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자유의 본질…자유의 이중성과 파시즘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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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자유의 본질…자유의 이중성과 파시즘의 유혹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5.22 07: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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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강연]

■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5강_ 이진우 포항공대 명예교수의 「인간 자유의 본질」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합리성의 증대는 자유의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한다. 자유의 이념과 지향에 관한 동서양의 지적 자산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첫째 섹션 ‘자유의 이념과 지향’ 제5강 이진우 명예교수(포항공대) 강연의 서론과 결론부를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인간 자유의 본질


이진우 교수는 “이제까지 우리는 인류 문명이 자유를 위해 탄생했고, 자유 실현의 과정을 통해 진보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오늘날 이러한 자유 이념에 대한 믿음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라고 현실을 진단한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자유는 평등, 정의, 안전, 행복 등의 다른 가치들과 거래할 수 있는 상대적 가치에 불과한 것”인지, “21세기의 현대인에게 자유는 어떤 의미”가 있고 또 “자유의 본질은 도대체 무엇”인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답변을 듣기 위해선 “니체와 하이데거를 만날 수밖에 없다라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니체와 하이데거는 ‘자유의 본질’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물은 사상가”이기 때문이라고 밝히는데, 이 두 사상가의 힘을 빌려야 하는 보다 큰 까닭으로 “자유의 가치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시대에는 자유의 질문이 “정치적이지 않고 기술적인(not political but technical)” 문제였다면” 현재와 같이 “허무주의 시대 자유의 질문은 “정치적이지 않고 형이상학적인(not political but metaphysical)”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자유의 역사를 허무주의의 발전 과정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자유의 본질에 도달”하고자 한 “니체와 하이데거의 자유 이념을 분석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왜 그들이 파시즘의 유혹이 되는가를 살펴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의 이념이 ‘형이상학적이 아니라 정치적으로(political not metaphysical)’ 해석되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지난 4월 30일, 이진우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5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허무주의 시대의 자유의 위기

이제까지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은 위기의 징후다. 21세기 위험 사회에서 자유는 더 이상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가치가 아니다. 자유의 이념은 서양 문명의 근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늦어도 근대 이후에는 절대적인 가치였다. 자유는 정치적 행위의 전제 조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실현해야 할 목적이었다. 이러한 자유의 이념이 이제 절대적 타당성을 상실한 것이다. 

자유는 정치적인 목적의 문제인가, 아니면 기술적인 수단의 문제인가? 이제까지 우리는 인류 문명이 자유를 위해 탄생했고, 자유 실현의 과정을 통해 진보한다고 생각하였다. 프랑스 대혁명 이래 보편화된 자유 의식이 자유가 삶의 목적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가 합의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자유를 실현할 수단을 구하면서 자유는 이제 기술적인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자유 이념에 대한 믿음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니체가 다음 두 세기의 역사라고 얘기한 허무주의는 이제 진부해지고 평범해졌다. 허무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고 가치들이 탈가치화되는 것이다. 서양 문명의 최고 가치가 자유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허무주의는 자유의 가치가 타당성을 상실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자유는 평등, 정의, 안전, 행복 등의 다른 가치들과 거래할 수 있는 상대적 가치에 불과한 것인가? 21세기의 현대인에게 자유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자유의 본질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니체와 하이데거를 만날 수밖에 없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자유의 본질’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물은 사상가이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자유의 역사를 허무주의의 발전 과정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자유의 본질에 도달하고자 한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자유의 본질을 구하기 위하여 근대 합리적 계몽주의의 산물인 자유민주주의를 폄훼하고 부정한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왜 자유의 본질을 회복하려 하면서도 자유의 실현에 필수적인 평등주의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인가? 우리는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에 나타나는 이러한 이중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자유의 이념을 회복하려 하였던 니체와 하이데거가 파시즘의 창시자로 오해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유를 추구하는 철학자가 반자유주의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실로 수수께끼이다. 철학자가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은둔하여 만들어낸 개념은 형이상학적이다. 형이상학적 개념은 오독되고 오해되면 구체적 현실에서는 파괴적 결과를 초래한다. 위대한 사상가는 위험한 사상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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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유의 이중성과 파시즘의 유혹

