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역사 왜곡의 뿌리를 찾아서…'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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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역사 왜곡의 뿌리를 찾아서…'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출간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3.20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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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화제]

 

일제의 식민지배와 전쟁 범죄를 축소하거나 정당화하는 작업이 현재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의 극우와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이 언론을 통해서 국내에 소개되고, 여론이 들끓는 현상이 반복돼 왔다. 그럼에도 역사 왜곡의 밑바탕이 된 식민사관을 누가, 왜, 언제, 어떻게 만들어 냈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메이지 유신으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빨리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했던 일본에서는 유신을 전후해 많은 사상가가 출현했다. 그중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이라는 인물이 있다.

요시다는 나라를 지키려면 없던 것을 차지해 늘려야 한다면서 제국주의자처럼 영토 확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는 물론 한반도, 만주 북쪽, 대만, 필리핀까지 지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주장은 한 세기 뒤쯤 현실이 됐다. 일제는 대한제국으로부터 국권을 빼앗은 뒤 거침없이 침략에 나섰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그럴듯한 구호도 제시했다. 서양에 대응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가 일본을 중심으로 공존해 나가자는 개념이었다.

당시 일본 학계는 자국의 야욕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이론과 학문 틀을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일제의 한반도 지배는 당연한 결과였다고 설명하는 주장은 오랫동안 학술적 근거를 갖춘 ‘통설’로 여겨졌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가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역사관인 ‘식민사관’이 남긴 유산이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그러한 '식민사학'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인식했다. 일제의 식민사관을 반박하고 한국사를 새롭게 쓰는 작업은 1960년대에 들어서야 시작됐다. 하지만 식민사학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온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등 국내 역사학자 7명이 참여해 사회평론아카데미가 최근 펴낸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전 8권)는 그 점을 파고든다. 일제의 동양 제패 이데올로기를 생산한 주요 조직을 분석하기 위해 기획된 이번 총서는 대학과 언론, 조선총독부와 조선사편수회를 비롯해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조사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와 일본에서 식민사관 세우기에 어떠한 조직들이 참여했고, 무슨 역할을 했는지 추적한다. 

대표 저자인 이 교수는 19∼20세기 동아시아사를 성찰하려면 두 가지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유일한 동아시아 국가라는 ‘신화’와 일제 침략 행위는 국제정세 변화에 따른 부득이한 조치였다는 믿음이다. 전체 8권 중 앞쪽 4권이 최근 먼저 발간됐으며, 5∼8권은 다음 달 출간 예정이다.


“일본은 왜 잘못된 역사의 길로 들어선 것일까?”

■ 일본제국의 ‘동양사’ 개발과 천황제 파시즘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1) | 이태진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 02 | 392쪽

이 책은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의 첫째 권으로,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제국이 ‘동양’, ‘동양사’를 새롭게 개발한 것과 천황제 파시즘의 상관관계를 파헤친 역사서이다.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는 일본의 ‘동양’ 제패 이데올로기 생산의 주요 조직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 책은 그중에서도 ‘동양’과 ‘동양사’ 개발과 황도주의 파시즘을 선전 보급한 대학과 언론계를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다.

오늘날 ‘동양’과 ‘동양사’는 지역 또는 역사연구 분야나 교과목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나, 이 용어는 19세기 중·후반 동서가 새롭게 만난 시기 서양 문명 수용에 가장 앞선 일본이 주변국으로 진출하기 위해 ‘특별한’ 의도로 새로 만들어낸 단어였다. 메이지 정권은 천황제 ‘왕정복고’ 당시 서양 열강에 앞서 이웃 나라를 선점하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세우고 있었으며, 입헌군주국으로서 정치체제가 자리 잡는 시점에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신교육 장치를 마련하고자 했다. 서양 열강에 앞서 일본제국이 주변국을 선점한 세계는 곧 일본제국의 천황이 다스리는 세계로서, 이를 ‘동양’이라고 일컬으며, 이 세계를 개척하는 데 필요한 역사연구와 교육을 위해 ‘동양사’란 영역을 새로이 설정, 개발한 것이다.

