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빙’을 위한 인문학적 상상력과 그 통합적 사유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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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빙’을 위한 인문학적 상상력과 그 통합적 사유구조
  • 류근조 논설고문/중앙대학교 명예교수·시인
  • 승인 2020.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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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에세이]

며칠 전 집필실에서 일과를 끝내고 귀가를 서두를 무렵 어디선가 정체불명의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구체적인 내용인즉슨 우연히 필자가 발표한 글 『또 하나의 미래, 힐빙 시대의 도래』(국제 힐빙 학회, 2002년, 북 갤러리)에 게재된 필자의 논문을 읽고서 앞으로 자기 회사의 미래지향적 성장과 발전을 위해 기존의 경영마인드에 인문학적 상상력의 접목을 시도해보고 싶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지금은 벤치마킹 또는 아웃소싱 등의 용어를 굳이 인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통섭과 융합의 시대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1960년대 시카고 대학의 Zeda 교수가 크리스프(crisp; all or nothing) 기준에 반한 퍼지(fuzzy: 적당주의) 이론을 제기한 이래 오늘날 시대의 추세는 어떠한가.

언뜻 믿기지 않는 면도 없진 않으나 ‘인간은 기계를 닮고 기계는 인간을 닮아야 산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옛 대학 신입생 시절 알고 있던 교양적 학문 수준으로 보면 ‘공학도는 적어도 셰익스피어를, 반면에 인문학도는 적어도 열역학의 제2법칙쯤은 알아야 한다는 당시의 당위론적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서 말이다. 실제로 서로 다른 학문끼리 그 경계의 영역을 넘나들며, 이를테면 현재 동물생태학적 상상력을 전자제품 혹은 기타 생활제품 분야에 접목시켜 엄청난 성과를 이어가고 있음 또한 현실이 아닌가.

 최근에 이뤄진 유명한 신학자와 진화 생물학자 간의 대담 경우만 보아도, 이 글의 논지論旨 상上 (약간의 외연확대의 시도에 해당되는) “종교와 과학적 근본주의는 서로에게 모두 위험하니 종교와 과학은 서로 잡아먹힐 것 같다는 공포를 극복하라“는 공개적 주문까지도 있었기에 더욱더 앞의 이론적 주장이 모든 분야의 범주 확대에 대한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 같은 대학자들의 거대담론에 비하면 아주 소박하고 미시적 고찰이긴 하나, 필자는 최근에 앞서 적시한 대로 (똘레랑스: 지구적 공동체사회) 차원에서 현대문명의 발달, 과학의 일방적 항진亢進으로 인한 생태환경 파괴에 따른 ‘힐빙’[heal<치유>+well<복지>]의 삶의 모색을 위하여 그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 바 있다.

즉, ‘한국 현대시의 시대별 언어치환, 그 통시적 대응양상’이란 졸拙 논문에서 1960년대를 기점으로 현재까지 환경변화에 따라 시대별로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언어적 감수성을 전제로 현대시의 변용양상 그 정체성을 비교적 면밀하게 들여다본 것이다.

하지만 이 논문이 인식론적 차원에서 지식의 체계적 통일을 염두에 두고 쓴 논문형식의 글이라면 본 에세이는 보다 포괄적이고 유연하고 알기 쉽게 그 외연外延 안에 스미어 있는 필자 나름의 사유구조를 바탕으로 쓴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현재도 이 시대에 와서는 언어적 치유가 단지 ‘힐빙’ 차원의 일부에 그치는 것이 아닌, 오히려 현대 문명에 의해 파괴되고 오염된 인간 삶의 터전인 지구환경의 회복을 위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목적 지향적이고도 근원적인 문제라고 보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즉, 이 같은 정서적 정신적 치유 없이는 여타의 가시적이고 인위적인 노력 그 자체도 완전한 의미를 지니지는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이 글의 논제로 설정한 이른바 ‘힐빙’을 위한 인문학적 상상력 그 통합적 사유구조가 당위론적이고 목적 지향적인 관점에서 볼 때  단계별로 어떤 과정을 거쳐 극복되고 실현돼야 하는지를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쉽고 간명하게 당대의 몇 문제작을 통해 설명해 보려고 한다.

시인 이형기의 ‘달의 자유’와 시인 유하의 ‘나무를 낳는 새’ 그리고 시인 차창룡의 ‘나무 물고기’가 그 대상이다.

         이 아파트 단지에서는
         아무도 달을 쳐다보지 않는다
         증권시세표가 아닌 달
         그래서 달은
         대낮에도 15층 옥상에 내려와서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워서
         오 자유여
         이제야 제시간 제 마음대로 즐기는
         실업자가 된 달이여

           -이형기 시집 『죽지 않은 도시』 중에서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인류의 과학적 발전에 힘입어 달에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이후, 달은 옛날처럼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을 간절하게 이어주던 그래서 믿음이 삶을 규제하여 공동선共同善으로 이끌어 주던 신비로운 대상이 아니다. 이따금 모래 폭풍이나 휘몰아치는 거대한 암석 덩어리에 불과할 뿐…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경제적 가치나 효용성만을 좇는 현대문명에 대한 통렬한 성찰이 깃든 풍자 속에 꿈을 잃은 인간들의 허전함과 삭막함마저 배어 있는 그런 詩다.

