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혼’과 ‘법률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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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혼’과 ‘법률혼’
  •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학교·언어학
  • 승인 2022.04.17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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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형 칼럼]

얼마 전에 ‘사실혼’과 ‘법률혼’이라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리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실제 뜻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단어 자체만 놓고 보면 ‘사실혼’은 ‘사실로(진짜로) 혼인을 한 부부’ 같고 ‘법률혼’은 ‘혼인에 관해 뭔가 문제가 있어서 법률적인 문제를 따져야 하는 부부’ 같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이 용어들의 뜻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사실혼’은 물론 ‘de facto’를 직역한 데서 유래한 말이겠지만 ‘de facto’의 뜻을 모른다면 ‘사실혼’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헷갈리기 쉬울 것이다. ‘de jure’에서 유래한 ‘법률혼’은 ‘사실혼’에 비해 헷갈릴 여지가 적다고는 해도, 만일 ‘실제의 혼인 관계’를 ‘사실혼’이라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면 ‘법률혼’은 또 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법률 용어와 행정 용어들이 너무 어렵고 복잡해서 개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 참에 이 ‘사실혼’, ‘법률혼’이라는 말도 차라리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부부’, ‘혼인신고를 한 부부’ 같은 말로 바꾸는 것이 어떨까. ‘병역필’과 ‘병역미필’도 ‘병역의무를 마친 사람’, ‘병역의무를 마치지 아니한 사람’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으니 말이다.

법률 용어, 행정 용어를 비롯한 공공언어는 적어도 그 공공언어가 쓰이는 사회의 일상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도록 다듬어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국의 공공언어는 아직 개선해야 할 점들이 많다. 단지 전문용어만 손을 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병역의무를 마치지 아니한 사람’도 대중들에게는 여전히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지기 쉬운 말이다. ‘-지 아니한’이라는 표현 때문이다. 앞에서 필자가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부부’라는 표현을 제안했듯이 이 또한 ‘병역의무를 마치지 않은 사람’으로 고쳐 부른다면 한층 더 부드럽고 쉬운 공공언어 표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얼마 전에 마무리됐고 제8차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이제 40일 남짓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2년 뒤에는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할 예정이다. 선거에서 당선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정책과 소신을 이해하고 자기를 지지해 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바라던 유권자의 지지를 받아서 당선된 정치인들이 정작 직무 중에는 유권자들과 쉽게 소통하는 데 지장을 주는 언어 표현을 사용한다면 이는 자신을 뽑아 준 유권자들을 외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공공언어 개선은 학계의 제안만으로는 이루어지기 어렵고 결국은 법률과 조례 등을 개정해야 완수될 수 있는 사안인 만큼, 정치인들이 유권자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고자 애쓰던 후보 시절을 잊지 말고 공공언어를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쉽고 편하게 쓸 수 있도록 다듬는 데 힘을 기울여 주었으면 한다.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학교·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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