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힘, 말의 두께
상태바
법의 힘, 말의 두께
  • 김항 논설위원/연세대·문화인류학
  • 승인 2020.02.0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학직설]

해마다 11월이면 학생회 선거가 치러진다. 예전에 비해 떠들썩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입후보자들은 당선을 위해 열심히 선거운동을 한다. 강의실 유세도 여전하다. 단수후보일 경우가 많기에 다소 쓸쓸한 감이 있지만 열심히 소신과 공약을 알린다. 강의 시작 전 5분 정도를 할애하면서 내심 조금 더 시간을 써서 토론이라도 해보길 바라지만 ‘땡땡이’로 비칠까봐 시도는 못 해 봤다. 재미로 토론을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부터 후보자들 유세에서 마음에 걸리는 상투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유세라 하면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유권자에게 호소하는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과거 운동권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던 시절 통일운동 혹은 노학연대에 힘을 쏟겠다고 열변을 토하던 후보자가 생각난다. 물론 요즘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다. 저마다의 소신과 공약을 말한다. 하지만 과거 학생회 선거뿐 아니라 국정 선거에서도 들을 수 없는 상투어가 들리는 경우가 많다. 그 상투어란 “~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이다. 무언가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겠다는 유세. 후보자와 유권자 사이의 토론을 보고 싶었던 까닭은 이 때문이었다.

혹자는 기억할지 모르겠다. 하먼 멜빌 <바틀비>의 대사, “~하지 않은 편이 좋겠습니다(prefer not to~)”를. 질 들뢰즈에서 조르지오 아감벤까지 기라성 같은 현대철학의 거장들이 이 대사에서 ‘해방’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프랑스혁명에서 러시아혁명에 이르는 근대사에서 해방의 언어가 항상 ‘이행’을 전제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패러다임은 17세기 주권국가 탄생의 원천적 장면에서 이미 예고된 바였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기독교 전통 속의 메시아주의까지도 소환될 수 있다. 홉스가 가까스로 변증한대로 주권은 개인의 내면까지는 통치 권역으로 포섭하지 못했고, 메시아는 그런 내면의 믿음과 호응하면서 기어코 역사의 끝자락에 해방을 선포할 터였다. 저마다 지금과 다른 세상이 있다고 믿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믿음이 시간의 진행 속에서 현실로 구현될 것이란 예감, 이 믿음과 예감은 지금과 다른 세상이 해방의 이름으로 열릴 것은 약속했던 것이다. 시공간이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탈)조직되리라는 이행의 믿음은 그렇게 해방의 약속을 지탱해왔던 셈이다.

