는 <기생충>은 분명 ‘시네마’에 속하지만, 봉준호의 작가성과 <기생충>의 문화적 현상은 전통적인 시네마로 환원되지 않는 ‘미디어’의 세계에 속한다. 후자는 어쩌면 봉준호가 존경을 표한 마틴 스코세이지가 전통적인 영화와는 다르다고 단언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즉 예측불가능한(unexpected) 것과의 대면을 가능하게 하는 <기생충>의 세계와는 대비되고 산업적 통제와 이에 호응하는(종종 이를 초과하기도 하는) 팬들의 생산성으로 지배되는 세계와 더 친화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봉준호가 말한 ‘연결’은 이 두 세계의 접속과 횡단으로 연장된다. 이 접속과 횡단의 운동 속에서 영화적 세계의 깊이와 기술적, 주제적 지배의 폭을 식별하는 전통적 시네필리아, 그리고 작가적인 정전 및 영화적 감식안에 국한되지 않고 젠더, 인종, 국가적 의제 속에서 다양하게 영화를 해석하고 소셜 미디어의 인터페이스로 전용하며 팬덤의 속성마저도 띠는 뉴 시네필리아(new cinephilia)가 공존하고 경쟁하며 서로를 견인한다. <기생충>과 봉준호 현상을 영화미디어학의 관점과 도구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공존과 경쟁, 견인의 역학을 설명할 수 있는 지적 몽타주를 수행해야 한다. 

 

김지훈 중앙대·영화미디어학

중앙대학교 영화미디어연구 교수. 저서로 『Between Film, Video, and the Digital: Hybrid Moving Images in the Post-media Age』(Bloomsbury, 2018/2016), 번역서로 『북해에서의 항해』(2017),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2005)가 있고 히토 슈타이얼의 『스크린의 추방자들』 개정판(2018) 감수와 해제를 맡았다. 실험영화 및 비디오, 갤러리 영상 설치 작품, 디지털 영화 및 예술, 현대 영화이론 및 미디어연구 등에 대한 논문들을 <Cinema Journal>, <Journal of Film and Video>, <Screen>, <Camera Obscura> 등 다수의 국내 및 해외 저널에 발표했다. 현재 두 권의 저작 『Documentary's Expanded Fields: New Media, New Platforms, and the Documentary』와 『Post-verite Turns: Korean Documentary in the 21st Century』를 작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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