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다
상태바
국경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다
  • 차용구 중앙대·역사학
  • 승인 2022.04.17 15: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을 말하다]

■ 책을 말하다_ 『국경의 역사: 국경 경관론적 접근』 (차용구 지음, 소명출판, 253쪽, 2022. 02)

 

팬데믹과 국경연구
  
국경 연구(Border Studies)는 세계·국가·지역 권력이 등장하고 힘을 겨루는 장소인 국경선을 통찰하는 학문이다. 전통적인 국경 연구는 국경을 보호·단절·통제·차단 기능을 하는 배타적 선이자 주권의 날카로운 모서리로 이해하면서, 반드시 수호해야 하는 신성한 경계선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최근의 국경 연구는 단절과 대립의 장소로만 받아들여지던 국경지역을 변화와 역동의 ‘접경공간(Contact Zone)’으로 새롭게 주목한다. 배제하고 연결하는 국경의 양가성은 코로나19 확산으로 봉쇄와 보호주의가 화두인 요즈음 연대와 공조를 통한 위기대응 협력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좌표가 될 것이다.

인간이 그어놓은 경계는 자기가 판 함정에 자신이 빠지는 것처럼 스스로를 옥죄어왔다. 역사를 보면 국경은 중앙정부의 정책적 개입과 무관하게 자연히 생겨나는 초국경적 협력과 통합의 과정이 진행된 접경공간으로서 상호의존과 관용, 새로운 국가와 문명의 탄생 등 다양한 모습을 빚어낸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장소에 가까웠다. 국경을 성공적으로 봉쇄한 역사적 사례는 드물었다. 격리를 뜻하는 영어 ‘쿼런틴’(quarantine)은 ‘40일’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quaranta giorni’에서 유래했다. 이는 14세기 중반 흑사병(페스트)이 유럽을 휩쓸 때 항구로 들어오는 배의 선원들을 40일 격리한 데서 비롯됐다. 이런 강제격리 조처에도 당시 유럽 인구의 절반 정도는 흑사병에 희생됐다. 어떤 조처를 하든 국경 봉쇄는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봉쇄는 단기적으로 효과가 있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국경 협력이 나날이 중요해지는 21세기 글로벌 사회에서 국경 봉쇄는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반역이다.


다시 국경을 생각하다

20세기 중반 이후 유럽연합이 추진했던 국경 개방은 국경 없는 세계의 도래를 예언하는 듯했으나, 이 시기에 세계의 국가 수는 세 배로 증가하였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더불어 시작된 탈냉전 이후의 세계화는 국가 간의 국경을 허물고 국경 없는 세계를 만들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듯싶다. 국경 장벽은 오히려 세계 곳곳에서 경쟁적으로 건설되었고, 2001년 9·11 이후 미국의 국경보안 강화정책과 유럽의 난민 문제는 국경 정치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서구 근대 국가가 만들어낸 국경은 횡단과 통제라는 힘의 대립, 즉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 투쟁의 재판장으로 변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난측한 정세 변동은 역설적으로 국경 연구의 르네상스를 열었고, 국경에 대한 개념과 연구방법의 다양화를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최근 국경 연구는 지역적·미시적 공간 연구로 회귀하면서 국경의 공간성에 주목하게 된다. 

프레더릭 잭슨 터너(Frederick Jackson Turner)가 미국 서부 개척의 역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제안한 변경이론(frontier thesis)이 19세기 말에 등장하면서 역사학자들도 국경 지대에 흥미를 갖고 연구를 시작했다. 터너의 변경이론이 다시 학계의 관심을 끈 것은 탈냉전이라는 변화의 시대에 접어든 1990년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터너의 변경이론은 비판과 수정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변경 공간의 정복, 지배와 피지배, 분리와 타자화보다는 행위주체들 간의 관계성·의존성이 더 강조되면서, 국경을 가치와 관습을 가진 사회와 종족이 조우하는 다차원적인 공간으로 이해했다. 