현대철학의 거장들이 바틀비의 대사에 매혹되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해방을 꿈꾸는 한에서 이들은 이행의 믿음을 공유한다. 지금과 다른 세상이 열릴 수 있고 열려야만 한다는 믿음을 말이다. 하지만 내면과 구원의 결합을 전제로 한 20세기의 해방 서사는, 주지하다시피, 끔찍한 전체주의로 귀결되기 십상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분석하여 고발한 바 있는 자본주의 체제는 20세기의 혁명가들 손으로 극복된 듯 보였다. 레닌과 로자 만이 아니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도 함께 했다. 사회주의와 파시즘과 나치즘은 모두 자본주의 체제라는 ‘현재’를 극복하는 꿈으로 공유되었고,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에서 구체적인 프로그램과 제도화를 통해 현실화되었다. 이들은 계급, 민족, 인종의 이름으로 ‘해방’을 기획했고, 그 프로그램에 입각해 ‘이행’의 청사진이 역사 속에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결과 또한 역사가 증명한 대로이다.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라는 용어로 범주화했듯이, 이들은 그 이전에는 등장한 적 없는 가공할만한 체제를 ‘해방’과 ‘이행’의 이름으로 현실화하여 인권을 넘어 인간의 생명 그 자체를 유린했다. 이 끔찍한 역사 경험을 두고 해방과 이행을 이전 패러다임에 따라 사념할 수는 없었다. 즉 지금과 다른 체제를 만들어낸다는 프로그램을 해방과 이행의 약속으로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셈이다.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바틀비의 대사가 현대철학자들을 매료시킨 것은 이런 맥락이었다. 어떤 체제가 지금과 다른 대안으로 제시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무튼 중요한 것은 현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믿는’ 것이 20세기 후반의 윤리가 된 것이다. 68혁명 혹은 한국의 맥락에서는 90년대 중후반 이후의 상황이 그랬다. 도래할 미래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일단 현재는 아니라는 감각. 아니 현재를 어떻게든 거부하고 정지시켜야 한다는 믿음. 이것이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현대철학의 해방론과 한국의 90년대가 호응한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다시 서두의 학생회 선거 이야기로 돌아가면, 요즈음 들리는 ‘하지 않겠다’는 상투어는 바틀비의 구시렁과 전혀 다른 함의를 갖는다. 이들이 하지 않겠다는 것은 이전 학생회 혹은 학생사회에서 전개된 문제적 상황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재를 거부하고 정지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과 다르다. 이들에게는 저 문제적 상황을 문제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규칙’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현대철학자들이 바틀비에게 본 것은 규칙 그 자체를 무화시키는 부정적 힘이었다.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하지 않겠다’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자가 규칙 전체를 비껴가는 언술이라면, 후자는 규칙에 비춰 행위를 규율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최근 학생들은 매우 촘촘한 규칙을 스스로에게 부과한다. 자치규약이란 미명 하에 최대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적 사례들을 망라하여 세심한 처벌조항을 마련한다. 마치 인간 행위가 모두 예측 가능하며, 저마다의 행위 모두가 규칙을 통해 가늠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렇게 이들은 해방과 이행과 무관한 유토피아를 꿈꾼다. 미지의 장소가 아니라 철저한 기지(旣知)의 세상을 말이다. 그렇게 학생사회는 스스로를 법의 힘에 종속시키고 있다.

그렇게 말의 두께는 점점 왜소화된다. “A는 B이다(A is B)”란 언명에서 A가 B라는 집합 속에 포섭되어 고유성을 잃어버리는 사태를 문제화한 것은 마르틴 하이데거였다. 가령 사과는 과일이라는 언명은 사과가 과일이란 집합에 속하는 하나의 항임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사과가 과일이란 사태는 과연 자명한 것일까? 여기서 문제는 사과가 과일이냐 아니냐는 식물학의 논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과를 과일 집합의 한 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는’이란 조사가, 서양어에서는 ‘is’라는 빈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언어표현 없이 사과는 과일이란 집합의 한 항이 될 수 없다. 언어가 존재(는, is)의 집인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규칙을 규칙이게끔 하는 장치(하이데거가 집합 혹은 논리라는 규칙 성립의 근원으로 포착한 is와 같은)가 있다. ‘하지 않겠다’는 그 장치를 포착할 길 없이 규칙에 순종한다. 그리고 그 규칙에 따라 촘촘한 세부 규칙을 증식해나간다. 최근 학생사회는 이렇게 말의 두께, 즉 말이 내포한 모호함과 결정불가능성을 점점 거부한다. 모든 주어와 서술어는 이미 자명한 채 결합되어 둘 사이에 존재할 법한 회색지대는 말소된다. 당연한 이치로 ‘정치’는 망실된다. 정치란 무엇보다도 법과 대치되는 공간, 즉 규칙이 정지된, 규칙이 포착하지 못한 말과 행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과 행위가 정치라기보다는 법의 자장 속에 포섭된 것이 최근의 대학사회이다. 모두가 누군가의 말을 따라 인간을 공격하고 혐오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다시 해방과 이행을 머금은 말이 절실하다. 그래서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최소한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소심한 호소로 전환되는 날을 기다려본다.


김항 논설위원/연세대·문화인류학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및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경대 종합문화연구과에서 표상문화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된 관심은 문화이론 및 한일 근현대 지성사이며 지은 책으로는 『말하는 입과 먹는 입』, 『인터뷰: 한국 인문학 지각 변동』(공저), 『제국일본의 사상』, 『종말론 사무소』가 있고, 옮긴 책으로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근대초극론』, 『예외상태』, 『정치신학』 등 다수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