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시로 만나는 한국 현대시 | 강성위 지음 | 푸른사상 | 320쪽
한문학자 강성위가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들의 작품을 한시(漢詩)로 옮겨 시를 이해하는 색다른 관점을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한국 현대시를 한시로 옮기는 일은 두 언어 사이의 표현 방식 차이 때문에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한시를 창작하고 번역해온 저자의 경험, 그리고 한시와 현대시 양자에 대한 깊은 이해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한역한 시를 다시 한글로 직역하면서 그 의미를 곱씹게 하는 이 책은 낯설게만 느껴졌던 한시를 새로운 방식으로 감상하는 묘미를 전해주고 있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 4부까지는 시인들의 원시에 나타난 계절이나 칼럼 발표 시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부를 편성하였으며, 각 부 안에서는 시인의 한글 이름 가나다순으로 작품을 배열하였다. 시인 한 명당 한 수씩 수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각 부마다 16수씩 도합 64수를 수록하였다.
4부까지의 모든 칼럼은, 일률적으로 “원시”를 앞에 두고, 그 다음에 저자의 “한역시”와 그에 대한 “주석”을 곁들였으며, 마지막에 저자의 한역시에 대한 직역(直譯)인 “한역의 직역”을 첨부한 뒤에 “한역 노트”라는 이름으로 해설을 적었다. 5부는 저자의 자작 한글시 1편을 시인들의 시처럼 칼럼으로 엮은 한 꼭지와 자작 한시를 칼럼으로 작성한 여섯 꼭지로 이루어졌다. 말하자면 5부는 저자의 작품만 따로 다룬 부록(附錄)이 되는 셈이다.
우리 현대시를 한역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원시에는 없는 말이 더러 보태지기도 하였고, 원시에는 있는 말이 더러 빠지기도 하였다. 또한 한글과 한문의 언어 생리가 다른 탓에 시구(詩句)의 순서가 더러 바뀌기도 하였다.
한시는 근체시(近體詩)는 말할 것도 없고 고체시(古體詩)라 하더라도 정형시(定型詩)에 가깝지만, 그 함축성으로 인하여 자유시에서 구현된 ‘자유’를 정형적인 틀 안에 들일 수 있을 정도로 탄력이 있다. 저자는 한시의 묘미를 이런 데서도 찾는다. 한시에 관한 것들을 공부라고 생각하면 재미가 없고 숙제라고 생각하면 짜증이 나겠지만, 놀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것과 비교하기 어려운 재미가 분명 그 안에 있다.
조선 시대 신위(申緯) 선생 등은 한글로 된 시조(時調)를 한시로 옮겼고, 김안서(金岸曙)나 양상경(梁相卿) 선생 같은 사람은 한시를 시조로 옮기기도 하였다. 이제 한국 현대시를 한시로 번역하여 소개한 이 책을 통해, 시 한 편을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을 이해하는 폭과 깊이를 더할 수 있다. 원전(原典)과 재구성물을 상호 비교해보며 감상하는 것 또한 쏠쏠한 재미를 안겨준다. 고루하고 어렵다는 편견으로 대중에게 낯설게만 느껴졌던 한시를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즐거움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소득임에 틀림없다.
--- 본문 중에서 ---
• 나태주 -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태헌의 한역 - 草花(초화)
細觀則娟(세관즉연)
久觀應憐(구관응련)
吾君亦然(오군역연)
• 주석
·草花(초화) 풀꽃. ·細觀(세관) 자세히 보다. ·則(즉) ~을 하면. ·娟(연) 예쁘다. ·久觀(구관) 오래 보다. ·應(응) 응당. ·憐(연) 어여삐 여기다, 사랑하다, 사랑스럽다. ·吾君(오군) 그대, 너. ·亦(역) 또, 또한. ·然(연) 그러하다, 그렇다.
• 한역의 직역
풀꽃
자세히 보면 예쁘다
오래 보면 사랑스럽다
너 또한 그렇다
• 한역 노트
이 시는 어쩌면 나태주 시인의 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지고 가장 사랑받는 시가 아닐까 싶다. 시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시인의 고향인 공주에 설립한 문학관 이름이 “풀꽃”이고, 시인을 “풀꽃” 시인으로 칭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이 시를 시인의 출세작(出世作)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풀꽃”을 소재로 한 이 시가 대상을 ‘보는 법’에 대하여 얘기한 것이기 때문에, 역자는 최근에 접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라는 책에서 다룬 소로(H. D. Thoreau)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미국의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소로는 기존의 이념을 초월하여 ‘보는 법’을 강조했는데 인식의 실재보다 자연의 실재에 더 큰 관심을 가졌고, 지식보다는 ‘보는 힘’을 중시하였다. 소로가 새롭게 보는 법으로 제시한 것이 마음의 렌즈를 닦고 스캔하듯이 지혜를 보는 것이라면, 나태주 시인이 제시한 보는 법은 돋보기를 대고 가만히 응시하듯 지혜를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세히, 그리고 오랫동안 보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일 듯하다. 그러한 시인의 뜻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알게 하는 글자는 바로 “너”라는 글자 뒤에 붙은 조사(助詞) “도”이다. 사실 이 조사가 아니라면 이 시는 멋있지만 다소 단조로운 시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시가 짧으면서도 단조롭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은 원숙한 대가(大家)답게 단 하나의 조사로 독자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다. 이 시에서의 “너”는 당연히 풀꽃이므로 조사 “도”로 추정하건대 또 다른 존재 역시 풀꽃과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또 다른 존재’는 누구일 수도 있겠고, 무엇일 수도 있겠다. 시인이 시시콜콜하게 다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가 비록 짧아도 독자의 상상력에 의해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 시인이 의도한 시의 탄력성이다. 그러니 역자가 역자의 생각을 다 말하지 않는 것 역시 시인의 뜻에 공감하는 표현이 될 것이다.
‘대충’, 그것도 ‘잠깐’ 보고 나서 누군가를 다 파악한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얘기하는 자들이 가끔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역자는, ‘당신 역시 타인에게 그렇게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경고의 말을 들려주고 싶었지만, 역자 역시 그러지는 않았나 싶어 운을 떼지 못한 적이 적지 않았다. 주관적인 선입견을 배제하고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 누구에게나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 시는 바로 그런 오류에 대한 질책의 뜻으로도 읽힌다. 일찍이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만 적용시키거나 강요하는 것은 비겁을 넘어 이미 죄악이 될 수 있다. 세상에 넘쳐나는 ‘내로남불’에 역자가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장미는 대충 보아도 예쁘지만, 풀꽃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장미는 잠깐 보아도 사랑스럽지만, 풀꽃은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사람들은 장미꽃 같은 아름다움에 익숙하기 때문에 풀꽃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세상의 모든 꽃이 장미일 뿐이라면 장미가 장미겠는가? 장미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것은, 금방은 보이지 않는 풀꽃 같은 아름다움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개 들어 장미만 볼 것이 아니라, 허리 굽혀 풀꽃도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역자는 연 구분 없이 5행 25자로 이루어진 원시를, 3구의 사언시(四言詩)로 재구성하였다. 매구마다 압운을 하였으므로 이 한역시의 압운자는 ‘娟(연)’·‘憐(연)’·‘然(연)’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