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의 이념ㆍ현실ㆍ기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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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의 이념ㆍ현실ㆍ기풍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4.26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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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1강_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자유주의의 이념ㆍ현실ㆍ기풍」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합리성의 증대는 자유의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한다. 자유의 이념과 지향에 관한 동서양의 지적 자산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첫째 섹션 ‘자유의 이념과 지향’ 제1강 최장집 명예교수(고려대 정치외교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자유주의의 이념ㆍ현실ㆍ기풍

 

최장집 교수는 최근년 “여러 학자들의 연구 주제로 다시 등장하게 된” 냉전 자유주의(Cold War liberalism)로부터 “어떤 진정한 가치, 이념, 덕의 윤리, 자유주의가 스스로를 드러내고, 행위하는 기풍(ethos)을 찾아내고 발전시키고 고양하는 역할을 그 안에서 발견”하는 데에,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는 전범들을 제고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관심의 초점을 둔다고 밝힌다. 달리 말하여 “정치적 이념으로서 자유주의의 역사적 전개를 통해, 특히 냉전 이후 급격하게 변화된 국제 정치적ㆍ세계 경제적ㆍ지적 문화적 환경에서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훑어보고, 지금 우리가 자유주의를 더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탐색”하는 과정이 될 것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냉전 자유주의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정치 윤리이자 자유주의자의 행위 규범”으로서 “강건하면서도 절제된 자유주의(tempered liberalism)”, “냉전 자유주의의 사고와 행동 방식에 대한 해답”의 하나로 “온건함의 기풍(the ethos of moderation)”을 제안한다. 

 

지난 4월 2일, 최장집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1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들어가는 말

본 강연은 정치적 이념으로서 자유주의의 역사적 전개를 통해, 특히 냉전 이후 급격하게 변화된 국제 정치적, 세계 경제적, 지적 문화적 환경에서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훑어보고, 지금 우리가 자유주의를 더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탐색해보려 한다.

강연자는 최근년에 이르러 “냉전(시기) 자유주의(Cold War liberalism)”라고 부르기도 하는, 자유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자유주의에 초점을 두고 말한다. 냉전 해체 이후 오늘의 국제 정치 환경과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가 자유주의의 의미와 역할을 재해석하려는 학문적, 지적 노력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만큼 자유주의가 위기에 처했음을 의미한다.

본 강연에서는, 냉전 자유주의로부터 어떤 진정한 가치, 이념, 덕의 윤리, 자유주의가 스스로를 드러내고, 행위하는 기풍(ethos)을 찾아내고, 발전시키고, 고양하는 역할을 그 안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보여주는 전범들을 제고할 수 있는가 하는 데에 관심의 초점을 둔다. 본 강연자는 조슈아 L. 처니스(Joshua L. Cherniss)가 말하는 “강건하면서도 절제된 자유주의(tempered liberalism)”는 냉전 자유주의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정치 윤리이자, 자유주의자의 행위 규범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냉전 반공주의에 대해 같은 문제의식으로 말하고 있는 아우렐리안 크레이우투(Aurelian Craiutu)는 냉전 자유주의의 사고와 행동 방식에 대한 해답으로 그의 핵심 개념 “온건함의 기풍(the ethos of moderation)”을 제시한다.

 

2. 자유의 두 의미 -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2) 소극적 자유(negative freedom), 적극적 자유(positive freedom)로 자유의 개념을 대조적인 두 다른 내용을 갖는 자유로 구분한 것은 1958년 출간된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의 유명한 논문 「자유의 두 개념(Two Concepts of Liberty)」이다. 전자는 개인 또는 집단이 타자의 개입 없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을 지칭한다. 후자는 개인 또는 집단이 무엇인가를 하려하거나, 자신의 방식으로 존재하기보다, 누군가가 여기에 개입해서 그것이 아닌, 그들로 하여금 타자의 의지에 따라 행위하거나, 특정의 존재 방식과는 다른 것을 하도록 개입하는 것을 지칭한다. 한마디로 전자가 “불개입(non-interference)”이 특징이라면, 후자는 타자 또는 다른 힘의 개입이 특징이다. 간략하게 말해, 전자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라면, 후자는 “무엇에 대한 자유”로 특징된다. 어쨌든 자유와 자유주의 이론을 정초한 대표적인 철학자들에 대해 말한다면, 홉스, 로크, 루소, 세 철학자들을 말할 수 있고, 그들을 두 범주로 구분하여 홉스와 로크는 소극적 자유의 철학자로, 루소는 적극적 자유로 구분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3. 자유(주의)의 현실 -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결합

