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김지하 시인과 김대중 대통령 관련 사료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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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김지하 시인과 김대중 대통령 관련 사료 공개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5.11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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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관장 한석희)은 5월 8일 별세한 김지하 시인과 김대중 대통령 관련 사료를 공개한다. 이번에 공개하는 사료는 총 4개이며, 이 사료들은 김대중 대통령과 연관된 김지하 시인의 활동과 한국 민주화 운동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다.

공개 사료 1은 1973년 4월 미국에서 발간된 김지하 시인의 시집 표지와 시집에 수록된 김대중의 추천사이다. 1973년 4월 재미 민주화‧통일 운동가 임창영 박사는 김지하 시인의 활동을 미국 교포들에게 알리기 위해 김지하 시인의 대표적인 시인 ‘오적(1970년 발표)’과 ‘비어(1971년 발표)’가 수록된 시집을 발간했다. 김지하 시인이 저항 시인으로서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자 재미 교포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이 시집에는 발행인 임창영 박사의 발간사인 ‘머릿말’과 당시 반유신 투쟁을 위해 해외 망명 중이던 김대중의 추천사인 치사(致辭)가 수록돼 있다.

 

김지하 시인은 1970년대 초부터 해외에서도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그가 크게 알려지게 된 것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1974년부터다. 따라서 그보다 이른 1973년 미국에서 발간된 이 시집은 김지하 시인의 활동과 그의 시가 해외에 알려지게 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또한 1970년대 초부터 김지하 시인과 인연이 있었던 김대중이 추천사에서 김지하 시인과 그 시에 대해 평론한 것도 의미가 크다.

공개 사료 2는 1974년 토머스 모건(Thomas E. Morgan)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 위원장에게 보낸 탄원서이다. 1974년 7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김지하 시인이 사형선고를 받자 국제적인 구명운동이 전개됐으며, 미국에서는 1973년 7월 김대중이 망명 기간 중 조직한 한민통 미국 본부가 그 역할을 했다. 한민통 미국 본부는 김지하의 구명과 1973년 8월 납치된 김대중의 자유로운 활동을 촉구하기 위해 토머스 모건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 위원장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작성했다.

 

유신 정권 초반에는 김대중이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투쟁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졌었다. 김대중은 야당의 대통령 후보였고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납치 테러 사건을 통해 죽을 고비를 넘긴 이후 국제적으로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김대중과 함께 김지하 시인이 국제적으로 크게 알려지고 있음을 이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김지하가 저항 시인으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공개 사료 3은 1975년 10월 11일 미국에서 개최된 ‘김지하의 밤’ 관련 자료로, 김지하 시인은 1975년 2월 15일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지만 불과 한 달여 뒤인 3월 14일에 재수감됐다(재수감된 이후 1980년 12월 11일에 석방). 그래서 1974년 사형선고 이후 전개됐던 김지하 시인을 위한 국제적인 인권 회복 운동이 재개됐는데, 이와 관련된 자료이다.

 

‘김지하의 밤’ 행사 자료를 보면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다가 유신 정권에 의해 추방된 시노트 신부가 강연을 했고 한국 현대사 연구의 석학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영시 낭독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재미교포와 외국인 사이의 연대 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회복 투쟁이 국제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개 사료 4는 김지하 시인의 모친 정천대자 여사가 1975년 미국의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The Korea Relief Fund in Greater Philadelphia) 김순경 회장(템플대 화학과 교수)에게 보낸 편지이다.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는 1974년 8월 1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조직된 재미 인권 운동 단체로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가와 그 가족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줬다. 김순경 회장은 1대 회장으로서 1974년부터 1981년까지 회장직을 맡았다. 

 

편지 내용을 통해 당시 김지하 시인이 겪어야 했던 수감생활의 고통을 알 수 있으며,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미국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공개 사료 1. 김대중의 추천사(치사(致辭)) 전문]

김지하는 1941년 전남 신안군에서 출생했으며, 1959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미술과에 입학하여 1966년인 7년 만에 졸업했다. 이 동안 그는 4·19 학생혁명에 적극 참가하고 5·16 ‘쿠데타’ 때는 지하로 숨고 6·3 한일 굴욕 회담 반대를 지휘하다 두 번이나 투옥당했다. 그리고 그는 대학 졸업을 전후하여 부두 노동자, 탄광부, 영화 스크립터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서민 대중과의 생활 체험을 같이했다. 그는 그동안도 많은 선언문·시·평론 등을 통해서 박 정권하의 부조리를 파헤치고 대중의 분노를 대신하여 터트렸지만, 특히 1970년 〈사상계(思想界)〉지에 발표한 〈오적〉 장시는 박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전 국민의 갈채와 경탄을 한 몸에 집중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사상계〉지의 압수와 김지하 및 〈사상계〉사의 부완혁 사장 이하 많은 인사들의 구속이 뒤따랐다. 김지하는 1971년에 다시 ‘가톨릭’ 교회의 〈창조〉지에 역시 장편시인 〈비어〉를 발표했다. 이 역시 박 정권에 의해서 압수되고 김지하는 마산 결핵 요양소에 강제수용되었다. 여기에 김지하 구출 운동은 세계적으로 일어나 불란서의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를 위시한 세계 각국의 저명한 문화인들이 들고일어났다. 그 후 김지하는 반감시 반자유의 몸으로 빈궁 속에 전전하면서도 민주 투쟁을 계속하다가 작년 10월의 계엄령 이후 소식을 몰라 갖은 풍설이 돌았는데, 최근의 외지 보도는 그가 저명한 소설가 박경리 여사의 따님과 결혼을 했다고 전한다.

