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국가주의에 대한 시민사회의 고군분투와 균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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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국가주의에 대한 시민사회의 고군분투와 균열내기
  • 이은경 전북대·과학학
  • 승인 2022.03.21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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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한국의 과학기술과 시민사회』 (이은경 지음, 들녘, 363쪽, 2022. 01)

 

지난 50여 년 동안 한국은 상전벽해와도 같은 변화를 겪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은 가난한 분단국가에서 세계 10위권 경제규모를 가진 선진국가로 발돋움했다. 정치민주화를 이루었고 시민사회가 성장했으며 글로벌 문화 강국의 위상을 얻었다. 그에 따라 개인, 공동체, 국가, 세계와 관련된 가치관과 인식도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이 극적인 변화 속에서도 국가 발전에서 과학기술이 핵심 역할을 한다는 사회 인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계몽운동가들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독립을 이루고 민족이 번영하는 나라, 과학조선을 건설하자고 대중을 설득했다. 이 설득 논리는 국가와 민족의 독립과 번영을 위한 과학기술, 곧 과학기술 국가주의로 발전되고 개발독재 정부에 계승되었다. 정부는 ‘과학기술입국(科學技術立國)’을 내걸고 엘리트 과학기술자와 기술관료들이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방식으로 과학기술정책을 추진하면서 경제 성장을 최우선에 두었다. 점차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자들은 사회 다른 영역과 분리된 전문 영역으로 남았다. 그 결과 정치민주화 과정에서 개발독재 시기의 많은 관행과 제도가 민주적 절차에 따르도록 개혁되었지만 과학기술에서는 변화의 폭이 작았다. 

1990년대 이후 시민사회가 성장하고, 이전에 정치 민주화에 집중되었던 시민사회의 관심과 역량이 다양한 사회 문제로 옮겨갔다. 환경, 연구 윤리, 과학기술 위험관리, 과학기술정책 의사결정 등에 시민사회의 참여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러한 시도는 한편으로는 과학기술에 대한 비전문가의 부적절한 개입 또는 치열하게 경쟁 중인 과학기술자 ‘발목잡기’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단체의 연대전략과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과학기술에서도 전에 없던 제도 변화를 이끌어내 시민사회의 호응을 받기도 했다.  이 두 흐름은 밀고 당기는 긴장 관계에 있는데, 균형점은 나라 안팎의 여러 요인 변화, 국내 정치 변화 등에 따라 유동적이다. 

과학기술 연구개발에서 생명윤리 문제를 둘러싼 논쟁과 관련 입법 과정은 이를 잘 보여준다. 복제양 돌리 이후 한국에서도 생명복제연구, 특히 인간배아를 이용한 연구와 관련하여 생명윤리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에 인간배아를 포함한 연구가 사회가 합의한 생명윤리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규제하는 내용 등을 포함한 법률을 제정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 과학기술정책 문제에 처음으로 과학기술 비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종교계, 여성계, 인문사회계 인사들이 참여한 것은 기억할 만하다. 바이오텍 분야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연구 자율성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입장과 생명윤리를 지키도록 규제하여 국가가 지원하는 과학기술의 공공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은 팽팽히 대립했다. 여러 버전의 법안이 작성되고 제출되고 수정되기를 반복한 끝에 최종 확정된 법안을 보면 시민사회의 생명윤리 확립 노력은 용두사미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과학기술정책 의사결정 과정에서 과학기술 국가주의에 동의하는 전문가-기술관료 연합의 영향력이 강력함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국가 중심의 과학기술관과 기술관료와 전문가들이 과학기술을 주도하는 기술관료주의가 형성되는 과정, 시민사회의 성장에 따라 과학기술계에 일어난 변화들을 소개하고 그 의미를 짚어보는 데 목적을 두었다. 내용은 크게 3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다. 첫째 장은 과학기술 국가주의와 기술관료주의가 생겨나고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는 과정을 살펴본다. 일제강점기 과학조선 건설 구호 밑에 깔린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은 개발독재 시대에 사회 인식과 제도 전반에 걸쳐 뿌리내렸다. 과학기술자사회는 정부가 과학기술 투자와 정책을 독점하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연구활동을 위한 자원과 공간, 전문성에 걸맞은 사회적 위상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그 결과 중 하나는 ‘과학기술 경쟁력과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국가가 과학기술자를 우대해야 한다’는 인식이다. 2000년대 초반의 이공계 기피 논쟁은 이러한 인식이 더 이상 통용되기 어려운 사회 환경의 맥락에서 나타난 것이다. 