(1) 현대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줄임말이다. 물론 최근년에 이르러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또는 포퓰리즘적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 체제의 도전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민주주의의 모델은 규범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아직까지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이다. 만약 현대 민주주의가 그냥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면, 분명 그것은 두 서로 다른 정치 이념과 제도, 실천 방식이 결합한 결과이다. 

(4) 자유주의를 민주주의에서 띄어서 말하려면 자유주의는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고, 민주주의는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다. 반대로 둘을 합쳐서 본다면, 자유와 평등을 결합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과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유와 평등이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은 서구의 체제가 자유주의적이고, 동시에 민주주의적이라는 바로 그 사실을 통해 드러난다. 

실제로 자유주의는 전적으로 자유의 문제이고, 민주주의는 평등의 문제는 아니다.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 온갖 자유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되듯이, 자유주의도 모든 평등에 다 간여할 필요는 없다. 자유와 평등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경계를 구분하는 요인이 된다면, 그 이유는 그것들을 떠받치는 다른 논리 때문이다. 

평등은 수평적 주장에 치중하고, 자유는 수직적 기세를 갖는다. 민주주의는 사회적 결속과 분배적 평준화를 지향하고, 자유주의는 탁월함과 자발성을 존중하는 이념이나 가치, 또는 행위 규범이라 할 수 있다. 평등은 통합과 조화를, 자유는 자기 주장과 문제를 일으킨다. 민주주의는 다원주의에 대해 별 필요를 느끼지 않지만 자유주의는 다원주의의 소산이다. 아마도 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자유주의가 개인을 중심으로 해서 돌아가고, 민주주의는 사회를 축으로 움직인다는 점이다.

(5) 자유주의 내에서의 민주주의는 현대의 선진적이고 발전한 민주주의 국가를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르듯이, 현대 민주주의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의미를 내장하고 있다.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의 도구인 반면,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자유주의의 도구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의 공식은 자유를 통한, 자유의 수단에 의한 평등이다. 평등의 수단을 통한 자유가 아니다. 전자가 소극적 자유에 더 가깝다면, 후자는 적극적 자유의 관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둘 사이의 관계가 전도되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경험적으로는 사실이 아니다. 자유주의는 그 성공의 결과로 평가가 절하됐다. 헌법에 기초한 국가는 국가 권력을 중화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현재 한국에서는 이러한 특징화, 언명이 대통령과 국가 권력의 확대 강화를 한국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중대 요소로 이해하는 한국적 현실과는 분명한 괴리가 있다. 그러므로 본 강연에서는 세계적 차원에서 보편적 역사의 측면에서 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4. 자유주의의 이론과 기풍(ethos)으로서 “절제된 자유주의” 

본 강연자는 “냉전 자유주의”로 특징화할 수 있는 자유주의의 국제 환경적 조건, 즉 현재와 가장 가까운 시간의 지평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었나, 그리고 지금 무엇을 배워야 하나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그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우리는 조슈아 L. 처니스가 말하는 “강하면서도 절제된 자유주의(tempered liberalism)”, 또는 같은 문제의식으로 말하고 있는 아우렐리안 크레이우투(Aurelian Craiutu)의 “온건함의 기풍(the ethos of moderation)”이라고 말했다. 이 두 말을 누구보다 잘 표상할 수 있는 두 사람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이자, 정치이론가는 영국의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 1909-1997)과 이탈리아의 노르베르토 보비오(Norberto Bobbio, 1909-2004)이다.