니체와 하이데거처럼 반평등주의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인 사상가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가 되었다는 점도 수수께끼지만, 이들이 ’자유의 본질‘을 그 어떤 철학자들보다 깊이 천착하였다는 사실은 여전히 풀기 어려운 미스터리다. 니체와 하이데거가 위대한 사상가라는 사실만큼 그들이 동시에 위험한 사상가라는 점도 분명하다. 그런데 니체는 왜 정치적으로 오용되고, 하이데거는 정치적으로 오판한 것일까? 우리는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단서를 하이데거가 1936년 여름 학기에 “셸링: 인간 자유의 본질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행한 강의에서 찾을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유럽에서 국가와 민족의 정치적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허무주의에 대한 반대 운동을 유도한 두 사람, 즉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여러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니체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그래도 니체 사유의 진정한 형이상학적 영역이 직접적으로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했다.” 파시즘이 허무주의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시작되었다면, 두 위대한 사상가와 파시즘을 연결하는 고리는 바로 허무주의다.

허무주의는 단순한 정신적 상태나 문화적 퇴폐를 의미하지 않는다. 허무주의는 우리의 삶과 사회에 의미를 부여하였던 최고 가치를 무력하게 만드는 역사 운동이다. 파시즘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는 명분으로 국민을 동원한다. 국가와 민족은 새로운 인간 유형을 창조하는 도구가 된다. 하이데거는 파시즘의 두 대변인이 허무주의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고 말함으로써 정치적 면책의 길을 열어놓지만, 허무주의와 파시즘 사이에 본질적 유사성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21세기 우리는 다시 파시즘의 위협을 받고 있다. 포퓰리즘과 신권위주의로 무장한 새로운 파시즘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나치 독일의 몰락으로 전체주의가 사라지지 않듯이 스탈린의 죽음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은 불가피하다.”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갈등과 문제를 ‘인간다운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때면 파시즘은 우리를 강하게 유혹한다. 파시즘은 현대성의 산물인 자유주의, 평등주의 및 민주주의를 부정한다. 니체와 하이데거 역시 현대성을 예리하게 비판한 사상가인 것은 분명하다.

 

물론 니체와 하이데거는 파시스트도 아니고 파시즘의 창시자도 아니다. 개인에 대한 국가의 우선성과 개인 또는 민족 사이의 자연주의적 불평등이 파시즘의 두 가지 요소라고 한다면, 니체와 하이데거는 분명 파시스트 사상가가 아니다. 니체는 “국가는 모든 냉혹한 괴물 가운데 가장 냉혹한 괴물”이라고 비판하면서 국가주의를 단호하게 반대한다. “국가가 끝나는 곳, 그곳에서 비로소 쓸모없지 않은 인간들의 삶이 시작된다.” 하이데거의 반유대주의적 발언에도 불구하고 그를 인종주의자로 보기는 어렵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관심은 기술 권력에 의한 표준화와 획일화로 표출되는 허무주의에 집중된다. 니체는 진실도, 목표도, 가치도, 의미도 없다는 엄연한 진실을 정직하게 직시해야만 진정한 지적 해방과 모든 가치의 재평가를 위한 길을 닦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처해 있는 존재 상황을 성찰해야 비로소 존재와 본래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믿는다. 니체는 파시즘의 창시자가 아니라 파시즘을 산출한 시대적 위기의 예언자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모두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추구한다. 니체의 ‘위대한 정치’와 하이데거의 ‘메타정치’는 허무주의가 초래한 반문화적 병에 대한 치료제로 제시된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정치적 이유에서 반정치적 사상가였지만, 철학적 이유로 정치적 사상가였다고 할 수 있다. 니체에게 어떻게 하면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고 또 자기 극복을 통해 진정한 주권적 개인이 되는가가 문제였다면, 하이데거의 문제는 기술 권력으로 파괴된 상황에서 어떻게 존재 자체와 진정한 관계를 맺는가였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바로 자유의 본질을 새롭게 성찰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바로 자유의 본질에 관한 성찰이 정치적 의미의 자유를 파괴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자유를 ‘정치적이지 않고 형이상학적인(not political but metaphysical)’ 방식으로 접근한다. ‘형이상학적인 자유’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면,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자유’를 파괴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가 “정치의 의미는 자유”라고 말할 때, 자유는 다양한 개인들과 이들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핵심적 이념이다. 자유는 개인의 특성이지 결코 공동체의 특성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자유로운 국가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이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자유를 세계와 역사, 그리고 존재 전체로 포괄적으로 확장하면, 개인의 자유는 간과되거나 무시될 수 있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구원하기 위하여 형이상학적 자유는 성찰의 영역으로 남겨놓아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에 대한 ‘형이상학적이 아닌 정치적인(political, not metaphysical)’ 접근 방식이다. 여기서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를 구별하는 이사야 벌린의 관점은 유용하다. 벌린이 자유주의의 핵심으로 파악하는 소극적 자유는 모든 외부의 간섭과 제약으로부터의 보호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부정적 자유[freedom from]’다. 부정적 자유는 다른 사람의 침해를 배제하기 위하여 주변 환경에 대한 개인의 통제를 의미한다.

