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횡단하는 여성들의 삶은 무엇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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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횡단하는 여성들의 삶은 무엇을 말하는가?
  • 이희영 대구대학교·사회학
  • 승인 2022.05.0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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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 나의 테제_ 『경계를 횡단하는 여성들: 분단과 이주의 생애사 연구』 (이희영 지음, 푸른길, 432쪽, 2022. 02)

 

1. 일상의 분단, 이주의 교차 

분단사회의 개인은 분단을 말하기 어렵다.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독일이 통일되고 10여 년이 지난 뒤 한 독일 연구자는 ‘이제 동독, 서독을 말할 필요가 없다, 오직 미래를 고민할 뿐이다’고 했다. 그러나 통일 30주년이었던 2020년 현재 독일 사회에 구 동서독 사이의 문화적 위계, ‘머릿속의 장벽’ 등이 존재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북위 38도 선의 군사적 경계나 대북정책만이 아니라 개인의 일상 속에 착종된 분단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것은 반세기가 지난 20세기 말이다. 남과 북의 적대적 정치체제만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눈과 귀, 상상력까지 굴절시킨 그 분단 상황은 우리의 삶이자 그림자가 되었다. 체제와 구조에 주목하던 사회과학의 관심이 일상(everyday life)의 경험으로 확장, 심화되는 과정에서 2000년대 초 한반도 분단의 일상적 양상 혹은 일상 속의 분단을 추적하는 연구가 수행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이와 같은 연구 성과 중 일부를 담았다.

 

분단은 국가의 영토에 결박되지 않는다. 한반도라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분단장치(dispositive of division)가 작동하는 모든 장소에 깃들어 있다. 필자가 해외에서 북한 주민을 만난 것은 2018년 독일 현지 조사 중이었다. 북한 난민 신청자들이 머물고 있던 스투트가르트 시내의 각 난민소를 방문하여 담당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인터뷰를 하였다. 독일에서 유일하게 한국어 통역관이 있는 난민신청소 대표와의 면담을 위해 칼스루에로 갔다. 입국 장소와 상관없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모든 개인은 이곳에서 난민 신청을 하게 되므로 남·북한 출신의 개인이 난민 신청자 혹은 통역관으로 만나고 있었다. 3~4개월 동안 베를린과 스투트가르트를 오가며 북한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이들의 난민 심사 과정을 지켜보았다. 남북한의 이념적 적대와 생활경험, 미래의 전망, 문화적 차이 등이 얽혀 남한 출신 활동가와 ‘믿을 수 없는 북한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불신이 매일 증폭되고 있었다. 이주한 사회의 규범 및 질서와 결합한 분단장치는 재구성되고 새롭게 구성되었다. 
  

2. 분단과 가부장제, 국가 폭력의 지형도  
 
이 책은 한반도의 분단을 겪으며 국경을 넘어 이주한 한인 여성들에 대한 글이다. 필자가 1990년대 중반부터 2020년까지 독일과 한국에서 만났던 남북한 여성들에 대한 글과 기억을 엮었다. 분단과 더불어 이주한다는 것은 떠나는 동기와 조건, 장소와 과정이 ‘특별히’ 선택적임을 시사한다. 여성들의 이주는 역사적으로 가부장적 사회의 위계와 가족체제, 그리고 계급, 계층적 조건을 배경으로 한다. 분단과 민족, 계급과 젠더가 교차하는 위치에서 수행된 남북한 여성들의 이주 경험은 20세기 분단장치의 역동적 변화를 보여준다.

전체 3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는 1960년대 분단된 서독으로 이주했던 남한 출신 간호여성들의 삶, 1990년대 이후 중국을 거쳐 남한으로 이주한 북한 여성들의 생애 경험, 그리고 2000년대에 유럽으로 이주한 북한 여성들의 난민 경험을 재구성하였다. 분단된 한반도의 남쪽에서 분단된 독일의 서쪽 사회로 이주했던 여성들의 삶과 북한에서 중국으로 향한 국경을 넘고 제3국을 경유하여 대한민국으로 입국한 북한 여성들, 그리고 유럽으로의 재이주를 시도한 그들의 이주 경로는 분단과 가부장제, 그리고 국민국가의 폭력을 우회하거나 무력화하는 지형도이다. 나아가 여성들의 생애사는 20세기 일제의 지배와 한국 전쟁 등을 배경으로 형성된 한반도의 분단장치가 유럽으로의 이주를 매개로 탈영토화된 현실을 고찰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이다.

예외적인 사건은 사회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어떤 행위자도 사회의 부분일 수 없다.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인 인간 행위자는 삶을 통해 직면하는 역사와 사회를 체현한다. 지난 세기의 전쟁, 분단, 민족과 계급 그리고 젠더 갈등을 겪으며 이주를 시도한 남한과 북한이라는 지역(local) 여성들의 삶은 역설적으로 ‘20세기의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플랫폼이다. 


