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시대 조선이 경험한 문명의 복잡성과 이중성에 대한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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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시대 조선이 경험한 문명의 복잡성과 이중성에 대한 시론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3.27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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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신간]

■ 『숙종 시대 문명의 도전과 지식의 전환』 (김선희 지음, 한국학중앙연구원, 300쪽, 2022. 03)

 

이 책은 ‘중화(中華)’라는 단일한 문명의 이념과 ‘서학(西學)’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자원이 동시에 작동하던 숙종 대 조선의 문화적·정치적·지적 도전의 과정을 다면적으로 살핀 연구서이다.

숙종 대 조선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관점 혹은 17~18세기 조선이라는 그림을 이루는 하나의 조각을 제안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 책은 영·정조 시대로 대표되는 18세기 후반에 집중되어 있는 조선 후기 연구의 기반을 넓히고 다각적인 관점에서 조선의 지적, 정치적 변화들을 읽어내기 위한 시론적 작업으로의 의의를 지닌다.


▶ 숙종 시대가 가지는 의미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에 해당하는 숙종 시대는 이후 영·정조 시대의 지적 폭발을 예비하기 위한 지적 분화의 시기였다. 또 조선의 정치·경제·학술적 분화와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의 시대로도 평가받는다. 

숙종(肅宗, 재위 기간 1674~1720)이 집권했을 때는 정치 세력들이 각 당파로 분화하여 강력한 긴장을 형성하던 시기였다. 숙종은 전면적인 정권 교체를 함으로써 당파 간 긴장을 완화하거나 분쇄하고자 했다. 이때 숙종이 택한 환국(換局)은 붕당 간 경쟁과 긴장을 활용해 왕이 정국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전략이었다. 경쟁하는 세력들을 단번에 조정하여 권력을 이동시킴으로써 경쟁하는 신권(臣權)을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숙종은 온화했던 선왕 현종과는 달리, 강력한 문제 해결의 의지로 반대를 돌파할 수 있는 강단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그만큼 많은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의지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숙종은 내적으로는 왕조의 정통성과 왕권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외적으로는 강희제(康熙帝) 치세의 청으로부터 문화·기술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 황단, 숙종이 주목한 새로운 정치 공간

숙종은 궁궐 안에 멸망한 명(明)을 기리는 제단인 황단(皇壇, 대보단)을 설치함으로써 조선이 문명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신호를 발신하고 공표할 장(場)을 마련한다. 이는 언뜻 청에 대한 원망과 명에 대한 존숭으로 보이지만, 숙종은 대보단의 상징성을 명의 유민(遺民)이나 청이 아니라, 오로지 조선 내부에서 경쟁하고 갈등하는 정치 세력들에게 발신했다. 숙종이 원한 것은 청을 향한 복수설치(復讐雪恥)도, 명을 향한 재조지은(再造之恩)도 아닌, 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내부적 공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명의식을 정치 문법으로 구축해 분열과 긴장을 돌파하려 한 것이다. 

황단은 문명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자임 속에서 이념적으로 극대화된 국가 정체성을 조선 내부에 투사하고 확산하고자 했던 숙종의 정치적 방식과 태도를 선명히 보여준다. 17세기 말 ‘오랑캐’ 청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던 조선은 청을 타자화하면서도 반영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숙종은 청과의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도 조선 내부에서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황단은 그 정통성을 조선 내부로 발신하는 정치 공간이었으며 무엇보다 문명의 승계와 전이를 정당화하는 상징적 우주였다. 

 

▶ 새로운 문명의 담지자 서양과 조우하다 

숙종 대는 존주대의(尊周大義) 혹은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으로 대표되는 문명의 유일성이 조선 내부의 정치적·지적 실천을 강력히 규제하던 이념의 시대지만, 동시에 예수회 선교사로부터 들어온 새로운 지식, 서학(西學)으로 인해 중국 이외에 복수(複數)의 문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경험하기 시작한 분기점이기도 하다. 

