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욕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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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욕설의 세계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2.05.0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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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77)_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욕설의 세계

 

Glory is in trying. 영광은 노력을 통해 얻어진다.


사람은 점잖게만 살 수는 없다.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고상한 말만 하면서 살기에는 인간의 감정이 감당 못 할 상황이 너무도 많다. 감정이 격해서 입에서 툭 튀어나오는 욕설이 우리말에는 참 많아 보인다. 우리의 삶은 점점 문화적이 되어 가는데, 상소리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진화하며 확산되고 있는 듯하다. 겉보기와는 달리 천연덕스럽게 욕을 하는 욕쟁이 신사 숙녀를 발견하는 건 일도 아니다. 고뇌의 외적 표출로서 욕설의 카타르시스 기능을 알만하다. 

살면서 누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행동거지가 못마땅하다. 예의범절을 모르고 제멋대로 처신해 불쾌하다. 그럴 경우 성질 급한 사람은 상대를 얕잡아 보거나 경멸이나 모욕을 안겨주려는 심산에서 냅다 욕설을 퍼붓는다. ‘호로자식’ 또는 그 말의 와전인 ‘후레자식’이 인신공격성 욕설로 흔히 등장한다. 호로(胡虜)는 오랑캐, 야만인으로 대치될 수 있다. 과거에는 ‘白丁놈/같은 놈/의 자식’이라는 말도 흔히 쓰였다. 소나 돼지를 잡는 천하고 잔인한 부류라는 욕설이다. 욕설의 저의는 불평과 불만족, 분노, 좌절의 표출이다.

따라서 욕이 아니라면 세상살이 고단한 대중들의 스트레스는 상당할 것이다. 욕설의 묘미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는 듯싶다. 원색적이고 거친 욕설이 난무하는 일상에서 고운 말만 골라 쓰기는 참 어렵다. 한자어 로(虜)는 사로잡은 포로, 그래서 종이나 하인이 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흉노 사회에서는 전쟁 포로로 이루어진 집단을 자로(資虜)라고 불렀다. 資는 흉노어의 음차자다. 중원의 漢族은 걸핏하면 급습해와 약탈을 일삼는 유목민들을 비하하여 아무개 虜라는 식의 호칭을 사용했다. 索虜 또는 索頭虜는 탁발선비에 대한 별칭이었다. 索은 ‘동아줄이나 노, 새끼를 꼬다’라는 말이다. 탁발선비족 남자들의 타래머리를 꼴사납다 비아냥대는 심리가 반영되어 있는 일종의 위악어법(dysphemism)이다. 탁발선비가 북위정권을 세운 뒤에는 위로(魏虜)라고 불렸다.

탁발선비에 대한 반감은 아마도 한나라 이릉 장군(?~기원전 74년)이 흉노에 투항한 사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릉은 전한 무제 때의 인물로 젊은 시절부터 이사장군 이광리(李廣利)와 함께 흉노와의 전쟁에 참가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그런데 이광리의 별동대를 지휘하여 흉노의 배후를 기습했다가 오히려 흉노에게 포위당하는 곤경에 처했다. 이릉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흉노에 항복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무제는 크게 노하여 이릉의 족속을 멸하였다. 그러자 이릉은 흉노에 완전히 투항하여 선우의 사위가 되어 흉노의 제후가 되었다. 이릉은 사마천(司馬遷)의 친구였는데, 이릉이 항복할 당시 사마천은 무제에게 이릉을 변호하다가 이광리의 모함을 받아 궁형에 처해졌다. 

아래 <千里思>라는 이백의 시에 이릉 장군의 최후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 의하면, 예니세이강 상류의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발견된 漢式 궁전이 이릉장군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그는 사막이 아닌 시베리아에서 순록 유목민으로 이루어진 탁발사회의 일원으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천리사 (千里思) / 천리길 그리움   ……  이백
                        
이릉장군은 오랑캐 사막에 묻히고 / 李陵沒胡沙 (이릉몰호사)
소무는 한나라로 되돌아왔도다. / 蘇武還漢家 (소무환한가)
아득히 먼 代郡 오원관 / 迢迢五原關 (초초오원관)
북방의 눈은 변상의 꽃처럼 날린다. / 朔雪亂邊花 (삭설난변화)
한번 떠나 나라와 떨어지니 / 一去隔絶國 (일거격절국)
돌아가고픈 마음에 긴 탄식만 하노라. / 思歸但長嗟 (사귀단장차)
기러기 서북 하늘 향해 날아가니 / 鴻雁向西北 (홍안향서배)
그 편에 멀리 하늘 끝에 소식 전한다. / 因書報天涯 (인서보천애)


