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만발한 왜군 본거지, 서생포 왜성
상태바
벚꽃 만발한 왜군 본거지, 서생포 왜성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2.04.02 16: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류혜숙의 여행이야기] 울산 울주군 서생포 왜성

 

왜성의 특징은 성벽이 많이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서생포 왜성은 16세기 말 일본 성곽을 연구하는데 중요 자료가 되어 일본 학자들이 자주 찾는다.  

산마루가 희다. 마을을 벗어나자 시야가 훤해지면서 작은 밭들이 펼쳐진 경사지와 정면에 오뚝 솟은 언덕 같은 산을 대면한다. 저 산정에 왜군이 쌓은 성이 있다. 소나무에 가려져 성은 보이지 않지만, 그 성에서 살아온 벚나무는 매년 꽃을 피워 성의 위치를 알린다. 서생포 왜성이다. 꽃이란, 왜 언제나 아름답나.  

 

               내성의 주 입구. 성문 안쪽에 유사시 공격을 위한 사각의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비탈진 땅을 오른다. 왼쪽에는 길을 따라 축조된 돌들이 보인다. 경사면 성벽이다. 이미 외성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길이 한번 꺾이면 주 통로에 들어서고, 다시 한 번 꺾이면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듬성하지만 유난스러운 참꽃이 음지에서 빛난다. 산을 오르고 있다는 느낌이 확연해지면서 걸음은 느려진다. 그리고 곧장 치고 오를 듯 급경사가 시작되는 곳에 형태가 고스란히 확인되는 성문이 나타난다. 내성의 주 출입구다. 양쪽에서 사선으로 길게 내려 긋는 성벽은 칼로 내리쳐 깎아놓은 듯하다. 여기서부터 길은 직각으로 꺾였다가 다시 직선으로 오른다. 올려다보면 나무들이 열어놓은 하늘만 보인다. 오르면 소곽이 나타나고 길은 다시 꺾이고, 오르면 다시 소곽이다. 주 통로에 들어선 순간부터 산 정상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길은 꺾임의 연속이다. 꺾어진 곳에는 사각의 공간이 숨어있고, 꺾어 들어가기 전에는 저 앞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이런 굴절된 진입로는 성 내부를 볼 수 없게 하고 유사시 사방에서 공격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든 것이었다. 지형지세와 영악한 머리가 만들어 낸 기막힌 평면이다. 나무들이 우듬지를 드러낼 때, 동쪽을 바라본다. 가까운 밭들과 바다로 향하는 회야강과 진하해수욕장의 명선도와 먼 바다까지, 시야는 거침없이 열려 있다. 이 산이 이리 높았나. 

 

왜군이 모두 물러난 후 서생포왜성은 아군의 진성으로 이용되었으며 지금은 벚꽃 피는 봄날 현장학습장으로 많이 이용된다. 

서생포 왜성은 ‘축성의 달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것이다. 원래는 경상좌수영 휘하의 서생포만호진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강과 바다를 접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당시 한산대첩과 진주성 전투에 패한 왜군은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쫓기게 된다. 전황이 불리해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국 전군의 철수를 명령했다. 1593년 초다. 이에 일본군은 경상도 해변에 20여기의 성을 쌓고 농성에 들어간다. 서생포 왜성은 그때 지어진 것으로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것이었다 한다. 선조 27년인 1594년에서 1597년 사이, 사명대사는 이곳에서 4차례에 걸쳐 가토 기요마사와 담판을 벌였다. 일본의 무리한 요구로 협상은 결렬되었고, 그것은 결국 정유재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서생포 왜성은 원래 경상좌수영 휘하의 서생포만호진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1593년에 왜군의 제2선봉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가 축성했다. 
   중심곽에서 출격용 소곽으로 연결되는 엇물림형 출입구. 소곽에는 장군수 우물터가 흔적으로 남아 있다. 

산 정상부 성곽은 소곽과 중심곽, 천수대, 그리고 다양한 출입구와 석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에는 ‘장군수’라는 우물자리가 허물어진 돌들에 묻혀 흔적으로 남아 있고, 가토가 기거했던 천수각 자리에는 돌계단이 비교적 선명하게 잔존해 있다.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쳐진 네모진 공간들은 굴절되고, 엇물리고, 위장된 길로 연결되어 있다. 이면을 알 수 없는 높은 성벽, 숨 막히는 미로와 같은 성이다. 그들은 산 정상에 이 복잡한 구조의 내성을 쌓고 동쪽의 경사면을 이용해 부곽을 배치하고, 그 아래로 해안까지 길고 넓은 외성을 두었다. 바다에 인접한 성은 물자와 인력의 수송에 용이했고, 때문에 이 성은 전쟁 기간 동안 왜군의 중요 거점이 되었다. 외성의 아래쪽은 마을이 조성되면서 거의 허물어져 그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산정을 향하는 성벽은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다. 이 성에서 왜군은 임란동안 가장 오래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진 아래의 마을 진하. 왼쪽이 회야강 하구로 ‘울산서생진지도’에는 수군의 배를 관리하는 주사가 회야강 하구에 묘사되어 있다.

이 성에서 왜군이 물러간 것은 선조31년인 1598년, 정유재란 때다. 왜군이 모두 물러난 후 서생포왜성은 아군의 서생포동첨절제사(西生浦同僉節制使)가 머무는 진성(鎭城)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저 아래 마을은 진하가 되었다. 진하(鎭下)는, 진(鎭)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진하라는 이름은 조선 정조 때와 고종 때의 기록에서 발견되는데 누가 처음 진하를 개척하였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고 한다. 진하항은 회야강 하구 가장자리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는 마을 뒤편의 서생포 왜성까지 배들이 접안했다고 한다. 아마 오래전에는 마을 일부가 강 하구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울산서생진지도’에는 수군의 배를 관리하는 주사(舟師)가 회야강의 하구에 묘사되어 있다. 회야는 ‘논배미를 돌아서 흐르는 강’이라는 의미이다. 서생에서는 일승강(一勝江)이라고 불렀다. 이는 임진왜란 때 딱 한 번의 교전으로 우리 조선군이 승리했다고 얻은 이름이다. 왜군은 퇴각하면서 성을 쌓는 데 동원되었던 조선인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들은 일본의 3대 성으로 꼽히는 가토의 구마모토 성을 축조하는 데 동원되었고, 그 후손들은 ‘서생’이라는 성씨로 구마모토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