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와 평가의 시대 속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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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와 평가의 시대 속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무엇일까
  • 김지현 기자
  • 승인 2020.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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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성과지표의 배신 | 제미 멀러 지음 | 김윤경 옮김 | 궁리 | 276쪽

 

우리는 고객으로서 상품을 구매하러 마트에 가거나 볼 일을 보러 은행이나 고객센터에도 방문한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우린 별점(1~5개)이나 만족도(1~10점) 평가 요청을 일상적으로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현대인의 삶은 평가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중에서도 평점과 평가의 문화가 가장 견고하게 자리 잡은 곳은 우리의 일터, 조직이다. ‘인사고과’라 불리는 평가 제도에 따라 노동자의 근무조건과 상태가 달라지기에 많은 이들이 이 평가 시스템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성과 측정·평가제를 통해 성과를 창출하려는 시도는 우리나라 일반 기업뿐 아니라 공무원·공공기업으로도 확대되는 추세다.

이 책은 교육, 의료, 경찰, 군대, 비즈니스, 금융, 정부기관, NGO 단체 등, 다양한 유형의 조직과 사회 곳곳에서 활용되는 ‘성과 측정지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성공의 열쇠는 성과 평가에 있다.’ ‘숫자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신뢰할 수 있다.’ 오늘날 여러 조직에서 신념처럼 받아들이는 믿음이다. 그러나 성과를 수치화하는 데 너무도 집착한 나머지, 측정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현상이 사회에 만연하게 됐다. 이것을 이 책의 저자, 제리 멀러는 '측정 강박'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정량적 측정의 위험성에 대해 분석한 이 책은 미국과 영국의 교육계와 의료, 비즈니스계에 중요한 문제의식을 이끌어냈으며, 2019 하이에크상 최종 후보 도서에 이름을 올렸다.

이 책은 저자가 사립대학교 학과장으로 있으면서 경험한 성과 측정과 평가 문화에서 비롯됐다. 저자가 몸담은 대학이 중미고등교육위원회(MSCHE, 미 교육부의 권한을 위임받아 운영된다)라는 인정기관의 평가를 받으면서, 평가기관에서 제시하는 기준에 맞추기 위한 업무가 과도하게 늘어났다. 인정기관의 평가 결과가 대학 행정에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그는 강의와 연구의 질 향상, 교수진 멘토링과 같은 기존의 임무보다는 평가 지표를 실행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쏟게 됐다. 상부에서 내려온 통계 관련 질의에 끝없이 답변해야 했고, 다양한 도표, 그래프, 수치를 덧붙여 평가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대학 행정처는 정보의 수집과 처리를 전담하는 데이터 전문가를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됐다.

이것은 비단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측정을 잘하는 것을 기준으로 성장을 정의하는 기업 조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의료 분야에서도 의료 서비스를 평가하는 다양한 비영리, 영리기관이 있다. 의료 기관에 대한 “평점”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은 이제 국내외의 보편적인 현상이 됐다. 그러나 이러한 의료 평가 지표로서 “사망률” 데이터가 중요해지면서 특정 병원, 의사들이 위험한 환자의 수술을 아예 기피하는 현상을 보인다. 일부 경찰관은 상부에 보고할 “범죄 발생률”을 낮추려고 실제 범죄를 신고하지 않거나 경범죄로 처리하는 방식 등으로 데이터를 왜곡한다. 저자는 이렇듯 교육, 의료, 경찰, 군대, 비즈니스, 금융, 정부, 자선사업 및 대외원조 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형의 조직에 잠식한 “측정 강박”의 오용 사례와 부작용, 편법 현상 등을 들어 “성과 측정지표”의 불완전성을 조목조목 분석한다.

물론 성과 측정은 필요하다. 그러나 평가 기준이 되는 표준화된 지표가 있고, 그 결과에 따라 구성원들이 보상과 처벌을 받는다면 사람들의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표준화된 지표는 당장에 측정하기 쉬운 것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과의 계량화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중압감은 통계에 대한 꼼수와 조작, 정보 왜곡, 장기적 전망 상실 등의 부작용을 초래한다. 조직의 미래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저자는 측정 강박 현상이 널리 퍼지게 된 배경을 경제역사학자의 눈으로 종합하고, 성과 측정지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를 검토해보자고 권한다. 성과지표를 누가, 어떻게 개발하는가. 성과지표를 언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측정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면 과연 책임성이 증대될까. 조직과 구성원의 성장을 가로막는 지표는 무엇이며 득이 되는 지표는 무엇일까. 책에는 조직의 기능을 위협하는 잘못된 측정 사례부터 나아가 측정지표를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까지, 수많은 조직 현장에서 지금 당장 적용할 수 있는 논점과 사례들로 가득하다. 조직행동학, 공공행정학, 사회학, 경영학, 경제학, 교육학 등 다양한 분야를 광범위하게 연구한 저자의 통찰력 있는 시선, 그리고 성과 측정에서 숫자가 말해주지 않는 그 이면의 이야기들이 책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풍부한 사례와 함께 실려 있다. 이 책은 조직의 경영자, 관리자, 조직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좋은 참고서가 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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