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은 얼마나 진실한가 –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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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얼마나 진실한가 –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 승인 2022.05.14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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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지금 배가 부른데 빵집 옆을 지나면서 빵을 훔치는 것과 똑같잖아.”
“그게 어때서? 빵이 때로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좋은 냄새를 풍기는걸.”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두 남성의 대화이다. 노총각 레빈이 자식 여럿 딸린 유부남 친구 스티바에게 왜 자꾸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파느냐고 나무라자 스티바는 빵 냄새가 좋으면 집어들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항변한다. 스티바는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자식들의 가정교사와, 극장의 무용수와 쉴 새 없이 바람을 피운다. 궁색한 가정 형편은 나 몰라라 하고 애인 사줄 선물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하여튼 이렇게 앞뒤 분간 못하고 여자 밝히는 남자는 딱 질색이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는가. 이 유부남 아저씨가 나중에 어떤 꼴을 당할지 궁금하고 말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친정 오빠이기도 한 스티바는 별 고민 없이 속 편하게 사는 유형이다. 세상 돌아가는 상황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다가 연줄을 찾아 청탁해 공직 자리를 얻는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업무를 대단히 중요한 일인 양 해낸다. 값비싼 식당에서 최고급 요리를 외상으로 즐긴다. 그리고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험한 꼴은 당하지 않는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렇게 자기 좋을 대로 잘 살았을 듯하다.

그 여동생 안나는 어린 아들에게만 마음을 쏟으며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이어가다가 청년 장교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게 되고 결국 사랑에 빠진다. 사실 여기까지는 별다른 상황이 아니다. 그때 그곳, 그러니까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중반의 러시아 귀족사회에서는 바람을 피우지 않는 부인이 오히려 이상한 존재로 그려지니 말이다. 청년들은 결혼한 여성을 따라다니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간통에 끌어들이고자 하고 그것을 삶의 재미, 청년의 특권으로 여긴다. 귀부인들은 바람을 피우지 않는 척하고, 남편들은 배우자의 부정을 모르는 척한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o Nikolayevich Tolstoy / Lev Nikolayevitch Tolstoy, 1828~1910)

안나 역시 그렇게 행동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안나가 자기 사랑을 숨기지 않고 그 사랑에 최선을 다하려 했다는 데 있었다.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이 진실성 때문에 결국 안나는 파멸을 맞는다. 남편과 이혼하려 하지만 거부당한다.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도 보지 못하게 된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고 지식을 쌓지만 세상은 그런 노력을 필요로 하지도, 알아주지도 않는다. 귀족 사회에서 배척되면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손가락질만 당한다. 사면초가 상황에서 안나는 연인에게 집착하지만 여전히 사교계 생활이 가능한 연인은 이에 부담을 느끼고 싸움이 잦아진다…….

결국 안나는 술과 약물에 의존하게 되고 종국에는 기차 아래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다. 다른 출구를 찾지 못해 나온 선택, 세상의 거짓과 가식에 맞설 힘이 소진된 결과였다. 그래서 나는 안나를 ‘바람나서 자살한 여자’로 단순하게 바라볼 수가 없다. 그 시대, 그 장소, 그 상황에 내가 있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계속 고민하게 된다. (적당히 바람피우면서 세상이 기대하는 대로 가식적 삶을 살아가지 않았을까.) 더 나아가 지금 이곳의 내 상황에는 어떤 거짓과 가식이 자리 잡고 있는지 살피게 된다. 

1877년에 출간된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내게 특별한 작품이다. 읽고 자유롭게 감상을 나누는 방식의 수업을 통해 여러 차례 새롭게 접했던 경험 때문이다. 대학생들은 대학생들대로, 성인 독자들은 성인 독자들대로 다양한 논의거리를 찾아내고 각자의 현실과 삶을 투영하며 소설을 읽었다. 아마 『안나 카레니나』를 읽는 독자들 누구나 그러지 않을까 싶다. 책장을 넘기며 톨스토이가 펼쳐놓은 세상 속에 들어가는 시간은 독자의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과정, 너나 할 것 없이 입체감과 설득력으로 무장한 등장인물 한명 한명에게서 독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글쓰기 강좌를 운영하며 저서 『번역은 연애와 같아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등을 출간했으며, 『첫사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안톤 체호프 단편선』과 같은 러시아 고전을 비롯하여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홍위병』, 『콘택트』, 『레베카』 등 9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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