          찌르레기 한 마리 날아와
          나무에 키스 했을 때
          나무는 새의 입 속에
          산수유 열매를 넣어주었습니다

          달콤한 과육果肉의 시간이 끝나고
          어느 허공을 날던 새는
          최후의 추락을 맞이하였습니다
          바람이 떨어진 새의 육신을 거두어 가는 동안
          그의 몸 안에 담겨 있던 산수유 씨앗들은
          싹을 틔워 무성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유하시집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중에서

이 시는 새와 나무의 만남을 통해서 쉽고도 명징하게 세상에 서로 무관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은연중에 깨닫게 해주고 있다 이른바 우주 속에 내재한 순환적 삶의 질서와 원리를 깨닫게 해주는 그런 상생시相生詩라고 할 수 있다.

          물고기는 죽은 나무의 몸을 얻어
          영원히 물고기가 되고
          나무는 죽은 후 물고기의 몸을 얻어
          여의주 입에 물고
          창자를 꺼내고 허공을 넣으니
          물고기는 하늘을 날고
          입에 문 여의주 때문에 나무는
          날마다 두들겨 맞는다

          여의주를 뱉으라는 스님의 몽둥이는 꼭
          새벽 위통처럼 찾아와 세상을 파괴한다
          파괴된 세상은 언제나처럼 멀쩡하다
          오늘은 이빨 하나가 부러지고 비늘 하나가
          떨어져 나갔지만…

            -차창룡 시집 『나무 물고기』 중에서

이 시에서는 선과 악, 호불호好不好 같은 2분법적 사고가 통하지 않는다. 단지 시인 자신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의식의 해체를 통해 대상 자체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구도적이고 초월적 사유가 지배하고 있을 뿐…

요약하면 앞의 유하의 시가 관계론적이고 상생적 의미로 읽힐 수 있다면, 이 시는 그 단계를 훨씬 뛰어넘는 통합적 관계설정을 전제하고 있다. 즉, 한 덩어리로 응축된 한 편의 시적 의미망 안에 실핏줄 하나까지도 유기적인 구도적 사유를 통한 초월적 세계를 이뤄내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대비가 된다.

詩는 유기적 감수성, 상상력과 직관을 필요로 한다. 지진계와 안테나의 역할은 물론 때로는 인간회복과 정신적 치유를 위하여 원예가나 기상대원 또는 간호사의 역할까지 해 낸다.
  
그리고 참된 절망을 노래할망정 헛된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는 앞서 인용 적시摘示한 바 있는 필자의 논문은 1960년대 이후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생태학적 변화에 따라 밀어닥친 위기에 대한 진단적 의미의 언어적 감수성의 경고 어린 학술적 보고서의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본 에세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연성蓋然性을 전제한 글로벌 차원의 인문학적 상상력과 통합적 사유로 병든 지구환경을 치유하고 또 극복해 나가야 할 방안과 방향성을 나름 제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시 ‘달의 자유’에서는 과학의 일방적 발발에 따른 비시적非詩的 도시화와 같은 열악해진 환경변화가 생태학적 한계를 훨씬 뛰어넘고 있다는 그 심각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시 ‘나무를 낳는 새’에서는 대립적 지배논리가 아닌 상생적 관계설정의 중요성을, 끝으로 시 ‘나무 물고기’에서는 나아가 위 다른 두 편의 시적 구도상構圖上 상위개념의 극복 단계로서 시적 상상력과 사유구조를 보여줌이 그렇다.

아니,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정신이 수반되지 않는 건강한 육체를 생각할 수 없듯이 '힐텍'(heal teck)을 앞에서 이끌 견인차牽引車로서 ‘힐빙’ 차원의 구심력을 지닌 문화적 자장磁場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전 인류적 공동인식과 노력은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고 추구해 나가야 하는 필요조건이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류근조 논설고문/중앙대학교 명예교수·시인

중앙대 국문과 명예교수로 시인이자 인문학자. 1966년 『문학춘추』 신인상으로 등단. 저서로 『날쌘 봄을 목격하다』, 『고운 눈썹은』 외 『지상의 시간』, 『황혼의 민낯』, 『겨울 대흥사』 등 여러 시집이 있다. 2006년 간행한 『류근조 문학전집』(Ⅰ~Ⅳ)은 시인과 학자로서 40여 년 동안 시 창작과 시론, 시인론을 일관성 있게 천착한 업적을 인정받아 하버드 대학교와 미시건 대학교의 소장 도서로 등록되기도 했다. 현재는 집필실 도심산방(都心山房)을 열어 글로벌 똘레랑스에 초점을 맞춰 시 창작과 통합적 관점에서의 글쓰기에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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