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 침공’이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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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침공’이라는 말
  • 조원형 서울대학교·언어학
  • 승인 2022.04.03 13:1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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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형 칼럼]

얼마 전부터 ‘문과 침공’이라는 말이 곳곳에서 들리고 있다. 수능에서 자연계(이과)와 인문계(문과) 구분을 하지 않게 되면서 수능 시험 성적이 좋은 이과생들이 그동안 주로 문과생들이 지원해 왔던 학과에 지원해 문과생들을 제치고 합격하는 풍조를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하필 전쟁에 빗대어 ‘침공’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까. 물론 전쟁과 관련된 어휘가 일상생활 속에서 은유적 표현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예컨대 ‘전략’이나 ‘작전’ 같은 말들은 일상 어휘가 된 지 오래다. 더구나 입시 경쟁을 마치 전쟁과도 같은 모습으로 치러 온 것이 대한민국의 오랜 현실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문과 침공’은 어쩌면 현실을 가장 잘 반영한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침공’이라는 심각하고 과격한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쓴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전쟁과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 탓에 생기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뜻하고 안전한 방 안에서 남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나 영상 매체 같은 것을 통해서만 전쟁을 접하게 된다면 부지불식간에 참혹하기 그지없는 전쟁과 폭력에 대한 감수성 또한 무뎌지기 쉽다. 30여 년 전에 일어난 걸프전 이래로 전쟁 소식이 방송 영상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시대에 살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내가 당장 죽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니라 그저 ‘텔레비전 화면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로 여기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쟁은 결코 입에 쉽게 담을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자행한 바와 같이 한쪽이 다른 쪽을 부당하게 침략하는 것을 가리키는 ‘침공’은 더욱이 쉽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한국 땅에서 ‘침공’이라는 말이 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쓰인다는 것을 실제로 침공을 겪어 고통받는 사람이 알게 된다면 어떤 심정이 들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당장 내 머리 위로, 내 가슴으로 침략자의 포탄과 총탄이 날아와 내가 다치고 죽을 수 있는 게 침공이 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스포츠 중계방송 같은 데서도 선수들의 경기를 전쟁에 빗대는 말들을 곧잘 쓰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경쟁 이전에 ‘교육’이라는 더 큰 목표와 대의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입시는 승패를 가르는 것이 목적인 스포츠와 다르다. 입시 단계에서는 경쟁이 불가피할지 몰라도 입시는 어디까지나 교육을 위한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는다. 교육 현장은 경쟁의 원리를 넘어 연대의 원리로 학생들을 이끄는 곳이어야 한다. 경쟁을 넘어서는 협력의 가치, 전쟁을 극복하는 평화의 가치를 학생들에게 일깨워 주는 곳이어야 한다는 점 또한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기에 적어도 교육 현장에서만큼은 아무리 치열한 경쟁이 일어난다 해도 이를 전쟁에 빗대는 것은 애당초 부당하다.

그리고 그 이전에, 그동안 주로 문과생들이 지원해 왔던 학과에 이과생들이 지원하는 것이 과연 ‘침공’이라고 비난받을 만큼 잘못된 일인지도 의문이다. 침공은 전쟁 관련 행위 중에서도 질이 특히 나쁜 행위가 아닌가. 전쟁에 대한 감수성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심사숙고 끝에 전공 학과를 정하고 진로를 설계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부정적인 표현을 쓰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제 고등학교에서 문과와 이과를 더는 구분하지 않기로 한 만큼 수능 시험의 선택과목 등에 남아 있는 과도기적인 문과, 이과 구분 방식(즉 사회탐구와 과학탐구 영역의 선택과목제)도 앞으로 사라지거나 적어도 개선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어쩌면 ‘문과 침공’이라는 말 자체를 더는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하지만 입시를 전쟁에 빗대고 수험생을 전투원처럼 여기는 풍조를 근본적으로 타개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부당한 말이 등장해서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이러한 일을 막을 수 있도록 혹시나 그동안 교육 현장에서 무비판적으로 써 왔던 전쟁 관련 표현들이 또 없는지 지금부터라도 돌아보았으면 한다.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학교·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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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훈 2022-04-06 13:33:21
조교수님,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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