(1) 이사야 벌린 - 일원주의에 대한 교정

① “소극적 자유”의 철학

벌린의 사상의 중심축을 이루는 두 이론은 “자유의 두 개념”과 “가치 다원주의”이다.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말은 자유의 두 개념, 즉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이다. 앞의 것이 누구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자유라면, 뒤의 것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고, 자율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무엇의 개입으로터의 자유와 무엇에 대한 자유가 그것이다. 

흥미 있는 것은, 벌린은 그의 논문 「자유의 두 개념」의 거의 끝부분에서 콩스탕의 고대인의 자유의 의미를 끌어들이면서 루소를 비판한다는 사실이다. 벌린의 관점에서 인민주권의 원리로부터 나오는 “일반의지”의 비전은 아주 깊은 일원론적 가정으로 전혀 자유가 아니다. 그렇다면 자유인들 사이에서 한 의지의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하고, 그래서 그들은 최소한 이상적으로는 갈등 없는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을 상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원주의적 관점은, 그 자체가 적극적 개념으로서의 자유에 내재돼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개념은 내재적으로 남용될 수밖에 없는 성향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극적 자유는 남용될 여지가 없다. 소극적 자유는 인간의 목적과 재화 그 자체가 경쟁적인 다양성과 가장 일치하기 때문에, 자유의 근원이 되는 유형으로 수용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에 비해 적극적 자유는 그것을 자유의 진정한 유형으로 상정하고, 자기 스스로의 주인 됨을 원리로 삼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숙명적으로 선택에 있어 치명적인 윤리적 합리주의의 환상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벌린의 관점에서는 인간성은 우리 모두의 안에 내장된 것이어서 결국은 발견되고, 실현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인간성은 선택을 통해 만들어지고, 영원히 다시 만들어지는 어떤 것이다. 또한 공통적이거나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다원적이고, 다양한 것이다.

 

② 가치 다원주의

벌린의 정치철학 가운데 자유의 개념에 이어 중심적인 주제는, 다원주의(pluralism)라 할 수 있다. 존 그레이에 의한 탁월한 벌린 해석을 따르면, 칸트와는 달리 벌린은, 공정성이나, 진실 등, 이런 말들은 범주, 또는 규범으로 구성돼 있고, 극히 추상적이어서 무척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돼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들 각기에 대해서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특별하고, 그 내용은 칸트가 그렇게 했을지는 모르지만, 모두 한꺼번에 끝까지 그 특수성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이런 문제들이 불러오는 애매함과 그에 내장된 비결정성은 적어도 벌린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벌린의 가장 창의적 주장은, 이 공동의 틀의 구조가 피할 수 없는 딜레마를 만들어내고, 동시에 이성에 의해 결정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이성의 객관성을 보장하는 바로 그 사상의 공통의 틀은, 도덕적 갈등이 이성을 통해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 상황이 바로 벌린이 자신의 다원주의를 말하고 있는 지점인 것이다. 

③ 다원주의의의 기풍으로서 윤리적 온건함

벌린이 보여준 자유주의의 에토스는 이론을 말하는 철학자의 태도라는 점에서는 물론, 정치와 정치인의 바람직한 행위를 말하는 데 있어 이론 못지않게 중요한 정치적 실천의 측면과 결부된다. 무엇보다 벌린은 다원주의의 아이디어를 추구하고 증진하는 데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이다. 그것을 통해 정치와 윤리의 이론 일반, 특히 자유주의에 대해 지니는 함의와 특히 정치 행위에 대해 말했다.

벌린은 진정한 인간 존재를 위한 기본적인 구성 요소는 완전히 열려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러한 조건에서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인간의 삶과 인간적 개성이 가장 넓게 다양성을 보존할 수 있는 가치를 갖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받아들인다는 아이디어가 한 사람이 덕과 지혜를 독점하거나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이미지에 짜 맞추려는 욕구를 불러오는 오만한 환상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하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다원주의가 그렇게 이해된다면, 그 에토스는 윤리적 온건함을 불러들이는 데 기여하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또한 다원주의는, 완전함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사리에 모순되기 때문에 자연히 절제와 겸양을 불러오고, 촉진하게 된다. 타협과 상실이 없이는 도덕적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가치는 획득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경우 그 가치들은 다른 가치의 손상을 동반한다. 요컨대 온건한 기대는 정치 행위에 있어 절제를 불러오는 경향을 만들어낸다.