국경 경관론적 접근

본서의 첫 번째 장에서는 국경 지대를 바라보는 고전적 해석을 오늘날의 독일 동부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재사유했다. 두 번째 장에서는 중세시대에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변경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돌아보고 이들이 펼쳤던 변경의 일상적 모습을 살펴보았다. 독일 동부 국경이라는 특정 국경 지대의 사례 조사는 여전히 새로운 연구 방향을 모색 중인 중세 변경사(frontier history) 연구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세 번째 장에서는 근현대 동서양의 국경 경관을 다루었다. 1990년대 이후부터 학자들은 국경 경관(borderscape) 개념을 통해 국경을 고정적인 선(線)이라는 1차원적 시각에서 벗어나 다의적이고 다중적 시각에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국경 경관은 국경(border)과 경관(scape)이 합쳐져 만들어진 용어로, ‘scape’는 ‘만들어진’을 뜻하는 ‘geschapen’이라는 네덜란드어에서 유래한다. 결국 ‘borderscape’는 ‘만들어진 국경(created border)’을 지칭하게 된다. 즉. 국경은 타협의 산물로 생성된 다자성·가변성·불확정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고전적인 국경론은 국경을 연속적이며 고정불변하는 초역사적인 것으로 신성시하였다. 그러나 국경 경관론적 방법은 경계를 시대적 요청에 따라 현재에 (재)구성되는 것으로 이해하며, 동시에 다중적 주체들이 교차적으로 (때로는 불평등하게) 서로 얽혀 있는 경계 지대(borderlands)로 바라본다. 이러한 방법의 적용은 전근대 경계가 갖는 접경성으로의 회귀이자, 글로리아 안살두아(Gloria Anzaldúa)의 표현에 의하면 근대 국경의 ‘절개된 상처’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서양의 선형적 경계선(lineal borders)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전부터 확인된다. 요컨대 1222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서 양측의 대표자로 구성된 국경위원회가 소집된 바 있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직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으로 대서양 한가운데를 기준으로 지구 전체를 양분하기도 했다. 베스트팔렌 질서의 세계사적 의미는 선형적 경계 개념이 1648년을 기점으로 지구적 차원으로 확대되었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식민주의적 팽창은 경계짓기라는 세계정치를 통해서 전 지구적 공간의 자의적 분할과 재조직을 시작한 것이다. 본서는 국경 경관적 접근을 통해서 서구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약탈적 영토 분할과 폭력적 국경 획정이 생산해낸 ‘모순의 공간’인 국경을 검토하고자 했다.


근현대 서구의 식민주의적 국경

근대 서구의 주권과 정치적 국경선은 비서구 사회에 차별적이고 불평등하게 적용된 셈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에서부터 현재까지 8개 정도의 강대국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지배를 위해 다투었다”는 왈츠(Kenneth N. Waltz)의 분석은 세계 통치의 수단으로서 국경의 의미를 더욱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국경은 발달된 문명의 이기이자 야만과 대비되는 보편적 척도로서, 비유럽 지역 주민들의 의사는 고려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획정되었다. 국경은 서양 민족주의의 역사적 산물이며 제국주의 시대 서구 패권적 문명 담론의 유산이었다.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확산은 고대 로마제국의 ‘분리 통치(divide and rule)’라는 원리를 식민지 변방까지 밀어 붙이면서 세계의 지리적 구획화를 가속화시켰다. 베스트팔렌 체제가 세계를 뒤덮어 버린 셈이다. 19세기의 서구 민족주의는 내적으로는 국민국가와 명확한 국경선의 존재를 만들어내고 외적으로는 제국주의와 결합해서 비서구의 영토에 분할선을 멋대로 획정했다. 이러한 이유로 지난 150년간 지정학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전 지구적 국경선의 획정이라 할 수 있다.

국경 문제를 역사적으로 조망하는 국경사 연구에 대한 학술적 논의는 여전히 미흡해 보인다. 학제 간 연구의 대상인 국경을 역사학의 새로운 영역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시간적으로는 전근대와 근대를 모두 담아내며, 국경 지대에 덧입혀졌던 허위와 오해의 그을음을 제거하고 그 나신을 조명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근대 서구의 경계적 사유(border thinking)가 전 지구적인 지배 장치였음을 상기시키고 싶다. 근현대 식민주의적 국경 형성을 종적·횡적인 연구를 통해 국경의 구조와 양상을 살피면서 그 역사성을 ‘재’자리매김하고자 한다.

한반도를 포함한 비서구 사회는 서구 열강이 임시적이고 자의적으로 그은 분계선으로 지금껏 아픔과 슬픔을 안고 산다. 식민주의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여전히 제국주의가 만든 국경이라는 유산은 청산되지 못하고 있다. 경계와 경계 지대에 대한 재사유와 재정의를 거친 국경경관적 연구는 국경의 이쪽과 저쪽의 이분법적 사고에 균열을 일으키면서 국경의 접경성·초국가성·다자성·다의성·역동성·(재)구성성·주체성과 창조성을 드러낸다. 『공간의 생산』에서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vre)가 한 표현을 빌리자면, 경계는 고정성, 움직임, 흐름과 파동이 뒤엉켜 상호작용하면서 생산되고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국경과 같은 경계는 사회적 생산물이자 가변적 구조물이기 때문에, 경계에 대한 대안적 상상을 현실화하는 새로운 재현 방식이 요구된다. 국경 경관 개념에 대한 인식을 통해 세계화의 폭력이 그대로 남아있는 국경선이 평화와 생명의 공간으로 현전했으면 한다.


차용구 중앙대·역사학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 중앙대·한국외대 <접경인문학> 연구단장 역임. 서양 중세사 전공. 저서에 『중세 유럽 여성의 발견-이브의 딸 성녀가 되다』(한길사, 2011), 『가해와 피해의 구분을 넘어-독일·폴란드 역사 화해의 길』(공저, 동북아역사재단, 2008), 역서에 『교황의 역사-베드로부터 베네딕토 16세까지』(길, 2013), 『중세, 천년의 빛과 그림자-근대 유럽을 만든 중세의 모든 순간들』(현실문화, 2013) 등이 있다. 또한 「독일과 폴란드의 역사대화-접경지역 역사서술을 중심으로」(『전북사학』 33, 전북사학회, 2008), 「국경에서 접경으로-20세기 독일의 동부국경 연구」(『중앙사론』 47, 중앙대 중앙사학연구소, 2018)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