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정전』 … 아웃사이더의 방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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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 아웃사이더의 방백
  • 문선영 서평위원/동아대
  • 승인 2022.03.07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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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아Q정전』, 꽤 오래전,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로맹 롤랑이 감명받고 눈물까지 흘렸다 해서 따라 읽은 책이다. 그가 쓴 『장 크리스토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인간성을 존중하고 진리에 진솔하게 호응하는 작가가 좋아하는 작품이라 하니, 무작정 읽어 볼밖에. 그런데 만만하게 시작했다가 점점, 생각보다 쉬 읽히지 않았다. ‘정전(正傳)’ 형식을 취한 것도 그렇고 ‘아Q’라는 인물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도 버거웠다. 고백하건대, 『아Q정전』과의 첫 대면식은 그리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한참 후 칭다오를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루쉰 공원을 걸었다. 아름다운 해안 공원에 차려진 루쉰 조각상과 그가 지은 시들을 감상하다 보니, 문득, 별 감흥 없이 읽은 『아Q정전』이 다시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찾아 읽었고,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한 루쉰 공원에서의 인상적인 기억 덕분인지 『아Q정전』은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심지어 매우 각별하게까지 다가왔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매우 구체적으로 한 계기가 되어서였던 걸까. 이후 이른바 ‘그레이트 북’을 꾸릴 때 되도록 꼽는 책이 되었다.


   아웃사이더가 살아남는 법, 정신 승리법

   아Q는 보잘것없는 사람이다. 이는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렇다는 뜻이다. 이 소설은 1921년부터 이듬해까지 베이징의 일간지 『신보(晨報)』의 문예부간 『신보부간(晨報副刊)』에 연재되기 시작한 중편 소설로, 「제1장 머리말」에서 「제9장 대단원」까지 모두 9장으로 소제목을 붙여 꾸려져 있다.

   어쨌거나 마침내 아Q를 글로 전하겠다고 나서는 걸 보면 내가 귀신에라도 씐 모양이다. …… 첫째는 글의 이름이다. …… 소설가들이 “여담은 그만두고 이제 정전(正傳)으로 돌아가 이야기할 것 같으면”이라고 하는 틀에 박힌 말에서 ‘정전’이라는 두 글자를 따 이 글의 제목으로 삼으려 한다.……. 나는 아Q의 이름을 어떻게 쓰는지도 모른다. 그가 살았을 때 다들 그를 아Quei라고 불렀고, 죽은 뒤에는 아Quei를 입 밖에 낸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그의 이름이 대나무와 비단에 적혀 역사에 전해질 리도 없다. 대나무와 비단에 적어 역사에 남기는 일로 치자면 이 글이 처음인 셈이고, 그러다 보니 이런 난관에 봉착한 것도 당연히 처음이다. …… 중국어 발음을 표기하는 방법인 주음자모(注音子母)가 아직 거부감을 지닌 사람이 많아 널리 쓰이지 않기에 하는 수 없이 ‘서양 글자’를 쓸 수밖에 없어, 영국에서 사용하는 중국어 발음 표기법에 따라 그를 아Quei라고 쓰고, 약칭으로 아Q라고 한다. (7~15)

   「제1장 머리말」에서 『아Q정전』을 쓰게 된 동기랄까, 말 그대로 ‘머리말’의 대략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1921년 신문 연재를 시작한 1회분에서 루쉰은 “1장은 있으나 마나 한 쓸데없는 골계다.”라고 하면서, 스스로 미학적 통일성의 측면에서 볼 때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로맹 롤랑이 읽은 불어 번역판에는 1장이 아예 없었다 한다. 마치 실제 인물에 대한 삶의 내력을 보는 듯한 효과가 있어서 1장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루쉰을 전공하는 학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아Q’를 ‘아큐’라고 쓰면 안 되냐 물었더니 단호하게 반드시 알파벳 대문자 큐Q를 써야 한다고 했다. ‘아’는 이름 앞에 붙이는 친근한 호칭이고, Q, 중국 발음으로 ‘꾸이’라고 하는데, Q 생김새가 변발과 생김새가 같아서 변발을 뜻하는 ‘queue’를 가져온 것으로도 추정한다는 것이다. 