④ 냉전 자유주의의 “역동적인 중심”의 범위를 넘어

“냉전 자유주의”라는 말은 국제 정치적 환경과 정치 현실로서 미소 간 이데올로기적 대립 상황과 직접적으로 접맥된 것이다. 이 문제 영역에서 벌린의 이론, 자유주의의 에토스를 살펴볼 수 있다. “역동적 중심(vital center)”이라는 말은 1949년 냉전이 본격화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아서 슐레진저(Arthur M. Schlesinger Jr.)가 그의 저서의 주제로 사용했던 말이다. 그 말은 비공산주의적 좌와 비파시스트적 우 사이, 즉 국제적 적 사이에서 위협받는 자유민주주의를 지칭하기위해 사용한 말이다. 여기에서 슐레진저는 “자유와 경제적 풍요의 희망들”을 위한 “역동적 중심”, 즉 미국은 비공산주의 좌와 비파시스트 우 사이, 즉 극좌 공산주의와 극우 파시스트를 제외한 온건 좌와 온건 우를 모두 합치는 것으로 구성된 중심을 지칭한다. 그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냉전을 이끌어가는 동력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서 냉전 자유주의라는 말은 미소 간 이데올로기적 대립 상황과 직접적으로 접맥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시민적 자유, 법의 지배, 헌법주의, 다원주의, 개인 능력에 대한 믿음, 자유 선거를 포함하는 개방 사회의 가치와 원칙들에 대한 공동의 신뢰를 공유하는 것으로 기대됐다.

슐레진저의 “역동적 중심”을 뒷받침했던 논리는 벌린의 아이디어와 중요한 지점들에서 유사점들을 공유한다. 슐레진저는 말한다. 개방적 사회의 원리를 옹호하는 데 있어 온건함, 절제는 열광의 반대 극단에 위치한다. 민주적 신념을 밀고 나가는 것은, 열광주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정치에 있어 타협, 설득, 합치를 지향하는 것이고, 사회에 있어서의 관용을 지향하는 것이다. 또한, 다양성을 상징하는 것은 교조주의를 억제하는 것이고, 회의주의를 좋아하는 것은 영웅 숭배를 억제하는 것이다.

벌린을 논할 때 그 유사성으로 인해 빼놓을 수 없는 정치철학자가 주디스 N. 슈클라(1927-92)이다. “두려움에 저항하는 자유주의(liberalism of fear)”는 자유주의 이론을 심화,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한 그녀의 대표작이다. 벌린이나 슈클라는, 자유주의가 자기 스스로 올바르다는 어떤 종류의 의식을 견지하지 않아도 되는 지나치지 않은 성향이 특징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어쨌든, 벌린과 슈클라의 의견이 합쳐지는 자유의 의미, 소극적 자유는 어떤 하나의 온건한 의제와 현실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면 족하다. 예컨대 그러한 의제와 목표는, 아이디어들, 정치적ㆍ사회적 세력들, 그들의 이익들, 그리고 항시 위협받고,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회에서의 집단들 이런 힘들 또는 요소들 사이에서 쉽지 않은 균형을 증진하고 유지하는 그러한 목표를 말한다. 벌린은 사람들은 언제나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고, 그럴 수 있는 일정한 자유의 여지가 있어 개인적 선택이 가능한 공간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사회과학자들의 공통적인 경향이기도 한 정치적 갈등이 경쟁적 이익이라는 측면에서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했다. 대신 특정의 조건이나 환경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지니는 다원적이고, “동일한 기준으로는 잴 수 없는 가치들(incommensurable values)” 사이의 갈등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이 지점에서 벌린은 인간은 그 자신 스스로 목적을 갖는 것이라는 칸트의 이론을 긍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양화(量化)할 수도, 예견하기도 어려운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지극히 거리가 멀고 불확실한 것보다 성취 가능한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먼 미래의 목표를 추구하는 것을 동반하는 열광 또는 광신이 인간을 그 자체의 목표로서 다루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진정한 인간됨을 거부하게 만드는 현상을 필연적으로 불러오게 된다고 믿었다.

