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공인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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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공인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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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의 탄생 | 박상국 지음 | 김영사 | 336쪽

 

1377년(공민왕 13)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한 『직지심체요절』보다 138년 앞선 새로운 금속활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1239)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다! 이 책은 불교서지학 분야의 권위 박상국 박사가 금속활자본인 공인본과 목판본인 삼성본을 비교·분석해서 공인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임을 밝히는 최초의 증명기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당나라 현각이 중국 선종의 6조인 혜능을 직접 배알한 후 크게 깨달은 심정을 서술한 『증도가』에, 송나라 남명선사 법천(法泉)이 계송을 붙여 내용을 알기 쉽게 밝힌 책이다. 현존하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모두 10여 종. 그중 4책이 동일본으로 알려졌다. 삼성출판박물관에 소장 중인 삼성본(보물 제758-1호), 공인박물관에 소장 중인 공인본(보물 제758-2호), 대구 스님 소장본(문화재 신청 중), 개인 소장본이 그것이다. 이 책은 동일본이라고 알려져 함께 보물로 지정된 공인본과 삼성본이 사실은 다른 판본이며 공인본은 금속활자본, 삼성본은 목판본이자 후쇄본임을 다양한 비교 연구를 통해 증명한다. 가장 논란이 된 ‘최이(崔怡)의 지문(誌文)’ 재검토부터 금속활자본과 목판본의 특징과 차이에 대한 분석, 우리나라 역대 금속활자본에 대한 논문을 모두 검토하는 등 역사적·학문적 고증과 더불어 오랫동안 한국 금속활자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학문적 고증을 거쳐 그 실체를 낱낱이 밝혀냈다.

먼저 1장에서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어떤 책인지,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판본이 얼마나 있는지를 모두 조사하여 분석했다. 공인본은 삼성본과 동일본이 아니고 금속활자본이었다. 그런데 왜 원로 교수의 연구논문과 문화재위원들은 공인본을 삼성본과 동일한 목판본으로 결론 내린 것일까? 문제의 핵심을 다시 처음부터 살펴본 결과 공인본과 삼성본 권말에 붙은 최이의 지문를 번각본의 지문으로 오해한 탓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2장에서는 그동안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왜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목판본으로 판명됐는지 그 과정과 이유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가장 논란이 된 ‘최이의 지문’과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회의록’에 대한 재검토 과정도 모두 담았다. 결국 최이의 발문에 대한 오해로 동일본이라 하였으나 동일본이 아니었다.

3장에서는 공인본과 삼성본이 동일한 판본으로 보물로 지정되었지만, 공인본은 동일한 목판본이 아니라 금속활자본임을 밝혔다. 그리고 공인본에는 금속활자본의 특징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그것도 초창기의 금속활자본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너덜이, 획의 탈락, 광곽, 보사(補寫), 활자의 움직임, 뒤집힌 글자, 활자의 높낮이에 의한 농담의 차이 등이 금속활자본으로서는 처음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 공인본의 이런 점이 금속활자 발명 이후 처음으로 간행한 책임을 알게 해주었다.

4장에서는 공인본의 역사적 위치가 제대로 밝혀지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 우리나라 인쇄술의 역사를 개괄해보았다. 특히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걸쳐 영국, 프랑스, 일본, 독일, 미국 등 외국학자들에 의해 한국의 금속활자가 연구되면서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국가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우수한 문화민족으로 자존감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자존감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형성되어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고 저자는 믿는다.

그러나 해방 이후 자기 역사와 문화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외국인들에 의해 형성된 성과에 의해서 더불어 춤추며, 금속활자 종주국이라는 칭찬에만 성급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외국인에 의해 새롭게 밝혀졌던 많은 사실들은 우리가 금속활자 발명국이라는 자부심만을 앞세우며 면밀한 검토도 없이 성급하게 주어 담아 역사 문화적인 사실을 왜곡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엉뚱하게 추단하기도 하였다. 저자는 고려가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지방의 사찰이 중심이 되어 간헐적으로 몇 차례 서적을 간행했을 뿐이며, 그마저도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어서 다시 목판 인쇄로 회귀했다고 일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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