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들이 남긴 상처 자국을 더듬는 사유의 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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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들이 남긴 상처 자국을 더듬는 사유의 촉수
  • 한순미 조선대 인문학연구원·국문학
  • 승인 2022.03.13 20: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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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다초점 렌즈로서의 재난인문학: 그물망과 교차점』 (한순미 지음, 문학들, 304쪽, 2022. 01)

 

 

# “우리는 우리의 삶 자체가 이미 재난에 처해 있다고 선언한다.” 

몇 해 전, 단호한 어조로 저 문장을 쓰고 난 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세월호’ 참사는 지금 여기에서 출발해 재난들의 더미에 갇혀 아직 기록되지 못한/않은 기억과 흔적을 불러일으켰다. 그 무렵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산해경> 등 고전 속의 신화, 이야기들과 국립소록도병원의 ‘한센병’ 자료집, ‘5.18광주민주화운동’ 증언록을 함께 읽었다. 시공간의 격차를 넘어서 기록 속의 재난들은 고통의 물결로 다가왔다.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을 때에는 페이지를 건너뛰는 과감한 독서가 오히려 위로가 된다.”(「1부 1장 재난 단상들 10. 폐허 수집가의 책읽기」, 58쪽) 

격리된 공간에서 자라난 그리움의 감정은 엄격한 방역수칙을 수시로 위반했다. 재난의 한가운데에서, 불규칙한 호흡으로 저 먼 역사와 지금 여기 현실에서의 재난들을 조망했다. 팬데믹의 유행은 동서양 역사에서 감염병이라는 재난을 인식하고 치유해 온 과정을 다시 들춰보는 계기가 되었다. 바이러스가 지닌 예측할 수 없는 속도와 흐름에서, 인문학이 바이러스의 점진적인 지배력과 전파력을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재난은 민족, 인종, 지역, 국가의 경계를 넘어 초국경(cross-border)의 지평에서 탐구할 과제이다. 재난의 중첩적이고 복잡한 구조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전쟁, 학살, 혁명, 테러, 쓰나미, 홍수, 지진, 전염병 등 숱한 재난들을 다각도에서 성찰해야 한다. 원근을 조절하는 “다초점 렌즈로서의 재난들”이 이 책의 낱말들을 선택하고 문장들을 짓게 했다. 재난들이 글의 어조와 스타일을 결정했다. 그러므로 재난들이 이 책의 실제 저자들이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사유와 감정의 몽타주 형식을 따라 감염병, 한센병, 5.18 광주, 기후위기, 인류세 등 역사적 사회적 재난에 관한 단상들을 펼쳐 보았다.


# 재난이 휩쓸고 간 흔적들: 사유의 촉수가 닿는 지점

인문학의 관점에서 재난들을 주목하는 지점은 피해의 규모, 피해자의 숫자, 재난의 빈도 등과 같이 가시적으로 수량화할 수 있는 것보다는 재난이 휩쓸고 간 흔적들, 소리 없는 상처 자국들이다. 바이러스와 같이 실체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무엇인가가 있다는 느낌이 감지되는 곳, 그곳이 바로 인문학적 사유의 촉수가 닿는 지점이다. 

예기치 못한 재난에 직면해 사유는 멈추지 않는다. 사유는 마치 먹이를 유인하고, 붙잡고, 삼키듯이 운동하는 말미잘의 촉수(tentacle)와 같은 것이 된다. 재난은 위기를 감각하는 신체를 변화시키고 인식의 속도를 조절한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인식의 틀과 사유체계의 기반을 서서히 침식한다. 그 단절된 듯 연속되고 있는 지점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1부 2장. 팬데믹 이후 재난인문학」, 63쪽) 

 

“저 사진은 안과 밖의 감각을 이전과 다르게 만든다. 우리는 오직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서만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 그날, 저 멀리서 침몰하는 선박을 그저 바깥에서, 화면을 통해서 바라보고만 있었던 사람들은 사진 앞에 있는 순간에만 배 안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그들의 자리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다.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그 자리는 ‘누구’의 자리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고백하자면 사실 이 글은 저 한 장의 사진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시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세월호 안에서 찍힌 마지막 사진에서 1980년 광주를 생각했다. 5.18 당시 바깥과 단절된 외로운 섬, 광주에서 외부와 연락이 차단된 채 무참하게 학살당한 시민들의 얼굴이 겹쳤다. 세월호가 5.18 광주를 다시 불러낸 것이다.”(「2부 3장. 세월호의 ‘바람’에게」, 205∼206쪽)


# 그물망과 교차점: 고통의 강도

이 책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2019년 5월 1일에 시작한 조선대학교 인문한국플러스사업(HK+) 아젠다 〈동아시아 재난의 기억, 서사, 치유: 재난인문학의 정립〉 아래 진행한 연구 결과물을 엮은 것이다. 재난의 시대, 팬데믹의 시대를 앓고 있는 흔적들에서 단절된 듯 연결된 재난인문학의 별자리를 그려보고 싶었다. 〈1부. 그물망: 재난의 인식과 서사〉와 〈2부. 교차점: 재난의 기억과 치유〉는 재난인문학 연구의 단상과 방법론을 각각 “그물망”과 “교차점”이라는 핵심어를 중심으로 연구방법론을 배치했다.

후쿠시마-광주5.18-아우슈비츠-세월호라는 교차점은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난 재난의 기억을 ‘고통의 강도’로 연결한다.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 재난들은 과거와 현재의 간격, 국가 간의 거리를 지우면서 거대한 그물망을 이루며 다가왔다. 초국경의 재난들은 우리를 하나의 몸으로 연결한다. 우리의 몸은 재난으로 연결된 하나의 공동체이다. 