 

(2) 노르베르토 보비오- 온유함의 윤리와 기풍

보비오는 벌린과 같은 해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출생해 냉전 시대를 살았던 전후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이자, 민주주의 이론가이다. 벌린은 미국과 영국이 이끌었던 세계 냉전의 중심부에서 영국과 미국을 왕래하면서, 즉 “역동적 중심”에서 활동한 냉전 시기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그에 비해 보비오는 토리노 대학 교수로서, 토리노에서 발간되는 일간지 라 스탐파의 칼럼니스트로, 또 정치에 참여하는 지식인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역동적 중심”의 이론적, 정치적, 실천적 관심사와는 먼 거리에 있었던 학자이다. 

② “강건하면서 절제된 자유주의(tempered liberalism)”와 “제3의 길”의 거부

개방 사회의 원칙의 지지자로서 보비오는 냉전이 불러온 양극화하고 심화된 정치 갈등의 구조에서 한 무관심한 방관자는 전혀 아니었다. 보비오는 개방 사회의 핵심적인 특성으로 고려되는 법의 지배에 대해서만큼은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특히 법의 지배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의 최우선의 특징으로 강조하는 핵심 사항이다. 좌와 자유주의파들 간 대화 과정에서 좌파 진영에 있는 보비오의 동료들이 자유주의적 권리와 법의 지배에 대해 점점 회의적이 될 때, 보비오의 대응은 법의 지배였다. 그는 동료들에게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진정한 헌신은 편향되지 않고,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가능한 한 많이 민주주의 체제의 부정적 측면들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주의가 여러 약점을 지닌다 하더라도, 그 원칙에 있어서만큼은 존중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보비오의 요구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확신을 갖는 민주주의자이다. 그래서 나는 확신을 가지고, 그것이 비능률적이고, 부패하고, 만인 대 만인의 전쟁이 아니면, 위로부터 아주 경직된 질서를 부과하는 극단으로 흐를 수 있는 위험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럴 때일수록 자신은 민주주의를 계속 옹호해왔다.”라고. 보비오의 의견으로는 민주주의가 법의 지배, 언론과 결사의 자유, 다원주의가 핵심 요소로서 작용하지 않고서는 적절하게 기능할 수 없다고 믿었다.

보비오의 반공주의에 대한 관점은 두 층위를 갖는 어젠다, 즉 하나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강력한 옹호,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를 포함해서 모든 형태의 냉전 반공주의를 내건 정치 세력들을 정치사회로부터 축출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 둘을 하나로 통합해 한 부분으로 다루는 방식이다. 보비오의 관점에서, 마르크시즘은 권력 제한, 다원주의의 보호, 법의 지배의 구현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온건한 중도좌파의 원칙과 가치를 준봉해온 철학자로서 그는 고전적인 개념으로서의 좌와 우의 구분이 지닌 정합성을 믿어왔다. 이 관점에서 그는 당시 한 새로운 신조로 등장한 “제3의 길”, 말하자면 현실에서 가능한 좌와 우를 결합하여 그것을 초월하고자 하는 또 다른 하나의 정치 이념의 범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으로는 그것은 확실하지도 않고, 애매모호한 아이디어일 뿐, 사회민주주의의 원칙과 비교할 때 실제의 진전을 만들어내지도 못했다고 비판적으로 이해한다.