이에 반해 적극적 자유는 구속으로부터의 해방만이 아니라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목적으로의 해방[freedom to]을 추구한다. “자유라는 단어의 긍정적 의미는 개인이 자신의 주인이 되기를 바라는 데서 비롯한다. 나는 내 삶과 결정이 어떤 종류의 외부 세력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달려 있기를 바란다.” 적극적 자유는 외부의 구속을 받지 않고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행하는 것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욕망해야만 하는 것을 행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비합리적 충동, 성격의 약함, 허위의식과 같은 내면적인 제약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극적 자유는 진정한 존재 방식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그것을 실현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적극적 자유는 우리가 될 수 있는 최고의 존재를 추구한다. 니체의 자기 극복과 하이데거의 실존적 결단이 추구하는 이러한 이상은 쉽게 폄하할 수 없다.

그러나 이사야 벌린은 부정적 자유를 선택한다. 적극적 자유는 종종 올바른 삶과 진정한 존재에 관한 이상을 규범적으로 설정하기 때문에 개인들의 다원성을 파괴한다. 벌린은 적극적 자유에 대한 추구가 역사적으로 종종 “잔혹한 폭정을 허울만 그럴듯하게 위장하는 규정된 형태의 삶”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의 삶과 사회에는 적극적 자유를 위한 자리가 있다. 그렇지만 적극적 자유는 소극적 자유를 보호하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소극적 자유에 예속되어야 한다. 정치적 의미에서의 자유는 오직 개인의 사적 자유를 산출하고 보호할 때만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정치적 자유를 굳건히 받칠 확고부동한 토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를 확실한 가치로 환원하려는 순간, 자유는 파괴된다. 자유란 가치의 다원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허무주의는 다양한 가치의 출현을 가지 자체의 부재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이데거가 허무주의의 한가운데서 “오직 하나의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 ‘적극적 자유’로 향하려는 의지일지도 모른다. 신이 죽은 시대에 우리는 새로운 신이 필요한 것인가? 허무주의 시대에 우리에게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물음이다.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려면 우리는 자유를 피할 수 없다. 인간이 무엇이 될 수 있는가는 여전히 그의 자유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유를 추구하고,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 자신이 된다. 자유의 본질에 관한 니체와 하이데거의 성찰은 우리가 자유를 통해 우리 자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두 사상가에게는 동시에 야스퍼스가 말한 것처럼 “무시무시한 것은 자유 자체 속에 타락의 근거가 놓여 있다.”라는 사실이다. 잘못 이해된 자유는 타락한다. 자유의 본질에 관한 위대한 사상이 오해될 때 그 결과는 훨씬 더 치명적이다. 우리가 니체와 하이데거의 사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면 그들의 잠재적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해야 한다.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인간 자유의 본질 (이진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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