5.18 민주화운동기록관(https://www.518archives.go.kr)에서 제공하고 있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에 수록된 자료들을 중심으로 항쟁의 역사 기록에서 소외된 ‘여성들’을 불러냈다. ‘오월 현장에서 여성들은 왜 잘 포착되지 않는/못한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기록들 속에 묻힌 여성들을 조명했다. 

오월을 겪은 사람들을 가해자, 피해자, 목격자, 방관자, 부상자, 사망자 등으로 분류해 왔던 방식에 오월을 증언하는 ‘목격자-전달자’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추가해보았다. 가족을 잃은 여성들의 증언과 시위 진압에 참여한 계엄군들의 증언을 교차시켜 보면 동일한 사건을 다른 입장에서 진술한 문장들을 주의깊게 살폈다. ‘피해자’라는 말이 거느리고 있는 복잡한 맥락을 드러내보려 했다. 

기억의 원본과 복사본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 사이에서 탄생한 판본들은 초현실주의 회화 기법으로 알려진 데칼코마니와 유사하다. 미셸 푸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전사술 Décalcomanie」(1966)을 분석하면서 유사와 상사의 관계를 설명한 것과 함께 아를레트 파르주의 ‘아카이브 작업’을 주요한 방법론으로 도입했다. 

세월호 이후 낯선 구조를 지닌 문장들이 출현하고 있는 현상, 새로운 개념과 사유가 출현하게 된 맥락을 읽었다. 세월호와 다른 역사적, 사회적 재난들 사이의 교차점에서 어떤 사유와 글쓰기의 실천을 지향해 왔는지를 살피면서 세월호 이후 애도와 치유를 위한 노력들이 갖는 한계를 짚어보았다. “나는 프리모 레비의 말을 바꾸어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과 함께 국가라는 거대한 괴물이 가라앉았고 새로운 역사 기록이 구조되고 있다고, 쓰고 싶다.”라는 문장으로 마지막 문단을 맺었다.

후쿠시마의 바람이 세월호의 바람과 마주하면서 우리가 느낀 공포는 단지 방사능 원전과 지진 쓰나미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날들이 가져다준 두려움은 이전에도 그와 흡사한 재난의 경험과 기억이 있었고 지금 어딘가에서도 그와 유사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을 증폭시킨다. 세계의 국가들은 재난의 기억을 공유하고 고통의 서사로 연대하는 장소가 된다. 


# 평등한 전염균은 누구나 평등한 조건에 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된 평등한 바이러스가 아직 낯설고 어색하다. 평등하게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다는 생각은 불평등한 현실을 깊이있게 분석하는 작업을 마비시킨다. 우리 모두가 이미 평등한 사회에서 살고있다는 환상에 빠질 수도 있다. 비대면 사회로 접어들면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 회복, 돌봄의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화두가 되고 있다. 비대면 사회에서 돌봄의 대상에는 차별받고 소외된 타인만이 아니라 고립된 개인들, 우리 모두가 포함된다. 

팬데믹의 시대에도 감염병의 기원과 전파, 예방을 둘러싸고 특정한 지역, 종교, 외국인, 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 쏟아졌다. 근대 이후 한센인들은 문둥이, 나(병)환자, 부랑 나환자 등의 이름으로 신문과 잡지 등 대중매체에 출현했다. 한센인에 대한 낙인의 감성은 마비, 불구와 기형이 된 신체 이미지, 전염의 공포에 대한 상상력, 소문과 유언비어 등이 덧붙여져 전파 확산되었다. 여기에는 혐오의 감정이 관통하고 있다. 국립소록도병원에서 발간한 자료집, 나병 계몽 잡지 〈새빛〉>(The Vision)의 자료 일부, 의료사 연구 등을 참조해 한센병/한센인에 대한 혐오가 다양한 각도에서 형성되어온 장면들을 추적했다. 


# 재난인문학은 궁극적으로 인문/면역학 

재난인문학은 역사 기록에 누적된 재난의 기억과 인식, 서사와 치유의 지층을 주요한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재난에 관한 인식의 변화를 추적하고 재난의 경험과 기억을 어떻게 서사화해 왔는지를 분석하면서 공동체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인다. 

아직 멈추지 않은 감염병의 유행 속에서 “마침내”, “결국”, “지금 이 순간”, “곧”, “언젠가는” 등과 같은 시간 표지들이 들어가는 문장들을 자주 쓰게 된다. 이것은 재난과 더불어, 판단과 인식의 “이행대”(ecotone)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팬데믹이 유행하는 동안, 저 먼 곳으로 이동할 수 없는 격리의 상황이 오히려 갈 수 없는 그곳을 더욱 자주 떠올리게 했다. 그리움의 감정은 엄격한 방역수칙을 수시로 위반했다. 글을 읽고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은 변이하는 전염균에 대응할 수 있는 면역학을 정립하려는 시도와 멀지 않게 다가왔다. 이것이 ‘재난/인문학’을 ‘인문/면역학’이라고 바꾸어 부르는 이유다. 


한순미 조선대 인문학연구원·국문학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에서 <이청준 소설의 언어 인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근현대문학 및 문화, 한센병 역사문화 기록 연구를 비롯해 재난인문학, 트라우마의 재현과 치유, 소수자 타자의 서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저서로는 『동시대인의 산책: 문학과 사유이미지』(2012), 『우리 시대의 사랑』(공저, 2013), 『미적 근대의 주변부: 추방당한 자들의 귀환』(2014), 「“달과 별이 없어도 밝은 밤”-한센병의 감각과 증언」(2020), 「위생, 안보, 복지: 1970년대 나병 계몽 운동의 변곡점-잡지 『새빛』 수록 나병 계몽 운동 자료 검토(1970-1979)」(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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