이릉 장군이 비겁한 선택을 했든, 용기 있는 결단을 했든, 그건 우리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白丁’이라는 말에 왜 ‘고무래 丁’이 쓰였는가 하는 점이 궁금하다. 다시 말해, 한자어 丁이 어떻게 해서 남자를 가리키게 되었는지 호기심이 동하는 것이다.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로 ‘丁’이 들어간 또 다른 어휘에는 男丁(네), 兵丁, 壯丁, 莊丁, 庄丁, 驛丁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壯丁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나이가 젊고 한창 힘을 쓰는 건장한 남자/부역이나 군역에 소집된 남자/징병 적령자”를 지칭한다. 

‘丁’이 접두사로 쓰이는 경우도 많다. 정강(丁疆)은 젊고 기운이 있는 사람을 뜻한다. 丁男은 장정, 청년을 가리킨다. 丁女는 丁年(만 20세) 이상의 여자, 한창 때의 여자를 지칭한다. 丁夫는 장정, 젊은이를 말한다. 壯丁을 뒤집어 써 丁壯이라고도 한다. 白丁처럼 힘든 일을 하는 낮은 신분의 사람을 가리키는 낮춤말에 丁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일꾼, 하인, 노동자 정도의 개념을 지닌다. 포정(庖丁)은 요리사, 馬丁은 마부, 휴정(畦丁)은 젊은 농부를 가리키는 용어다. 

포정은 본래 유명한 요리사의 이름이었다. 그가 쇠고기를 바르는 솜씨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 후세에 기술의 교묘함을 칭찬하여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 包는 ‘싸다’, 广(엄)은 ‘가옥’을 의미한다. 둘이 합쳐져 ‘고기를 싸는 방’ 곧 ‘부엌’의 뜻을 나타내게 되었고, 의미의 외연이 확장되어 ‘요리인, 요리한 음식’을 뜻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周나라 때 식선(食膳) 즉 밥과 반찬 담당의 벼슬아치를 가리키던 말들인 庖人, 庖丁, 포재(庖宰)가 오늘날에는 단순히 요리인을 의미하게 되었다.

중국 전설상의 삼황(三皇) 중 복희씨(伏羲氏)를 포희(包犧 또는 庖羲)라고도 표기하는데, 이는 희생(犧牲)을 길러서 주방에 대어주었다는 데 기인한다. 보자기 따위로 물건을 싼다는 의미의 쌀 포(包)는 집 엄(广)과 합쳐진 푸주 포(庖)와 동자(同字)가 되는데, 이는 包有魚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포는 성씨의 하나로도 쓰인다.

본래 남자, 사나이를 뜻하는 한자어 ‘丁’은 훈몽자회(1527년), 광주천자문(1575년), 대동급기념문고본천자문(1575년) 등 16세기 석음(釋音) 자료에 ‘ 뎡’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사내, 사나이’를 ‘뎡’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고무래 정’은 字形 때문에 생긴 속설일 가능성이 크다. 16세기 말에 이르러 ‘ 뎡’은 사라지고 대신 ‘당 뎡’, ‘장뎡 뎡’ ‘남녁 뎡’, ‘만날 뎡’, ‘ ’ 등이 등장한다. 

앞서 말했듯 지금의 우리는 ‘白丁’이라는 말이 과거에 천민에 속하는 특정 계층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도한(屠漢), 신백정(新白丁), 포정(庖丁), 포한(庖漢)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無位無官하고 어떤 夫役에도 종사하지 아니한 平民”을 일컫는 말이었다. 달리 말해, 특정한 직역(職役)을 담당한 정호(丁戶)와 대비되어 특정한 역을 담당하지 않고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을 지칭하던 용어였다. 백정은 공전이건 사전이건 간에 자신들에게 맡겨진 토지를 경작하여 조(租)를 바치고 남은 수확으로써 삶을 영위하는 전호(佃戶)였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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