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속의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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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속의 계급
  • 엄한진 한림대·사회학
  • 승인 2022.04.17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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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이주민의 건강보험 무임승차론과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 그리고 장애인들의 시위와 청년정치인의 학력에 관한 논란까지 대선을 전후한 한국사회는 더욱 직설적인 화법으로 기존의 혐오 현상을 반복하였다. 혐오 또는 경멸과 같은 표현이 어울릴 이 사안들은 사회의 현재를 보여주는 지표이자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이며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대를 여는 과정에 수반되는 진통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혐오 현상은 의식의 문제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그릇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래서 계몽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의 사례들은 여기에도 노사관계의 경우처럼 그 배경에 힘의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혐오 또는 증오 현상과 계급 적대 간에는 백짓장 한 장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 혐오와 착취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연관되어 있고 분리 불가능한 것이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투쟁과 유사하게 혐오의 장에 세워진 이들이 주로 다투는 것은 일자리나 복지를 둘러싼 사회경제적인 지위이다.

차이점도 있다. 경제적인 계급 간의 적대적인 관계에서는 자본가의 착취는 보이지 않고 이 은폐된 구조를 폭로하는 노동자의 분노와 저항만 드러난다. 이와 달리 혐오 현상에서는 ‘정상적인’, ‘우월한’ 몸을 ‘가진 자’의 언어적, 물리적 폭력이 더 거침없이 드러난다. 낮은 지위를 가진 이들에 대한 공격이 전면을 장식하는 것이다. 위계와 서열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며 미래로 부는 변화의 바람에 맞서 노골적으로 기득권을 지켜내려 한다. ‘우월한’ 몸과 능력을 가진 이들에 대한 반감은 대개 우월한 이들이 공격에 나설 때 나타나는 방어적인 성격의 것이다. 

증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실제의 권력구조가 뒤바뀌기도 한다. 힘없고 순종할 수밖에 없는 이주민이 괴물과 같이 큰 힘을 가진 위협적인 존재로 둔갑한다. 언론에 보도되는 극단적인 사건을 통해 여성들도 남성 못지않게 폭력적이고 위험한 존재로 만들어진다. 이동 자체가 목숨을 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장애인이 다수자의 편안한 일상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고, 심리적, 물리적 폭력 속에서 숨죽여 사는, 성과 가족에 대한 폐쇄적인 관념의 희생자인 성소수자들이 그 ‘성스러운’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부풀려진다. 

혐오나 차별의 감정과 그것의 표현은 우열을 가리는 것이 중요한 체제가 만들어내는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서로 다른 민족이나 성의 현실적인 지위가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환기시키기 위해, 또는 도전받는 기존의 위계를 지키기 위해 투사가 된 양 타자를 열등한 존재로 만드는 일에 나서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증오나 혐오는 사회의 병리적인 현상이라기보다 사회의 정상적인 양상이다. 암세포처럼 내부에서 떼어내야 할 것도, 바이러스처럼 접촉하지 말아야할 외부적인 요인도 아니다.

혐오는 우리 모두에 의한 우리 모두를 향한 공격이다.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은 혐오에 동원되는 여러 잣대 중 적어도 어느 하나는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혐오의 대상이 될까 두려움에 떤다. 혐오가 두려운 이들이 다른 한편에서는 동성애로 인해 사회가 걱정된다고 말하고 이주민을 생각하면 불쾌해진다. 과거와 달라진 여성들의 모습이 영 마뜩치 않으며 장애인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노숙자는 더더욱 그렇다. 이렇게 혐오와 증오는 가진 자의 방어이기도 하고 사회가 부여한 낙인을 지닌 이들의 자학이자 아편이기도 하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 혐오 체계의 덫에 걸려있다.

따라서 혐오라는 오류를 응징하면서 동시에 그 오류를 범한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까다로운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갈라치기로 혐오를 조장하는 것에 대한 엄격한 태도와 이렇게 위로부터 만들어진 혐오를 수용하는 이들에 대한 포용적인 태도가 동시에 필요한 것이다. 또한 비판과 교정은 행위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자본주의에 대해 얘기할 때 우리는 개별 자본가나 노동자의 사례보다는 자본과 노동 간의 구조적인 관계를 거론하며, 자본가를 계몽시켜 선한 자본가를 만드는 것을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혐오에 대한 공격 역시 그 뿌리에 있는 불평등으로 향해져야 할 것이다. 볼테르는 『관용론』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형제를 미워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혼에 가해지는 폭압을 증오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했다. 우리도 이러한 식의 교정을 필요로 한다.


엄한진 한림대·사회학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이주, 종교, 사회학이론, 사회적경제 분야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다문화사회론: 이민과 다문화 현상에 대한 성찰적 입문서』, 『이슬람주의: 현대 아랍세계의 일그러진 자화상』, 『프랑스의 이민문제』와 같은 저서를 출간했으며 최근에는 증오 현상과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 관련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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