이 책은 동양사 용어의 유래와 이를 빠르게 받아들인 도쿄대학과 교토대학의 동양사 인식 현황을 비롯해 메이지 정부의 대외 침략주의를 다룬다. 특히 일본의 ‘동양사’ 개발에 주목한 저자는, 1894년 나카 미치요의 3분과 제안으로부터 8년이 지난 1902년, 러일전쟁 발발 2년 전 문부성에서 만든 일본사, 동양사, 서양사의 3분과 교과서를 직접 조사하기 시작한다.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 역사가 동양사로 배치되었으니 한국사 또한 동양사에 들어가 있을 것이라 여긴 것과 달리 충격적이게도 한국사는 일본사 교과서에 포함되어 있었다. 강제병합 8년 전부터 일본은 이미 ‘역사합병’을 저지른 것이었다.

또한 ‘동양사’는 중국 북방인 만주, 몽골의 땅에서 여러 유목민족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다루었는데, 이는 일본제국의 중국 본토 침략을 정당화할 역사적 근거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 것에 불과한 것임을 밝혀내고 있다.

이어 저자는 요시다 쇼인의 평전을 쓴 도쿠토미 소호의 여러 신문 논설과 저서를 황도주의 개발의 관점에서 다시금 살폈으며,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대동아전쟁이 벌어질 때 도쿠토미 소호가 개발한 황도 파시즘이 어떻게 국민독본 성격의 저서들을 통해 널리 퍼지게 되었는지를 살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저자는 일본의 대한제국의 국권을 탈취한 일이 두 나라 사이의 문제를 넘어 19세기 중반 이래의 동아시아사 전체에 대한 성찰의 문제와 연동되어 있음을 독자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무엇보다 저자는 일본이 근대화에 유일하게 성공한 동아시아 국가라는 ‘메이지유신’의 ‘신화’가 실상은 천황제 국가주의로 동아시아 세계를 독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직시하는 것이 곧 일제 식민사학을 제대로 비판하는 길임을 설파하고 있다. 더불어 이러한 일본의 침략적 역사인식과 역사교육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인데도 지금까지 이에 대한 인지와 비판이 없었다는 것은 동아시아 역사학이 크게 반성해야 할 점이며, 이를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서는 21세기 동아시아의 평화를 기원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열패한 식민지 문화의 전파 위해 탄생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실체와 흥망성쇠

■ 조선총독부박물관과 식민주의: 식민지 역사의 재현과 문화재 관리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2) | 오영찬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 02 | 376쪽

이 책은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의 두 번째 권으로, 제국 일본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해온 주요 조직 중 하나인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다.

서구 열강은 제국주의 침탈 과정에서 원활한 식민지배를 위한 문화적 도구로 박물관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학술기관을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식민지에 설립된 박물관은 서구의 문명적 과업을 식민지인들에게 과시하고, 식민통치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제시한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근대 일본의 문화시설은 이러한 서구의 선행 사례를 모델로 한 것으로, 제국 일본은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박물관을 타이완과 조선, 만주 등의 식민지에 이식해나갔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은 1915년 12월 1일 경복궁 내에 개관했는데, 박물관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는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그는 원활한 식민지 통치를 위해 문화 침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의 박물관과 문화재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식민지 박물관으로서의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일제의 식민지 문화재정책에 부응하여 발굴품과 미술공예품을 통해 시대적 특질을 문화사적으로 조망하는 박물관을 지향하였다. 또한 실물 자료의 전시를 통해 조선의 문화를 재현하고, 이 과정에서 일본과 중국, 구미와의 비교를 겸하여 식민지 조선의 문화가 얼마나 열등한지를 스스로 자각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으며, 아울러 조선에서 문화재 조사와 보호, 보전을 위한 행정 업무를 총괄한 식민지 문화행정기관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1915년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개최 당시 미술관으로 경복궁 안에 지어진 건물이었으나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됐다. 해방 이후 1954년까지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경복궁 복원정비사업의 일환으로 1995년 철거됐다. 사회평론아카데미 제공

이러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건물과 소장품은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국립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이 책은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과 전시, 조사연구의 연원이기도 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설립과 운영을 통해 열패한 식민지 문화가 어떻게 전파되었으며, 조직과 인력, 소장품의 출처와 상설전시를 통해 식민지 박물관의 토대가 어떻게 구축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폈다. 더불어 일제시기 변동과 파행을 거친 고적조사 과정과 전시체제 아래 균열과 퇴락의 길을 걸어온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역사를 상세히 들여다본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실체를 파악하는 이러한 연구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사를 제대로 알아가는 것뿐 아니라 제국의 식민지 박물관의 특징을 규명하는 작업으로서도 그 의미가 매우 크다.