 

③ “문화의 정치”의 전통과 그에 기초한 대화의 철학

보비오의 대화의 정치는, 하나는 자유민주주의와 헌법주의(constitutionalism)이고 다른 하나는 대화와 관용을 중심으로 하는 그의 정치철학을 특징지을 수 있는 것과 관련된, 그의 온유하고, 절제된(moderate) 성격의 표현이다. 이 문제를 보기 위해서는 보비오가 냉전의 이데올로기적 대립 관계를 풀어나가는 하나의 배경이자, 방법으로 삼았던 “문화의 정치(politica e cultura/ the politics of culture)”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화의 정치는, 보비오가 냉전 초기인 1955년 출간했던 책의 중심 주제이다. 그것은 과거에 역사와 문화를 공유했던 유럽이 하나였지만, 지금은 냉전으로 이데올로기와 국경이 유럽을 양분하고 있다는 것, 이러한 조건에서 어떻게 대화와 협력이 가능한가를 탐색하는 것이다.

보비오의 생각으로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넓게 어필할 만큼 일정하게 정당성을 갖는 것은, 빈곤, 정치적 의존성, 경제적 노예 상태로부터 인민을 구원하겠다는 그들의 아이디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50년대 중반 보비오-델라 볼페 논쟁 과정에서 보비오는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조합만이 전후 이탈리아에서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진보를 실현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어서 “자유의 두 의미는 모두 정당하다. 각각 그 자체의 영역에서 정당하다.”라고 말하면서 그의 동료들에게 “두 자유 가운데서 어느 것이 더 진정한 자유인가”에 대답하려는 것은 무용한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한 질문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것은 하나의 논쟁적인 전제, 말하자면 자유를 이해하는 데 단일한 어떤 기준이 있고, 하나의 정당한 방식이 있고, 다른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상정하는 데서 연유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방식은 잘못된 것이다. 자유에 대해 생각하는 올바른 방식이 있다면, 그것은 두 가지 형태의 자유가 정도를 달리하면서, 참여(participation)로 표현될 수 있는 자율적인 것, 그와 동시에 불개입(non-interference)을 포괄하는 것으로, 그것들은 추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지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서만 차이를 드러내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어서 보비오는 이렇게 말한다. “민주적 제도는 무엇보다 보통 선거와 정치적 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그것은 자유주의적 제도들의 교정 가능하고, 하나의 통합이고, 또 개선이다. 그 제도들은 그것을 능가하는 어떤 대안이거나, 어떤 다른 것이 아니다.”

 

④ 중도의 길, 그리고 절제와 온유함의 기풍

보비오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가졌다면, 그것을 뒷받침했던 것은 온건함과 절제의 규범이자, 기풍이다. 정치철학에서나 그의 사고 속에서나 정치적 실천적 자세와 행위를 통해, 보비오가 보여주었던 특성은 온건함과 절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항상 현대적 개인들이 지녀야 하는 네 가지 자유를 강조하고 그에 헌신했다. 인신 보호와 분명하게 정의된 형사적, 사법적 규칙에 따라 재판받을 권리,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그것이다.

