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없는 외교사, ‘인간’이 살아 숨 쉬는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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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없는 외교사, ‘인간’이 살아 숨 쉬는 한국사
  • 안정준 서울시립대·국사
  • 승인 2022.04.10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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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반전의 한국사: 동아시아를 뒤흔든 냉전과 열전의 순간들』 (안정준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92쪽, 2022. 02)

 

1950년대 이래의 한국의 역사학, 그리고 역사 교육은 일제가 남겨둔 ‘식민사학’의 잔재를 극복한다는 뚜렷한 목적을 향해 달려왔다. 그 과정에서 ‘한국사’라는 것은 국가와 사회의 정체성을 바로세우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이요, ‘우상’처럼 인식되기도 했다. 고조선으로부터 삼국·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일관된 ‘민족국가’의 계보는 결코 흔들릴 수 없는 하나의 이념처럼 취급되었고, 오랜 세월동안 이러한 믿음은 바로 초·중·고교의 교육과정을 통해서 공고하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불과 수십 년 만에 한국 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다. 현재 ‘우리’라는 범주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집단 내에서의 혈연적·지연적 범주에 한정되지 않는다. 외국에서 다른 교육체계 속에 있던 주민이 한국에 새로 정착하는 일도 허다하며, 인종과 출신지가 다른 아이들이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서 한 교실에 나란히 앉아있기도 하다. 폐쇄적 혈연의식과 인종적 편견을 지양하는 역사학·역사교육이 절실한 시점이다. 

경제 활동과 문화 교류의 자유로운 흐름 속에 국경도 허물어지는 최근의 ‘글로벌 사회’에서 인문학으로서의 역사학이 변화의 과정에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한국사 연구도 일국사적 관점과 지나친 자국 중심의 인식을 되돌아보고 있으며, 연구자들이 사건과 인물을 서술하고 전달하는 방식도 크게 바뀌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변화된 관점과 다양한 시각들을 대중에게 어렵지 않게 전달하려는 차원에서 만들어졌다.    

이 책에서는 먼저 한반도라는 지리적 범위를 벗어나 동아시아라는 넓은 역사·지리적 관점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한국사의 다양한 사건과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일국사 중심의 조각난 지식과 고루한 인식의 너머, 동아시아 국제무대 한가운데 놓인 한국사의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예컨대 13세기 몽골이 거대한 세계제국을 건설했을 당시, 이러한 대격변을 바라보던 고려의 통치자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저 강대한 몽골에 맞서고 국가의 자주성을 끝까지 고수하는 것만을 올바른 외교책으로 생각했을까. 이미 동아시아 전체를 장악한 원 제국이 절대 대세인 상황에서, 또 원을 믿고 왕실을 능멸하는 부원 세력들이 국내에 차츰차츰 늘어만 가는 난국 속에서, 고려 왕실은 이 정치적 난관을 과연 어떻게 풀어나가려 했을까. 

많은 이들은 원 간섭기를 일종의 ‘암흑기’처럼 여기는 가운데, 고려가 강제적으로 자주국의 지위를 상실한 점에만 주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고려는 대원제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의 판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적극적으로 이용했던 모습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고려왕실이 몽골 황실의 딸과 혼인할 것을 요구했던 일이다. 

양국의 혼인관계는 사실 고려 왕실 측의 간절한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당시 원 제국의 쿠빌라이 칸도 당혹케 했던 고려 원종의 기발한 혼인 제안은 거대 제국과의 결탁을 통해 또 다른 지위를 얻어냄으로써 대내외적 난국을 정면으로 돌파하려고 했던, 고려 왕실의 극적인 선택이었다고도 평가된다. 단순히 ‘자주’와 ‘외세’라는 구도로만 이 시기를 바라봐왔던 우리의 상식 속에서 고려 왕실의 이러한 선택은 과연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까. 

한편 이 책은 역사의 주체인 인간, 그들의 생생한 감정과 갈등, 욕망 등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우리가 보통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 교과서가 재미없는 이유는 그것이 긴 시대와 넓은 지역을 멀리서 조망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험 때문에 배우는 과목이 되다보니 주요 사건의 연도와 발생 순서를 도표화하고 문제를 풀기 위한 맥락에만 치중하다 보면, 역사학이 제시하고자 하는 일반인들의 생활상이나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한 논의는 온데간데없고, 암기 노트 속의 의미 없는 숫자와 명칭들만 남곤 한다. 

역사란 결국 인간을 다룬 학문이다. TV 드라마가 재미있고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제각각의 성격을 지닌 다양한 캐릭터의 어우러짐 속에서 사건들이 서로 인과성을 갖는 가운데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 역시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들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의리·영광·명예를 지키기 위한 이야기, 폭력·야망·탐욕으로 점철된 이야기, 그저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이야기들이 하나의 그물처럼 연결될 때 비로소 인간사로서의 역사가 드러날 수 있다. 

8세기에 고구려의 유민으로서 당나라에서 활약했던 고선지라는 인물을 주목해보자. 과거에 그에 대해서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기반으로 당나라에서 맹활약하여 서역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정복하는 등 멀리 한민족의 기개를 떨친 인물, 그러나 고구려 출신으로서 끊임없이 차별을 당하다가 결국 간신들의 모함으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인물」 정도로 알려졌다. 대체로 고선지라는 인물의 공적을 통해 민족적 우수성을 찬양함과 더불어 망국의 설움을 아쉬워하는 정도의 인식에서 소비되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고선지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 중앙아시아로 진출했던 군사적 공적도 있지만, 당나라 사회에서 끊임없이 사회적 차별을 겪었던 ‘경계인’으로서 비정상적 방법으로 출세를 갈망했던 인물이었다. 변변한 가문도 재산도 지지 세력도 별로 없던 상황에서 주변에 아낌없이 뇌물을 뿌리고, 정복지에서의 약탈을 통해 자신의 재부와 위신을 주변에 과시하기도 했던 이중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두드러진 인간적 한계와 비뚤어진 욕망 등을 복합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결여된 상황에서 우리는 그의 화려한 ‘경력’과 민족적 ‘혈통’에만 주목해온 것은 아닐까. 

우리는 결과적으로 지난 수십 년간 똑같은 국가와 사건, 인물들을 배경으로 한, 동일한 내러티브의 ‘대하드라마’를 반복해서 시청해왔다. ‘우리’와 ‘타자’, 선과 악, 애국과 매국이라는 이분법적 틀을 벗어나면 과거에 획일적으로 해석되고 왜곡되어온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또 뻔한 사건들을 순서대로 나열한 통사나 ‘국뽕’으로 점철된 억지 논리에서 벗어나, 다양한 인물들의 선택과 우연이 복잡하게 얽혀 만들어내는 흥미진진한 사건들을 따라가다 보면, 반지성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 인간사와 세상일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날카로운 안목도 얻을 수 있다. 독자들이 이 책에서 펼친 총 7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피도 눈물도 없는 치열한 국제관계 속에서 고뇌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살피고, 진정 ‘국경’이 없는 역사, ‘인간’이 살아 숨 쉬는 역사를 새롭게 만났으면 한다. 


안정준 서울시립대·국사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고구려사를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아시아라는 역사·지리적 공간을 배경으로 한 고대사 연구를 지속하고 있으며, 대중의 역사 인식과 역사학의 사회적 역할 문제 등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공저),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공저) 등이 있으며, JTBC 「차이나는 클라스」, 「만인만색 역사공작단」 팟캐스트 등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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