3. 구술생애사와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 그리고 여성주의 비판  

연구방법론의 관점에서 구술생애사(oral life history)는 과거의 경험을 현재의 관점에서 기억하여 재구성한 자료이다. 과거 체험 그 자체가 아니라 구술자의 입장에서 구성된 자료이므로 연구자는 현재 상식의 지평에서 재해석하고, 그 사회적 의미를 고찰해야 한다. 개인이 직면한 시간과 공간의 구조를 체현하는 생애사는 그 자체로 ‘사회’를 드러낸다. 즉 구술생애사 연구의 지향은 개인의 삶에 침전된 ‘산호’ 즉 사회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나아가 행위자-네트워크(ANT) 이론을 통해 인간 행위자와 직·간접으로 결합하는 비인간 행위자의 역할과 관계를 동시에 추적함으로써 인간 중심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다. 즉 유명하고 권력 있는 여성들의 성공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보통 사람-여성들이 분단과 이주의 과정에서 직면하고 전유하는 다양한 비인간 행위자와의 관계를 추적하고 분석함으로써 분단장치의 특징과 복합적 변화과정을 재구성하였다. 

또한 ‘여성’을 방법론으로 경유한다는 것은 특정한 여성 집단이 어떤 (분단-이주) 맥락에서 사회적으로 부상하게 되거나, 사회적 질타의 대상이 되는지를 고찰함으로써 이와 연관된 사회체의 복합적 특성과 역동적 변화를 추적하는 길을 뜻한다. 특히 ‘이주의 여성화’로 압축되는 지구적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20세기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역사, 정치적인 사태가 교차하며 전개되는 삶의 과정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위치’를 지시한다. 이를 통해 여성들이 국민국가의 영토적 경계만이 아니라 이념적, 문화적, 성적 경계를 가로지르며 생성하는 새로운 가치와 삶의 양식을 엿볼 수 있게 된다. 


4. 연구자와 남한 ‘교민’ 그리고 북한 ‘난민’의 만남   

필자가 독일에서 한인 여성들을 처음 만난 것은 통일 직후인 1990년대 중반이다. 한국에서는 군부독재가 끝나고 ‘시민사회’가 등장하던 때였다. 30여 년 이상의 독일 생활을 바탕으로 경제력과 시민권을 가진 ‘멋쟁이 여성들’은 한국의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피력할 뿐 아니라 동서독의 통일을 경험한 당사자로서 분단과 성차별 너머의 사회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필자가 이 여성들의 경험에 대해서 생각하고 기록하게 된 것은 많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우리는 타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과 우리가 하는 말을 서로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그들 중에 위치 짓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의 삶에 대한 공감대를 쌓는데 그만큼의 시간과 우회가 필요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 통일 직후의 독일에서 필자의 관심은 구동독 사회를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분단된 동서독 사회에서 살아온 개인이야말로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분단을 유추할 수 있는 길이었다. 독일 통일 전부터 서독의 연구자들이 동독을 방문하여 일상생활 연구를 진행했던 사실은 필자에게 북한방문과 분단 연구의 꿈을 갖게 하였다. 2000년대 초 한국으로 돌아와 두만강을 건너온 북한 여성들을 통해 ‘분단 저편’의 삶을 그려보기 시작하였다. 

20세기 냉전의 시대가 끝났으나 21세기 한반도의 냉전과 분단은 새롭게 직조되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변화만이 아니라, 북한의 시장화와 디지털 매개 정보통신기기의 확산으로 북한 주민들은 남한의 드라마, 음악, 생활용품을 공유하며 과거와 다른 생활양식을 만들고 있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러한 변화의 주체는 북한 시장화 속에서 성장한 20~30대 여성들이다. 역설적으로 북한 여성들이 한국 사회를 거쳐 독일, 영국, 덴마크, 캐나다 등으로 재이주하게 되는 배경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국가의 북한 봉쇄와 ‘인권체제’이다. 북한의 식량난을 계기로 형성된 ‘월경의 길’이 이주 네트워크와 결합하여 북한 주민들이 ‘어디나 갈 수 있는’ 국제 난민의 행위자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이다.

생애사 연구를 비롯한 질적 연구방법을 통해 사회 현실을 고찰하는 시도는 해석과 재해석의 미로를 헤쳐가야 한다. 이 과정은 학술적 통찰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는 길이다. 구술 사례를 통해 드러난 균열과 의미를 탐색하는 끝에 인간과 그를 둘러싼 사회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사회의 심층을 탐색하는 다양한 연구방법이 모색되기를 기대한다. 

 

이희영 대구대학교·사회학

대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다. 베를린공대 사회학과 학사 & 석사과정을 마치고 카셀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Dr. Phil.)를 받았다. 한국 비판사회학회 회장, 학술지 『경제와 사회』 편집위원장, 세계사회학회 RC38 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사)막달레나공동체 <용감한여성연구소> 소장이다. 구술생애사 방법론을 토대로 다양한 질적 연구방법을 탐색하고 있으며, 분단과 이주, 젠더 & 섹슈얼리티, 소수자 연구를 하고 있다. 대표 공저로 Biographie und Kollektivgeschichte(2021), 『모빌리티와 생활세계의 생산』(2019), 『번역과 동맹: 초국적 이주의 행위자-네트워크와 사회공간적 전환』(2017), 『판도라 사진프로젝트: 용산 성매매집결지 여성들의 사진과 이야기』(2016), 『외침과 속삭임, 북한의 일상생활세계』(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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