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사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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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사유하다
  • 김도현·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 승인 2020.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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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철학, 장애를 논하다: 메를로-퐁티와 롤스에서 호네트와 아감벤까지』 (크리스트야나 크리스티안센 외 지음, 김도현 옮김, 그린비, 2020.01)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 중 철학의 시각에서 장애를 다룬 책은 과연 몇 권이나 있을까? 번역서와 국내 저자가 직접 쓴 저서를 불문하고 말이다.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서 ‘장애+철학’을 키워드로 검색을 하면, 화면에 뜨는 책은 그린비 장애학 컬렉션의 두 번째 권으로 번역 출간된 『거부당한 몸: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2013)이 유일하다. 한국 사회에서 철학을 전공하거나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정체화한 이들 중, 장애를 사유와 글쓰기의 화두로 삼아 지속적인 작업을 수행한 이는 사실상 전무하다는 얘기다.

장애인이라는 범주는 자본주의의 태동 이후 근대적 노동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발명’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장애란 무엇이며 누가 장애인인가’, ‘장애인이라는 범주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통치적 목적에서든 비판적 동기에서든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근대 철학의 담론장 내에서 장애인(특히 인지장애인)은 인간이라는 철학적 주체와 인간 사회를 성립시키기 위한 ‘타자’이면서 동시에 ‘도구-경계’로서만 등장한다. 다시 말하자면 근대 이후의 철학에서 장애인이라는 존재는 구성적 외부(constitutive outside)로서만 다루어질 뿐 그 자체로 다루어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가르는 경계는 이미 자명한 것으로서 혹은 수단으로서만 다루어질 뿐 그 자체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장애인이라는 존재가 ‘그 자체로’ 인격체와 비인격체를 가르는 일종의 경계가 된다. 즉 장애인은 (도덕적으로) 인간의 편에서 멀어지고 (생물학적으로) 동물의 편에 속하지도 않으면서 하나의 선으로 압축되고 사실상 비가시화된다.

이런 현실로 인해 서구의 장애학 발전 과정에서도 철학은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일종의 방관자적 위치에 머물러 있었으며, 철학이라는 이름을 전면에 걸고, 철학 전반의 시야에서 장애를 다룬 것은 2009년 출간된 『철학, 장애를 논하다』가 최초라고 평가된다. 그리고 이 책에서 전개되는 장애에 대한 논의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모리스 메를로-퐁티와 존 롤스에서부터 악셀 호네트와 조르조 아감벤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현대 철학자들의 이론 및 개념과 조우하게 된다.

이 선구적인 저작집은 형이상학, 정치철학, 윤리학이라는 철학의 세 가지 주요 분과를 기반으로 하여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형이상학에서는 하나의 ‘현상’으로서 장애란 무엇인지, 그리고 이런 현상의 본질과 과학적 지식의 관계는 무엇인지가 논의된다. 1장은 기존의 의료적 장애모델과 사회적 장애모델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면서, 인간의 행위주체성(agency)을 사상하지 않는 장애 모델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2장에서는 장애의 정의(定義)에 연루되어 있는 의료적·도덕적·미적 가치들이 비판적으로 검토되며, 3장은 존 서얼이 발전시킨 ‘원초적’ 사실과 ‘제도적’ 사실의 구분에 기반을 두고 손상과 장애의 존재론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시도한다. 그리고 4장은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관점에서 장애의 물질적 토대와 체현된 본질을 논하는데, 이례적인 몸이 누군가의 정체성과 자아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는 새롭고도 보다 철저한 경험적 지식을 요하는 이슈임을 주장한다.

제2부 정치철학에서는 자유, 평등, 정의 같은 개념들이 장애와 관련하여 어떻게 재해석되어야 하는지가 주요 초점이라고 할 수 있다. 5장은 호네트의 인정이론 접근법에 기초하여 ‘대인관계론적 인격’(interpersonal personhood) 개념을 도입하고, 이 개념을 중심으로 장애인의 진정한 사회적 통합을 위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요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6장은 롤스의 정의론 및 소극적 자유 개념과 치열하게 대결하면서 장애를 인간의 자유와 정의(正義)에 대한 본질적 이슈로 확립하며, 7장은 손상과 재능 부재(non-talent)의 경계를 다각도로 고찰하면서 분배적 정의가 지닌 정치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리고 8장은 ‘여성’과 ‘장애인’ 양자 모두가 일종의 사회적 구성개념이자 억압의 산물임을 논하면서, 집단 정체성의 유의미성과 한계, 정체성 정치의 타당성을 재검토하고 있다.

제3부 윤리학의 첫 두 장에서는 농(聾)의 ‘치료’ 및 예방이라는 복합적이고 논쟁적인 이슈가 다루어지며, 11장에서는 장애 관련 법률의 형성에서 의료적 담론의 영향력이 구체적인 판례를 통해 실증적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리고 12장은 장애와 관련된 가장 첨예한 이슈라 할 만한 산전 선별검사와 선별적 낙태를 다룬다. 선별검사를 정당화하는 ‘자율성’이라는 논거가 전반적으로 재검토되며, 장애를 중심으로 한 논의와 적절한 산모보건을 중심으로 한 논의를 결합할 경우 각각의 관점 내에 존재하는 비판적 잠재력이 강화될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13장은 아감벤의 이론적 작업에 의지해 장애인의 사회적 배제를 논한다. 앞선 장애서 논의된 산전 선별검사 및 선별적 낙태와 더불어 정신장애인의 정신병원 수용, 낯선 이들과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심리-정서적 장애차별주의가 ‘호모 사케르’와 ‘예외상태’라는 개념틀 속에서 독창적으로 분석되고 있다.

비단 철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도 장애 그 자체에 관한 논의는 많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철학, 장애를 논하다』는 장애와 관련된 제도, 정책, 관행의 도덕적 본질, 그리고 그것들이 장애인과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관해 분석함으로써 우리에게 다양하고도 중요한 논점을 제공해 준다. 글래스고대학교의 장애학과 교수 닉 왓슨의 지적처럼 지금까지 종합적이고 철학적인 장애에 대한 접근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만큼, 이 책은 장애 문제나 철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 및 연구자들에게 매우 신선하고도 새로운 독서의 경험을 제공해 줄 것이다.


김도현·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장애인언론 『비마이너』 발행인이자 노들장애인야학 교사이고, 노들장애인야학 부설 기관인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이기도 하다. 쓴 책으로 『차별에 저항하라』(2007),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2007), 『장애학 함께 읽기』(2009), 『장애학의 도전』(2019)이 있으며, 그린비 장애학 컬렉션을 기획하고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2011), 『장애학의 오늘을 말하다』(2017)를 우리말로 옮겼다. 2004년에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가 수여하는 제2회 정태수상을, 2009년에 김진균기념사업회가 수여하는 제4회 김진균상(사회운동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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