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어야 대통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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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있어야 대통령이 된다
  •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
  • 승인 2022.03.27 17: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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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명의 생활에세이]

 

한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될까? 대통령은 하늘이 점지해 준다는 말이 있다. 무슨 종교적 믿음이 아니다. 이 말은 누가 대통령이 될지 선거 막바지의 여론 조사 결과가 아니라면 아무도 미리 예측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이 아이가 자라서 대통령이 될지 거지가 될지 미리 알 수 없다. 데모하다 시민운동 지도자가 된 사람이 대통령이 될지 아니면 성추행 혐의로 망해버릴지 아무도 미리 알 수는 없다. 그만큼 대통령이 되는 길은 수많은 상황과 우연한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이번 대통령 선거를 보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는데, 한국에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스토리라는 말은 한글문화연대 창설자답게 우리말로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해 보니 ‘특별한 화젯거리’ 정도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말 한 낱말로는 힘들어서 그냥 스토리라 하기로 한다. 

이번에 대통령이 된 윤석열이 특별한 스토리를 가진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니 설명하지 않겠다. 상대방인 이재명 역시 가난한 집안에 소년공, 자수성가형 정치 역정, 형수 욕설 등등 영화를 찍어도 될 정도의 스토리를 가진 사람이다. 그러면 이전 대통령들은 어땠는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논란거리가 많았지만 어쨌든 투옥과 망명, 독립운동으로 해방 당시 가장 유명했던 정치 지도자였다. 경쟁자였던 김구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는 쿠데타 주역이었으니 그보다 더 강력한 스토리가 어디 있겠는가? 이에 저항한 김영삼은 야당 시절 단식 등 강경 투쟁으로 자신의 스토리를 만들었다. 김대중은 중앙정보부에 납치되어 태평양에 수장될 뻔한 핵폭탄 급 스토리를 가진 인물이었다. 이 스토리라는 말을 자신이 직접 만들기도 하지만 남이, 특히 핍박하는 권력자가 만들어주기도 한다. 둘이 결합하는 경우도 많겠지. 

그러면 장면과 윤보선은 어떤 경우인가? 그들은 이승만 권력에 효과적으로 맞서지 못하다가 시민 저항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어부지리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다. 별 능력도 없었고 별 스토리도 없었다.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대통령 후보로 나선 사람들 중에 강력한 스토리를 가지고도 대통령이 되지 못한 사람은 없다. 다른 말로 대통령 되기에 실패한 사람들은 국민적 스토리가 없거나 약했다. 반기문은 유엔 사무총장으로 이름을 얻었지만 특별한 화젯거리도 없었고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도 주지 못했다. 정몽준은 재벌 2세로서 유명했지만 재벌 2세의 정치 진출이 스토리가 될 수는 없다. 안철수는 백신 발명가, 참신한 기업가로서 참신한 정치인이 될 수 있었지만 국민에게 강력한 인상을 주기에는 부족하다. 강한 스토리는 없다는 얘기다. 

그러면 스토리가 왜 중요한가? 그것이 있어야 유권자들 머리에 자신을 강하게 인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윤보선, 반기문, 안철수 모두 흐물흐물한 느낌을 준다. 사람들을 강력하게 잡아끄는 흡인력이 부족하다. 이재명에게는 그런 것이 있다. 윤석열에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국민의 표를 끌어오고, 그 전에 당원들의 표도 끌어온다. 

대통령의 자질과 덕목에 대한 교과서적인 얘기들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나도 많이 하였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자질과 덕목이지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요건은 아니다. 아무리 자질과 덕목을 갖추었어도 상황이 안 만들어지거나 스토리가 없으면 대통령이 될 수 없다. 그런데 그 상황과 스토리는 자기가 원한다고 갖추어지는 게 아니다. 그래서 대통령은 하늘이 만들어준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좀 더 우아한 말로 하자면 ‘우연’이다. 결국 대통령은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다. 정치학 교수를 수십 년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자괴감을 느껴야 하나? 정치학이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나이가 들수록 아리송해진다.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최근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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