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주인옹의 본명인가, 페르소나의 허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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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주인옹의 본명인가, 페르소나의 허명인가
  • 심경호 고려대 명예교수·한문학
  • 승인 2022.04.17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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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 나의 테제]

■ 나의 책, 나의 테제_ 『호, 주인옹의 이름』 (심경호 지음,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520쪽, 2022. 02)

 

510여 쪽의 이 책에서 필자는 한국의 과거 인물들이 호를 갖게 된 동기와 호에 의미를 부여한 방식을 원리의 측면에서 밝히고자 했다. 

근대 이전의 인물(선비, 관료, 무인, 승려, 국왕, 왕족, 부마, 중인, 서얼, 여성 등등의 독서지식층)들은 자기 내면에 담겨 있는 고유한 가치와 이념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스스로 호를 짓거나, 다른 사람이 지어준 호를 스스로의 또 다른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과거의 사람들은 인간의 고유한 본성을 주인옹이라고 불렀으므로, 필자는 이 책에서 호를 ‘주인옹의 이름’이라고 규정했다. 

필자는 대학원 시절부터 근대 이전 한국의 문학과 사상에 대해 연구해 왔지만, 시문 및 서적의 이름에 사용되고 자료 속에 빈번하게 출현하는 호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경위에서 인간 주체의 또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었는지 몰라서 늘 부끄러움을 느껴왔다. 그러다가 2009년 『내면기행-선인들의 묘지명』을 출판하고 그 후속작 『나는 어떤 사람인가 —선인들의 자서전』을 출간하여, 중세 주체의 존재방식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옛사람들이 호(실호, 재호, 누호, 헌호, 당호, 정호 등등 포함)를 명명하는 방식에 주인옹을 재확인하는 의식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2009년부터 ‘별호와 당호’에 관해 집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널리 알려진 몇몇 인물들을 중심으로 호의 의미를 쉽게 풀어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17년부터 2019년 말까지 다산 정약용의 한시를 역주하여 네이버 지식백과에 게재할 때 시문에 호로 언급된 인물이 누구인지 몰라 많은 고생을 했다. 결국 애당초 스스로 부과했던 과제로 되돌아가, 문집이나 주요 저작물을 남긴 인물들의 작호 방식을 폭넓게 살펴보기로 했고, 그 첫 번째 결과물로 이 『호, 주인옹의 이름』을 출간하게 된 것이다. 

흔히 주체적 인간의 문제를 논하면 서구의 개인주의 사상을 참조 틀로 삼는다. 그럴 경우 근세 이전 중국이나 한국에서 유학이나 불교가 인간의 주체성을 추구한 사실을 무시하기 쉽다. 『논어』에서는 “인(仁)을 행하는 것이 자기에게서 말미암지, 남에게서 말미암는가?”라고 하여 윤리적 주체를 중시했다. 불교에서도 선종의 경우 조고각근(照顧脚跟)을 말한다. 근대 이전의 중국이나 한국의 과거 인물들이 가문이나 집단을 중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神)에 예속되지 않았으며, 끊임없는 자기혁신을 실천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술(自述)의 문학이 발달한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호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그러한 자기혁신과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산이 1814년 3월 14일 제자를 위해 우화의 형식을 빌려 쓴 <현진자설>(玄眞子說). 아래는 <현진자설>의 부분 사진 (자료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과거의 인물들은 스스로 겪은 경험을 호에 녹여내고 미래에 대한 지향을 호를 통해서 거듭 확인했다. 때로는 삶의 각 단계마다 새로운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본래 호는 현대에 사용하는 필명, 닉네임, 인터넷 ID와 다르다. 현대인의 필명, 닉네임, 인터넷 ID는 근본적으로 한 개인의 인격을 은폐하는 기능을 갖는다. 하지만 호는 주인옹을 새로운 의미망 속에서 드러내는 기능을 했다. 호는 개념어, 물명, 지명 등등을 이용하였는데, 호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 명칭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현재의 자신을 수시로 되돌아보면서 스스로를 혁신시켜 나가고자 했다. 다만, 호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허상을 내보이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은 호를 하나의 페르소나로서 활용하는 것을 비판했다. 

필자는 근세 이전에 저작이나 편저를 행하거나 정치·문화의 면에서 긍정적 혹은 부정적 자취를 남긴 인물 5천여 명을 대상으로 자호(自號)나 남들이 불러주어 스스로의 또 다른 이름이 된 호들을 정리하고, 작호의 동기와 호의 의미를 분석했다. 그 결과물은 총 2책으로 구성했는데, 이번에 출판한 책은 호를 짓는 방식과 호를 사용한 관습을 큰 틀에서 살폈다. 다른 한 책은 개념어를 사용하는 예, 물명을 사용하는 예, 지명을 사용하는 예 등등으로 나누어, 실제 호의 분포와 작호 방식을 더욱 상세하게 고찰한 내용이 될 것이다. 

종래 가문별로 유명 인물의 호를 나열하는 호보(號譜)를 작성하거나 호의 상자上字(위글자)·하자下字(아래 글자)를 나누어 호의 형태를 분류한 예들이 있고, 현대에는 과거 인물들을 망라하여 호의 사전을 만든 예들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어느 형태도 취하지 않았다. 이 책은 저술이나 업적을 남긴 인물들, 혹은 지탄받는 인물들을 대상으로, 작호의 계기를 확인하고자 했는데, 그 과정은 그 한 사람의 전기(傳記)를 작성하는 일과 같았다.

현재 한국의 고전 자료는 상당한 분량이 데이터베이스화되고 원문 자료들이 여러 형태로 가공되어 있지만, 여전히 호의 인물을 특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역사적으로 여러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은 대부분 호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했건만 현대인들은 그 호가 지닌 의미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호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은 어쩌면 그 한 인물의 삶의 본질과 지향을 모른다는 것과 같다.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호에 의해 기표된 각 인물을 더 깊이 이해하고, 선인들이 호를 통해 자기 내면을 직지했던 관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나아가, 근대 이전에는 대다수 여성과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민중들로 하여금 호는커녕 이름도 남기지 못하게 만든 억압과 배제의 관례를 비판할 필요도 있다. 옛 문헌을 열람하다가 호의 의미가 궁금해질 때 이 책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심경호 고려대 명예교수·한문학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일본 교토(京都)대학 문학박사.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와 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단독 및 공저 1-4),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국문학연구와 문헌학』, 『한국한시의 이해』, 『한시의 성좌』, 『참요』, 『옛 그림과 시문』, 『한국의 석비문과 비지문』, 『호, 주인옹의 이름』 등 30여 종이 있으며, 역서로 『주역철학사』, 『금오신화』, 『한자학』, 『일본서기의 비밀』, 『삼봉집』, 『기계문헌』 1-6, 『심경호 교수의 동양고전강의 : 논어』 1-3, 『동아시아 한문학 연구의 방법과 실천』, 『도성행락(圖成行樂)』, 『여유당전서』(시) 등 30여 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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