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철학의 무의식에는 “정신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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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철학의 무의식에는 “정신분석”이 있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5.15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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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철학과 정신분석 | 홍명희·조현수·지영래·김상록·이은정 외 10명 지음 | 그린비 | 656쪽

 

현대 프랑스철학의 무의식을 분석해 본다면 그 안에는 프로이트라는 이름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 프랑스철학은 프로이트의 창조적 변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들뢰즈, 푸코,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베르그송, 사르트르와 같은 사상가들 중 정신분석을 경유하지 않은 이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프랑스철학에 미친 정신분석의 지대한 영향을 집대성한 책으로, 무의식에 관한 프로이트의 통찰을 계승 및 비판하고자 했던 프랑스철학자들의 시도를 파노라마처럼 정리하고 있다. 정신분석과 현대 프랑스철학의 밀접한 관련성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국내 연구서가 부족한 현실에서 철학, 미학, 현상학, 문학을 아우르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프로이트라는 프레임으로 새로운 프랑스철학사를 써 내려갔다.

흔히 무의식은 의식이 억압한 욕망들로 이해된다. 의식은 어떤 심리적 표상을 억압하여 자신의 영역 밖으로 추방하는데 이로 인하여 무의식이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철저히 개인의 차원에 속해 있으며, 어린 시절에 억압당한 성적 욕망이라는 키워드로 이해된다. 그런데 베르그송에게 무의식은 이와는 조금 다른 의미를 띤다.

얼핏 보면 베르그송이 말하는 ‘기억’과 ‘지속’ 역시 무의식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지속되는 시간 속에 있고, 지나온 시간은 그 자체로 거대한 기억이 된다. 그리고 이 기억은 우리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기억 속 모든 장면들을 의식에 남겨 둘 순 없다. 때문에 생존에 도움이 되는 소수의 순간들만 남고, 대부분의 순간들은 의식에 의해 적극적으로 배제되어 어두운 저편으로 사라진다.

여기까지는 베르그송과 프로이트의 차이를 찾기 힘들지만, 이후에 더욱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베르그송에게 기억은 개인의 기억이 아니라 우주의 기억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나의 기억만이 아니라, 전 우주가 이제까지 살아온 시간인 것이다. 우주의 탄생이 있다면 그때부터 시작된 시간의 흐름은 내가 지금 경험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을 것이다. 이에 따라 나의 현재 속에 보존되어 들어오는 과거는 우주의 모든 과거를 포함하게 된다. 무의식은 단지 억압된 개인의 욕망에 차원에 머물지 않으며, 단절 없이 이어진 시간의 지속이라는 개념까지 확장된다. 환자의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이 시간이라는 거대 담론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관계를 맺었던 오이디푸스. 그에 관한 이론은 무의식의 형성 과정을 가부장적 가족모델로 해명하려는 시도이며, 흔히 정신분석가들에 의해 무의식의 보편구조로 제시된다. 그런데 들뢰즈와 과타리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오이디푸스가 특정 사회유형에만 유효할 뿐만 아니라 그런 사회유형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음을 고발한다. 그들에 따르면 오이디푸스는 한 가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미개, 야만, 문명이라는 각 사회체를 지탱하기 위한 상징으로 사용된다.

‘미개 사회체’에서도 오이디푸스는 근친상간의 금지를 위해 사용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버지의 억압이 없으며, 혈연과 결연 제도 그 자체가 억압의 주체가 된다. 억압하고자 하는 것도 어머니에 대한 욕망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근친상간을 포함하는 ‘배아적 흐름’이다. 근친상간은 행정적 목적을 위한 직계 혈연과 정치적 성격의 방계 결연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억압은 필수적이다.

놀랍게도 ‘야만 사회체’에서 근친상간은 전제군주의 자격이 된다. 전제군주는 신과 직접 혈연을 맺고 있는데, 어찌 그가 신이 핏줄이 아닌 자들과 결혼할 수 있겠는가? 그는 어머니 및 누이와 결혼하여 신과의 직접 혈연을 연장한다. 이 오이디푸스는 아버지에 의해 억압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억압한다. 야만 사회체를 성립케 하는 이 근찬상간은 전제군주에게만 허용되고 다른 모든 이들에게는 금지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문명 사회체’에서 우리가 흔히 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구도가 등장한다. 이 오이디푸스는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복종의 방식을 우리에게 내면화하기 위해 존재한다. 아버지나 아들 같은 가족적 기능들은 자본가나 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기능들에 의해 미리 규정되어 있어, 전자는 후자를 적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사람들은 “도처에서 아버지, 어머니, 나를 재발견하는 등가성의 체계” 속에서 사장, 선생, 대통령 등을 “부모 형상들의 파생물 내지 대체물”로 이해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사회적 기능들의 이미지가 실제의 가족구성원들을 규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의 가족구성원들이 사회적 기능들의 이미지들로 확장되어 오이디푸스는 비로소 완성되기에 이른다.

프로이트주의가 남긴 부작용은 정신 질환을 앓는 환자들을 하나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이디푸스 신화의 결과물이 되었으며, 정상적인 위치로 돌려보내야 할 구성물이 되었다. 의미는 이미 구성되어 있고 정신분석의 작업이란 환자들에게 그 의미를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기존의 프로이트적 구조에서 벗어나 다양한 가능성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프로이트를 재해석할 수는 없는 것일까? 앙리 말디네는 오이디푸스의 구조에 대한 실존적인 재해석을 통해 인간의 가족 관계라는 삼각형에서 벗어난다. 그에 따르면 아이는 “자신의 출입구가 외부세계로 문을 조금 열고 있는 존재”이다. 오이디푸스적인 삼각측량은 현실의 세 인격으로 이루어진 주제적인 삼각관계가 아니라 아이의 실존적 태도가 된다. 이 태도는 “세계로 열린 어린이이의 존재”양식이요, 그가 타인과 사물은 물론 자기 자신과도 소통하는 방식이 된다. 우리는 환자를 병리적으로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의 초월성과 개방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프로이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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