둘째 장은 민주화 항쟁과 시민운동 성장기에 과학기술 관련 사회문제들이 무엇이었고,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살펴본다. 민주화항쟁 기간과 시민운동 초기에 과학기술은 다른 긴급한 사회문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운동 진영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한켠에서는 공해, 환경, 안전을 과학기술 관점에서 문제제기하는 과학기술자와 사회운동 단체들이 있었다. 이들의 활동은 사회로부터 분리된 영역으로 여기던 과학기술에 대해 과학기술자들 스스로 문제제기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어지는 과학기술 시민운동의 단초가 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마지막 장은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사회의 참여 확대를 위한 제도적, 법적 활동의 성과와 한계를 짚어본다. 2000년대 이후에도 기술관료와 전문가들이 과학기술 관련 의사결정을 주도하고 있었다. 시민사회가 이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제도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법 제정이 선택되었다. 인물 중심의 변혁이 가지는 한계를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법 제정 과정에서 일어난 논쟁, 이해관계와 가치관 충돌, 협상의 과정을 통해 과학기술 국가주의가 건재한지, 기술관료와 전문가들의 영향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시민사회의 문제제기가 무엇이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어떤 전략을 활용했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예를 들어 경주의 중저준위 방폐장 입지 결정과정을 보자. 중저준위 방폐장 건설은 원전을 가동하는 한 피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 누구도 자신이 사는 지역에 방폐장이 건설되는 것을 찬성하지 않기 때문에 결정이 매우 어려운 문제다. 전문가와 기술관료들이 지형적으로 안전한 방폐장 입지를 선정했다가 취소하는 일이 반복된 긴 역사가 이를 말해준다. 결국 기술위험을 떠안는 지역에 충분한 보상을 해 줄 것을 확실하게 보장하고 주민투표를 통해 지역민이 직접 선택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입지가 최종 결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충분한 보상의 정도, 지역민들의 실질적인 보상 범위, 지역감정을 부추긴 지역 정치인들의 행태, 낙후된 지역으로 위험시설이 몰릴 가능성, 주민투표의 관리 등 여러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전문가들과 정부가 먼저 결정하여 통보한 뒤 지역민들의 반응을 살펴보던 이전에 비하면 먼저 설명과 협상의 과정을 거치고 그에 기반해 지역민들이 스스로 결정했다는 점에서는 진일보했다. 

우리는 지금도 과학기술에서 이해관계와 가치가 부딪치는 여러 문제들을 안고 있다. 당장 코로나 팬데믹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 방식 결정, 탄소중립 실행 방안, 에너지 믹스, 인구감소에 대한 대비, 기술패권 경쟁 시대의 생존 방법 등 과학기술정책의 굵직한 문제들이 눈앞에 쌓여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과학기술이 원인을 제공한 경우가 많고, 그 해결방법을 찾는 과정에서도 혁신적 과학기술 연구결과가 돌파구를 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과학기술자들의 혁신에 의한 방안만으로 문제 해결이 충분지 않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과학기술 해결방안에 더해 사회의 기술 수용, 이해관계 조정, 시민사회의 적극 참여와 지지가 있을 경우에 실질적인 해결을 기대할 수 있는 문제가 더 많기 때문이다. 원전정책을 생각해 보자. 탈원전정책을 유지할 경우 신재생에너지 개발, 에너지 효율기술 개발 외에도 신재생 에너지 이용, 에너지 효율적 이용 등에서 시민사회의 참여가 필요하다. 원전을 유지 또는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할 경우 신규원전 입지, 늘어나는 고준위, 중저준위 폐기물 처분장 입지 등을 결정하고 추진할 때 시민사회의 참여와 선택이 필요하다. 이 책의 여러 사례들을 통해 그러한 과정에서 실제로는 어떤 일이 있어났었는지 보여주려고 했다. 

기술패권 시대이자 글로벌 기후위기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가능성 있는 기술방안들이 모색되고 있다. 각각은 개별 기술로 끝나지 않고 해당 기술을 위한 가치관, 사회제도, 법, 행동규범, 기술위험과 편익 배분 등 복잡한 문제들과 얽혀있을 것이다. 그런 문제들에서 선택과 결정을 할 때 민주적 절차, 시민사회 참여는 선택을 사회적으로 정당화하고 더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이 책을 통해 나누었으면 좋겠다. 


이은경 전북대·과학학

전북대학교 자연과학대학 과학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과학기술인력과 과학기술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과학기술과 여성, 근현대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과 과학기술정책의 형성 과정, 과학과 문화의 관계를 탐구하고 있다. “이공계 기피 논의를 통해 본 한국 과학기술자 사회의 특성”, “Boundary Agenda between Gender Equality and Human Resource”,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정책의 변화와 그 요인들”(공저) 등의 논문을 발표했고, 동료들과 함께 『사회·기술시스템 전환』, 『근대 엔지니어의 탄생』, 『과학기술과 사회』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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