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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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
  • 문선영 서평위원/동아대·국문학
  • 승인 2022.04.24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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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가는 소란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
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
보기 싫은 노란 꽃을

- 김수영, 「꽃잎 2」


   봄! 봄! 봄이라서 우리 대학 캠퍼스는 온통 꽃 천지다. 김소월이 애잔하게 노래한 진달래꽃이 지나간 자리를 달래듯 붉은 영산홍이 여기저기 한창이고, 모과꽃도 따스함을 내뿜고 있다. 민들레가 잔디밭 곳곳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고, 뉴턴의 사과나무 4대손이 연분홍 꽃들로 봄 풍경을 거들고 있다. 금낭화와 갖가지 야생화들도 한창이다. 
   많은 시인들이 꽃을 노래했지만, 봄이 오면 김수영이 쓴 꽃 시들이 내 마음을 헤집는다. 이는 아마 김수영이 꽃을 내밀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꽃을 매개로 사람을, 세상을, 우주를 절절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와 미래에 통하는 꽃”(「꽃 2」)들의 이야기들을.

   어수선한 상황을 비집고 어김없이 오는 봄 그 가운데 4월의 끝자락에서 김수영 전집을 다시 읽는다. “김수영 시의 주제는 자유다.” 민음사에서 나온 김수영 시 전집 표지에 맨 먼저 실린 말이다. 자유가 절실했던 억압의 순간들이 아른거리고 자유에 목말랐던 서러움의 순간들도 예견된다. 4·19로 시적 전환을 맞이한 시인이 김수영이고 보면, 4월에는 김수영 시가 더더욱 적격이라는 생각이 몽글몽글 피어난다. 『김수영 전집』(2018)은 1981년에 나왔던 전집을 개정한 2003년 개정판 출간 후, 발굴 시와 미발표 시, 미완성 초고 시 등을 수록해서 출간한 것이다. 제1권은 김수영의 시들을 담고 있고, 제2권은 그의 산문들을 시대 순으로 펼치고 있다. 그동안 드러나지 않은 여러 편의 시와 산문, 일기와 편지들이 추가된 것이 반갑다.

   김수영은 두루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절절하게 겪은 시인이다. 해방 후 시를 쓰기 시작해서 박인환 등과 함께 모더니즘 성향의 앤솔로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냈고, 한국전쟁 때에는 거제포로수용소에 포로로 감금되면서 분단 현실의 처참함을 뼈저리게 체감했으며, 1960년 4·19혁명의 기치에 동참함으로써 문학과 현실의 일원론인 ‘온몸시론’을 창출했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발언은 김수영 시인의 문학사적 존재감을 가장 잘 요약한 말이다.
   시인의 삶과 작품을 일치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삶의 진실이 시의 진실과 겹칠 때 삶은 분명 시가 된다. 김수영과 그의 시가 이 경우에 해당된다. 김수영은 시와 구체적인 현실을 하나로 만나게 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시의 가능성과 전망과 힘을 믿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시를 통해서 ‘있는 현실’에서 나아가 ‘있어야 하는 현실’을 희원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그는 그런 시를 쓰고자 했고 또 썼다.  

   김수영의 시는 자유의 시다. 나아가 사랑의 시다. “김수영 시의 주제는 자유다”라는 민음사 표지 말을 패러디하면 ‘김수영 시의 주제는 사랑이다.’ 가족의 사랑을 알고(「아버지의 사진」, 「나의 가족」, 「가옥 찬가」, 「여편네의 방에 와서」 등), 하찮아 보이는 일상성에 귀한 눈길을 주고(「공자의 생활난」,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 「생활」, 「조그마한 세상의 지혜」 등), 나아가 세상과 그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에 사랑의 표정을 각인한다(이는 그의 시 전반을 아우르는 경향이다!). 하여, 참여와 순수 문학을 자유의 개념으로 극복한다는 정반합의 논리로 김수영을 서술한 대목에(강신주, 『김수영을 위하여』) 나는 사랑을 보탠다. 정반합의 논리로 새로운 합일의 경지로 이끄는 원동력은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갈구하면서 온몸시론으로, 곧 시로 현실을 재구성하고자 했던 김수영이지만 그의 시가 정작 삶에 대한 사랑으로 똘똘 뭉쳐져  있음을 발견하는 일은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길을 잃지 않는”(괴테, 『서동시집』) 법이니까. 
   그러므로 김수영이 부각시킨 자유도 궁극적으로는 사랑의 정신을 구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는 인간에 대해, 세상에 대해 사랑과 기대가 많은 시인이었다. 그래서 교통사고로 일찍 세상을 뜬 그에게서 많은 아쉬움을 느낀다. 그가 죽기 며칠 전에 썼다는, 마지막 작품인 「풀」 이후, 더 많은 이야기들을 그의 시를 통해 들어야 한다는 허기감은 오늘도 여전하다.

   그의 시적 세계관을 엿보다 이중성 또는 모순 어법을 구사한 점이 눈에 띠었다. 적과 동지를 분리시키지 않는 태도가 그것이다. 그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적을 발견하기도 하고 가장 적의를 느끼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사랑을 느끼기도 한다. 그 대상은 자기 자신이 되었다가 가족이 되었다가 그 누군가가 되었다가 역사가 되었다가 온 세상이 되기도 한다. “가장 사랑하는 적”(「적 2」)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은 바로 적의와 사랑을 하나로 통합하는 태도였다. 여기서 그의 품 넓고 속 깊은 시선을 본다. 사랑을 화두로 삼은 그의 삶과 시를 훨씬 더 구체적으로 만난다.

   덧붙이는 말. 이러한 김수영 시인이 태생적으로 지닌 사랑은 반성이라는 덕목을 잊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한다. 성찰하는 삶의 자세는 사랑을 갈구하는 우리를 한없이 거듭나게 하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길을 잃지 않으므로.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 김수영, 「절망」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데서 온다. 그러니까 반성하고 성찰하는 마음자리에는 절망이 들어앉을 틈이 없겠다는 뜻이겠다. 새천년이 밝은 지 20여 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여기저기 삶의 얼룩들이 우리네 일상을 물들이는 어느 날, 반성하지 않고 성찰하지 않는 삶의 태도들을 헤아린다. 

   4월 끝자락에는,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어느새 꽃비가 흩날리는 4월 끝자락에는, 김수영의 시를 읽자. 시에 버금가는, 당당하게 빛나는 그의 산문들도 읽자. 그리하여 세상 모든 이야기들을 두루 껴안고 있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니 존재해야 하는 자유를 넘어 사랑의 정체성을 헤아리자. 혹, 기회가 된다면 김수영 문학관과 그의 시비가 세워져있는 도봉산 기슭에도 한번 오르자. 
   내일 모레, 비 소식이 있던데, 행여나 비에 꽃잎들 다칠까 염려되는 날, 4월 끝자락이다. 반성하고 성찰하는 마음자리로, 사랑으로, 온 세상이 초록으로 환해지기만을 기대하는 날, 4월 끝자락이다.   

 

문선영 서평위원/동아대·국문학

동아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시인·문학비평가. 부산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국문학(현대시)을 전공하였다. 1990년 『문학예술』 제1회 신인상 시 부문 당선, 1991년 『심상』에 평론으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는 『익숙한 소리』(시집), 『현대시와 문화의식』, 『한국전쟁과 시』 등이 있으며, 그 외 공저로 『한국 현대시와 패러디』, 『한국 서술시의 시학』, 『한국 현대문학의 성과 매춘』, 『몸의 역사와 문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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