만선사(滿鮮史)는 무엇이며,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 만선사, 그 형성과 지속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3) | 정상우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 02 | 288쪽

식민주의 역사학의 주요 담론으로 비판받고 있는 ‘만선사’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만주와 조선을 아울러 지칭할 때 사용하던 ‘만선’이란 용어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대륙 침략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만선사’라는 학술적 용어로 탈바꿈했다고 여겨왔는데, 오늘날까지 이러한 시각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1960년대 이래 만선사는 한국사에 드리워진 대륙의 영향력을 강조한 식민주의 역사학의 주요 담론으로 지목되면서 한일 양측에서 모두 비판받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만선사를 다룰 때 만주와 조선에만 집중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책은 만선사가 일본의 대륙 침략 과정에서 등장하고 전개된 것일 뿐 아니라 일본사를 중심으로 만주와 조선 및 대륙의 역사를 재편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침략의 주체이자 새로운 역사 판도의 중심인 일본사를 함께 사고해야 일본의 팽창에 따른 동아시아 역사 재편 과정으로서 만선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만선사라는 이름 아래 만주와 조선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연구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스스로 만선사가를 자처했을 뿐 아니라 유일하게 만선사의 체계화를 시도한 이나바 이와키치의 논의를 중심으로 만주와 조선의 역사에 대한 당시 일본인 역사가들의 연구를 살펴본다. 만주사에서 조선사와 만선사로, 다시 만주사로 중심축을 이동해온 이나바의 연구 궤적을 따라감으로써 이나바로 대변되는 일본인 연구자들이 동아시아의 역사를 어떻게 그려냈는지, 또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찰하였다. 이를 통해 제국 일본의 팽창 과정에서 탄생한 만선사의 논지를 선명히 하고 동아시아 역사를 재편하고자 한 일본의 식민주의 역사학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만철조사부는 제국 일본의 판도 확대와 그 정당화에 어떤 역할을 했을까?

■ 제국 일본의 동아시아 공간 재편과 만철조사부: 권력·공간·학문의 삼중주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4) | 박준형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 02 | 300쪽

이 책은 제국 일본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해온 주요 조직을 살펴본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의 네 번째 권으로, 그중에서도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조사부를 중심으로 해당 조직에서 누가, 어떻게 제국 일본의 공간 재편을 위한 시도를 위해 나섰으며, 그 이론적 배경은 무엇이었는가를 살폈다.

제국 일본의 대외팽창과 공간 확장은 제국이 패망하는 날까지 반복되었다. 일본은 침략을 통해 새로 확보하게 된 공간을 ‘통치 공간’으로 전환하기 위해 ‘주권선’과 ‘이익선’을 설정하고, ‘내지’와 ‘외지’로 구분해 지속적으로 공간을 확장, 재편해나갔다. 일본의 대륙 침략 경로는 한반도에서 시작해 간도와 만주를 거쳐 화북으로 향했으며, 이 침략 과정의 중심에는 러일전쟁 이후 설립된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즉 만철이 있었다. 만철은 만주 지역의 주요 산업을 지배했을 뿐 아니라 철도부속지를 통한 영역 지배까지 실현했다. 그중에서도 만철조사부는 일본의 지배를 뒷받침하기 위한 기초 조사는 물론 정책 입안까지 관여한 제국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였다.

저자는 만주를 배경으로 무기 대신 붓을 들고 싸운 만철조사부 활동을 중심으로 제국 일본의 공간 재편 과정을 세밀히 밝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를 추동해간 권력의 의지를 확인하고, 동양사학, 법사회학 같은 근대 학문이 어떤 논리를 통해 이러한 권력의 의지에 부합해갔는가를 살펴보았다. 특히 만철조사부의 일원이었으며 동시에 조선사 연구자이기도 했던 하타다 다카시의 ‘중국 현지조사’ 활동과 ‘전후 조선사학’ 연구를 통해 과연 학문이란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거시적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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