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유교문명의 성세를 꿈꾼 이상주의자 '남효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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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교문명의 성세를 꿈꾼 이상주의자 '남효온'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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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남효온 평전 : 유교문명의 성세를 꿈꾼 이상주의자의 희망과 좌절 | 정출헌 지음 | 한겨레출판 | 420쪽

 

조선은 개국 이후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친족 간에 살육이 난무하는 극심한 정치적 갈등을 겪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세조의 왕위찬탈 쿠데타인 계유정난이다. 반정이 성공하자 한명회, 권람, 정인지, 정창손 등 훈구공신들은 세조 이래 수십 년 동안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15세기 중반 무렵 성종이 치세하던 시절, 이십대의 젊은 유생 남효온은 성종의 조부인 세조의 왕위계승 과정의 불법성을 지적한다. 은폐된 과거사를 들춰낸 죄로 그는 중앙정계에 진출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만다. 이 책은 ‘아웃사이더’의 시선에서 유교문명국가를 꿈꿨던 이상주의자 남효온의 삶을 조명했다.

조선 전기의 유교 지식인인 남효온은 매월당 김시습과 더불어 ‘생육신’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명이다. 그가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 것은 스물다섯에 소릉복위 상소를 올리면서부터다. 남효온은 새 시대를 향한 기대와 이전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함께 공존하던 시절, 세조 왕위계승의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과감한 주장을 던졌다.

그는 1478년 세조에 의해 폐서인된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신원을 복권하고 그의 능을 복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그 누구도 함부로 발설하지 못했던 세조의 패륜적 처사를 공론의 장에 올리고, 집권 세력의 심기를 거스른 대가는 매우 혹독했다. 남효온은 훈구공신들에게 사제의 도리도 모르는 ‘미친 유생’이라고 낙인이 찍혔고,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중앙 정치 무대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이처럼 조선 전기의 정치구도는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갈등과 대립으로 설명되는데, 이는 성종 시대에 접어들면서 본격화되었다. 남효온은 서른아홉이라는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간고한 선비의 삶을 살게 된다. 그는 방외인으로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자신과 뜻을 함께했던 신진사류 벗들 혹은 김시습과 같은 시대의 선배들과 시주를 나눴다. 또 ‘경지재’라 이름 지은 자신의 은거지에 머무르며 성리학 담론을 비롯해 시대를 증언하는 기록들을 여러권 집필하면서 자조와 시름, 울분과 분노를 달랬다.

그가 선택했던 은둔과 방랑의 삶은 자신의 의지라기보다 소릉복위 상소를 올린 이후 당대의 기성세대였던 훈구대신의 배척을 받아 강제된 삶이었다. 때문에 그가 살아생전 남긴 시문들은 유유자적함이나 여유로움과는 거리가 먼, 이른바 울울하고 착잡한 정감의 파토스로 가득했다. 그렇다고 남효온을 현실 정치와 절연한 채 방랑자로서의 삶만을 살다 간 비운의 인물로만 봐서는 안 된다. 그는 오히려 정국이 돌아가는 세태를 예의주시하며, 왜곡된 권력과 은폐한 역사의 진실을 복원하고자 애썼다.

남효온과 그의 신진사류 사우들이 꿈꿨던 원대한 이상은 허황된 망상에 그치지 않았다. 평생 낙척불우한 삶을 살았던 남효온과 벗들이었지만, 세월은 올곧은 시대정신으로 불의의 시절을 견뎌낸 그들의 편이었다.

살아생전에는 훈구공신들의 비난과 배척을 받았지만 중종이 새로 즉위하면서 조정에도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가 그리도 꿈꿨던 소릉의 복위가 실현되는 한편, 억울하게 죽은 자신의 신원도 밝혀져 남효온은 좌승지에 추증된다. 아울러 사후 299년이 지난 뒤에는 단종에게 충절을 바친 인물들을 모신 장릉배식단에 함께 배향되고, 생육신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얻었다.

남효온이 전국을 떠돌며 지은 시문들도 속속 수습이 되어 『추강집』이라는 이름으로 엮여 세상에 전해졌다. 비록 연산군 대에 갑자사화를 겪으며 후사가 끊긴 그였지만, 외손들의 정성과 후배들의 노력에 의해 남효온이라는 이름은 민멸되지 않고 지금까지도 역사에 족적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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