보비오는 동구 공산주의가 해체된 데 대해 자유의 승리로 자축한, 그래서 이제 자유주의만이 유일 이념으로서 세계의 이념적 지형에서 지배적이 됐다는 “역사의 종언” 논리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오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신중함과 인내가 필요하고, 희망도 아니고, 절망도 아닌,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라고. 그는 또한 위로받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유토피아를 거부했고,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딜레마에 대한 어떤 기적적인 최종의 해결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우리가 정의와 평등을 추구하는 데 있어 다만 “한 번에 한 발짝” 나가는 것, 그리고 우리의 선택과 행위에 있어 사려 깊음과 온건함을 실천하는 일이다. 보비오는 그의 온건함의 철학에 대해 『노년과 다른 에세이(Old Age and Other Essays)』에 있는 한 장 “나의 비판자들에 대한 답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중도적 길이 최선(in medio stat virtus)’이라는 고대의 격언을 믿는 사람이기에 한 중도파이다. 그렇다고 내 말이 극단주의자들이 항상 틀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온건파는 항상 옳고, 극단주의자들은 항상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극단주의자들처럼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경험주의자는 ‘대체로’라고 말하는 것에 한정해야 한다. 공적, 사적 생활에 대한 경험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분명하게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접근을 피했던 사람들이 제시했던 해결책을 선호한 사람들로부터였다. 그 해결책이 더 낫지는 않았지만, 덜 불완전하다. 나는 한 민주주의자로서 확신감을 갖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민주주의가 불완전하고 부패하고, 또 양극단의 하나, 말하자면 만인 대(對) 만인의 투쟁으로, 또는 위로부터 부과되는 경직적 질서로 빠지는 위험이 있을 때에도 민주주의를 옹호하기를 계속했다. 민주주의는 극단주의자들이 압도하지 않는 데서 존재한다. 만약 극단주의자들이 압도한다면 민주주의는 끝난다. 이것은 또한 왜 다원주의적 정치의 스펙트럼에서 우와 좌에서의 극단파들이 서로 정반대되는 이유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혐오하는 데 합치게 되는가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온건한 사람에게 정치 생활은 결코 승자 독식 게임이 아니고, 따라서 세계는 단순하게 승자와 패자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온건함과 병행하여 그것을 뒷받침하는 미덕으로서 단순함과 명증함을 말하는 것 또한 지나칠 수 없다. 그 두 가지 미덕의 요소가 중요한 것은, 온건함의 전제 조건으로 작용한다는 점인데, 그것이, 온건하지 않은 방식으로 쟁투의 정신, 경쟁, 또는 라이벌의 정신을 흡인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경고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온건함의 전제 조건이 된다는 점이다. 온건함의 어젠다는 “이것 아니면 저것” 간의 선택을 배제하고 혼합적 해결을 추구한다. 그래서 이 복합적인 혼합은 공동체 전체의 균형과 안정을 유지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보비오가 생애 전체를 통해 그의 정치철학의 중심 주제로 삼았던 정치적 자유의 개념과 관련해 볼 때에도 그가 말하는 온건함의 덕이 그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보비오는 지난 세기 1950년대 중반 「반동주의자들에대한 비판」이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고대인들의 자유로부터 근대인들의 자유를 계속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분출하는 과도한 열정으로 충만한 진보파들에 반대하여 다음 세대들의 자유로부터 그것(고대인의 자유)을 보호하는 것이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유의 두 유형 가운데 중간을 발견하는 것은, 오늘의 시점에서 필요하고, 그것을 성취하는 최선의 수단은 정치적 온건함이다. 보비오는 냉전하에서 엄청나게 변화하는 어려운 시대를 통해 온건함의 지혜와 용기 있는 정신으로 이러한 미덕을 보여주었다.

 

5. 맺는 말

강연을 마치면서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주의가 한국 사회에서 잘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은 최근년에 이를수록 확대 심화돼왔고, 그동안 우리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양극화를 통해 상대에 대한 적의, 분노의 전 사회적 팽만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한국적 토양, 한국의 역사와 전통, 문화, 가치, 사람들의 심성을 유지하고 보존하면서, 서구 사상과 철학, 종교, 그리고 정치의 경험으로부터 기원을 갖는 자유주의를 우리의 정치적, 문화적 조건과 풍토 속으로 접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둘째, 우리는 냉전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느냐 하는 질문이다. 만약 냉전에서 탈냉전으로의 전환을 통해 우리가 별로 배운 것이 없다면, 우리는 탈냉전에도 불구하고, 냉전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는가 하는 질문이다.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이 정신적, 문화적, 정치적, 사회경제적, 그리고 과학 발전의 관점에서 어떤 무이념과 가치, 그러한 상황이 필연적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는 공백 속으로 던져졌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환경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서구의 철학자, 정치ㆍ사회철학자, 과학자, 지식인, 언론인 그리고 정치인들이 냉전 자유주의에 대해 새로운 해석, 새로운 의미 부여—세계와 사회, 인간을 보는 새로운 문제의식 또는 이해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진정 냉전 자유주의의 의미와 역할을 반추하는 것 만으로서는 가능할 것 같지 않다. 본 강연자는 그 핵심적인 지식, 행위 규범, 시민적 덕과 윤리의 중심에 일단 “강건하면서도 절제된 자유주의”를 관심의 주제로 제시했다. 생산적인 토론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 강연] 자유주의의 이념ㆍ현실ㆍ기풍 (최장집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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