서학(西學)이란 일반적으로, 기독교와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다양한 자연학과 자연철학, 수학과 기술 등을 포괄하는 ‘서양의 새로운 학술과 문물’을 의미한다. 보다 포괄적으로 말하면 서학은 16세기 후반 중국에 들어온 예수회 선교사들의 전교 활동부터 20세기 초 개신교 선교사들의 번역 활동에 이르기까지, 300여 년 동안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에 유입된 서양 학문을 가리킨다. 서학은 중국과 서구 유럽이 무기나 상품이 아니라 ‘세계관’과 ‘지식’으로 만나 교류한 학술적 조우의 결과였다. 

숙종 대에는 연행(燕行)을 통해 조선의 지식인들이 서양인과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태도로 직접 교류할 수 있었다. 이기지의 연행록 『일암연기(一菴燕記)』를 보면, “저는 천지의 동쪽 끝에 살고 당신은 서쪽 끝에 사는데, 지금 이곳에서 얼굴을 마주하니, 어찌 하늘이 베푼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영묘한 마음은 그대와 내가 다르지 않을 것이니 마음이 통한다면 어찌 거리가 멀고 가까운 것을 따지겠습니까?”라는 구절이 나온다. 당시 조선인들은 수준 높은 서양 문물을 경험하고 나서 서양인이 오랑캐가 아니라 조선인과 마찬가지로 영묘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 서로 통할 수 있는 문명의 담지자임을 받아들인 것이다.

 

▶ 자명종과 망원경, 문명의 유일성과 복수성 

자명종은 1631년(인조 9) 정두원에 의해서 조선에 처음 들어왔고, 곧 모사본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곧바로 그 기술이 응용되거나 활용된 것은 아니다. 자명종뿐 아니라 천문의기들은 조선의 지적 혹은 기술적 진보를 위한 자원이었다기보다는 문명의 자원, 즉 예악을 흥기하는 도구에 가까웠다.

서학의 지적 자원을 이념이 아니라 지적인 차원에서, 세계관적 전환의 차원에서 활용했던 것은 재야의 학자들이었다. 자명종과 함께 조정과 지식인들의 관심을 끈 서양 물건, 천리경(千里鏡) 혹은 원경(遠鏡)으로 불리던 망원경(望遠鏡)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익은 일찍부터 망원경과 그 원리에 관심을 가졌고, 천체 관측에서 망원경의 역할과 기능에 신뢰와 기대를 가졌다. 이익에게 망원경은 단지 신기한 기물이 아니라, 서학 연구를 통해 실질적인 관측이나 경험이 지식을 정화하는 데 중요한 방법이라고 인식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 책은 숙종시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황단과 자명종을 들었다. ‘황단’은 왕정의 정통성을, ‘자명종’은 서양 지식의 수렴을 의미한다. 숙종 대 동양과 서양의 이질적인 문명의 만남은 새로운 변화와 지식의 전환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지적 에너지와 긴장은 이후 영·정조 시대에 지적 폭발이 이루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명의 정당성과 청의 실용성 사이에서 숙종 시대가 추구했던 문명의 도전과 지식의 전환을 비교해 살펴본다면, 새로운 각도에서 조선 후기의 역동성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 김선희 이화여대·철학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에서 동서비교철학·한국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서비교철학의 관점에서 16세기 이후 중국에서 이루어진 동서양의 지적 조우와 변용 및 당대 유럽에서 이루어진 역방향의 지적 전환을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익, 정약용, 최한기 등 조선 유학자들의 철학적 도전을 다각도에서 검토하고 있다.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실實, 세계를 만들다』, 『마테오 리치와 주희, 그리고 정약용』 등의 연구서와 『하빈 신후담의 돈와서학변』 등의 역서, 『나를 공부할 시간』, 『8개의 철학 지도』 같은 교양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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