김지하의 시는 가장 어려운 용어와 문자로 차 있다. 또한 한국의 현실은 그의 시적 표현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일방 김지하의 시는 다른 어떤 시보다도 우리의 가슴을 치고 피를 끓게 한다. 그의 시 정신이 서민의 분노와 슬픔과 비통을 대변하는 바로 우리들의 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시는 국악의 판소리와 그 음을 같이 하고 있어서 더욱 한국적이요 서민적이다. 가장 한국적인 그의 시가 지금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 노벨문학상의 후보 작품으로까지 이야기되고 있음은 기이하면서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김지하는 백년 천년을 두고 얻기 어려운 민족의 시인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김지하를 가장 높이 평가하고 존경한 것은 그의 문학적 재질만이 아니다. 김지하의 대중을 사랑하는 불같은 애정—그리고 이를 과감히 표현하는 생명을 건 용기이다. 또한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정열의 시인답지 않은 냉정한 판단력과 양식에 넘쳐흐르는 정치 감각, 그리고 쉬지 않는 행동력이다. 나는 지금도 작년 계엄령 직전의 어느 날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그와 여러 가지 문제를 이야기하던 때의 나의 그에 대한 감동과 경의가 생생하다. 그는 과거와 현재에만 위대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욱 위대해질 것이며, 그의 위대는 서민 대중과 영광을 같이하는 위대인 것이다.
워싱턴에서
김대중

 

[공개 사료 2. 탄원서 전문]

존경하는 토마스 E. 모건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 위원장님께

탄원서

김지하 시인은 박정희 독재정권이 저지른 부패와 사회적 부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시를 썼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또한 박정희 정권이 빼앗은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복원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이유로 학생 6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이들은 모두 박정희 정권의 법령에 의해 설립된 군사법원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다른 15명, 대부분 학생들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체포된 더 많은 무고한 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은 한국에서 민주회복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비슷한 운명에 처해질 것 같다.

지난 8월 한국의 중앙정보부에 의해서 도쿄에서 서울로 납치당한 김대중은 1967년 선거운동 과정에서 법률을 위반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김대중은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에 대항하여 46%의 득표율을 얻은 대통령 후보였다.

위와 같은 일들은 박정희 정권이 기본적 인권을 철저히 무시한 행위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서명자들은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미국 정부는 김지하 시인과 무고한 정치범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가능한 모든 영향력을 행사하라.
2. 김대중이 자유롭게 출국할 수 있도록 하라.

 

[공개 사료 4. 편지 전문]

김순경 선생님!!

보내주신 모든 것 감사히 받었읍니다. 우리들의 고통, 저의 자식 ‘김지하’를 위해서 그토록 애써 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작년에 그처럼 뜨겁게, 힘차게 불타올랐던 민주 인권 회복 운동이 정치적 강압, 탄압 때문에 이제는 모두가 공개적이고, 합법적이며 집단적인 운동은 어렵게 되었습니다. 정의구현 사제단의 기도회, 민주인권 회복 운동이 그렇습니다. 민주회복을 쟁취하기 위해 용감히 싸웠던 동아, 조선일보 기자들이 비열한 보복탄압으로 거리로 쫓겨났고, 지금은 가족과 더불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모든 언론은 입다물인체 침묵만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감옥으로 가고 학원은 빈틈없는 감시하해 놓여 있읍니다. 가족협의회의 목요기도회도 모임이 불가능합니다. 개별적이고 잔인한 협박 탄압아래, 비밀리 기도회를 갖일 뿐입니다.

우리들에겐, 침묵만을 강요당하는 자유만 있읍니다. 우리들은 질식 직전에 신음하고 있읍니다. 제 자식 김지하는 작년 감옥에서 나온지 한달만에 또다시 감옥으로 갔읍니다. 억울하고 긴 10달이 지났습니다. “고행 1974년” 기사로 반공법 위반죄는 75. 9. 16 자로 구속만기가 되어 공소취하가 되었고 (만 6개월) 긴급조치는 형집행 정지가 취소되었다는 소문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정치적 장막 속에서 진행되고 있기때문에 우리 가족은 알권리를 상실한지 오랩니다. 다만 아는 것은 일심 구속 만기가 6개월이라는 것뿐입니다. 형을 산다면 정기적인 면회, 차입이 있어야 하는데 수감 후 지금까지 면회, 차입, 일체 금지되었고(변호사 면회, 성경책마져도) 내 자식이 있는 감방 주위에 감방마져도 텅비워 있다니,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된 위치에서 감방 벽들만 바라보며 추위에 고생하고 있는 내 자식 김지하는 언제 자유의 몸이 될까요. 무슨 법이 있어 이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읍니다. 선생님 이 못난 어미에게 용기를 주세요.

김선생님!!
처절한 보복으로 한없는 고통으로 “지하”는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한인간에 대하여 정치적 보복, 탄압이 이처럼 가혹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머니 된 심정으로 책이라도 볼 수 있고 면회라도 할 수 있다면 이 터질듯한 아픔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것 같읍니다. 내자식 김지하는 언제 자유의 몸이 될까요. 자식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할 수가 없읍니다. 새해엔 선생님이 하시는 인권 회복의 염원이 이룩되길 빌면서 건강을 바랍니다.

김지하 어머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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