   아Q는 시골 마을에서 살아가는 이른바 파트타이머 노동자이다. 변변한 집도 없어서 옛 사당에서 기거하는데 물론 가족도 없다. 심지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는 아웃사이더다. 이 소설의 전반부는 이러한 아웃사이더로서 아Q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독특한 것은 아Q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태도이다. 이른바 그 유명한 ‘정신 승리법’. 가령, 다른 사람에게 맞으면 ‘뭐, 내가 맞을 만했겠지.’ ‘내가 재수 없다고 생각하지’, 이런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이다. 문득 힘든 20대를 보내는 학생들이 상담을 요청해올 때 이러한 자기 합리화 방식을 가끔 권하기도 해서, 움찔, 하면서 읽은 대목이다. 동시에 자기 합리화로 스스로의 존재를 위로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는 듯해서 더더욱 소름이 돋는 대목이다. 아, 나도 어느 정도 아Q인가,
   아Q를 좀 더 들여다보기로 한다. 남에게 맞거나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아Q는 전혀 저항하지 않는다. 자기가 맞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유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들을 깡그리 잊어버린다. 이것이 아Q가 보여주는 이른바 정신 승리법이다. 현실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졌지만, 오로지 그의 정신세계 속에서는 자신이 이겼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아Q는 불만이 없다. 심지어는 즐겁기까지 하다. 우리는 실수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당시’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아Q는 ‘당시’를 망각하기만 하고 비판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존재를 합리화하는 데에는 패배감이 없으니 매양 늘 그러한 처지에서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아Q가 지닌 정신 승리법이 가진 노예 의식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한편, 이러한 아Q가 왜 그런 생활을 하는지, 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했다.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이상한 사람 정도였는데, 작품을 보면 볼수록 아웃사이더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아Q에게 심지어는 동정과 연민이 드는 것이다. 그는 왜 아웃사이더가 되었을까. 순전히 개인의 무능력과 무책임한 삶의 태도 때문인가, 하는. 그러다, 다른 사람들과 말다툼을 할 때 간혹 눈을 부릅뜨고 “우리도 옛날에는 …… 네놈보다 훨씬 잘 살았어! 네놈이 감히 뭐라고.”(16~17) 하는 대목에서 무려 그가 지닌 자존심의 무게마저 느꼈다. 아, 정신 승리법만이 그가 삶을 살아가는, 아니, 삶을 견딜 수밖에 없는 생존 방식이라면? 속내가 점점 복잡해진다. 

 

                                            1928년 상하이 징윈리(景雲里) 자택 서재에서의 루쉰

   아웃사이더가 살아남는 법, 아Q식 혁명 

   작품 후반부에 오면 아Q가 혁명에 참가했을 때의 서사에 이야기의 무게 중심이 옮겨간다. 여기서 혁명은 1911년에 왕정에 반하여 일어난 공화제 혁명인 신해혁명이 배경이다. 아Q는 처음에는 혁명이 싫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혁명에 관심을 보인다. 왜냐하면 혁명이 일어나자 아Q를 괴롭히던 사람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심지어는 혁명군이 들어오자 마을에서 패권을 잡고 있던 지주 조 씨가 그에게 ‘아Q 씨’ 이렇게 부르니. 우쭐해진 아Q는 혁명에 가담하기로 하는 것이다. 이른바 아웃사이더로 살지 않아도 될 절호의 기회를 만난 것 같아서.
   그런데 상황은 그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궁극적으로는 혁명 세력들이 아Q를 받아주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도둑질했다는 오명으로 그를 잡아간 후 처형시키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아Q는 그가 유일한 탈출구로 삼았던 혁명이 도리어 그에게 화살로 돌아와서 마침내 온전한 아웃사이더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여기서 이른바 ‘아Q식 혁명’이 등장한다. 아Q가 혁명에 가담하기로 한 것은 순전히 자신의 이익 때문이다. 그를 괴롭히고 때리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그가 원하는 여자도 얻어서 자식을 낳으려는 속셈 때문이다. 사회적 정의 실현과는 무관한 혁명인 것이다. 그래서 신해혁명이 실패한 이유를 이러한 이기심 어린 혁명 의식 때문이라는 담론을 빚어내는 데 아Q가 매우 적절하게 맞아떨어진 셈이다. 
   『아Q정전』을 발표하고 난 뒤 루쉰은 앞으로 아Q와 같은 혁명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보복을 위해서 혁명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예감은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아Q정전』은 어엿한 고전이다. 백 년 전 아웃사이더로서 아Q의 개인적인 삶이 2022년 나 또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해서 삶을 성찰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는 고전이고, 아Q와 같은 혁명가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해서 역사적인 삶을 가늠하는 데도 소용되므로 고전이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언제나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이 그레이트 북인 것을 보면, 『아Q정전』은 과거에도 고전이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고전이 틀림없다.

   아Q가 바람직한 인간일 리는 없다. 그렇다고 아웃사이더로 온전히 배척하기만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아Q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아Q가 살아가는 아웃사이더의 삶이 또한 인간 삶의 일부로 버젓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쉰의 본명이 주수인이라 한다. 이때 ‘수인(樹人)’은 ‘사람을 수립한다’라는 뜻을 품고 있는 걸 보면 이 이름값을 하기 위해 그 일환으로 『아Q정전』을 쓴 건 아닌가 한다. 아Q라는 개인을 이념적으로 보지 않고 근원적인 생명으로서의 요구와 욕구와 고통 이런 것들을 어떻게 포착해 낼 것인가에 고민한 흔적들이 작품 곳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계몽주의 반열에 올려두기도 하는데, 여기서 속류적 계몽주의와 루쉰이 표방한 계몽주의는 구분되어야 한다. 루쉰이 생각하는 계몽은 힘 있는 자가 그렇지 않은 자를 계몽하는 속류적 계몽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아Q가 여전히 살아가고 있어서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참여, 깊은 공감,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참여가 마련되어 있었기에 루쉰은 이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아Q의 삶은 단순히 비판적인 풍자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
   ‘나도 아Q가 아니겠는가?’ 백 년 하고도 한 해 전인 1921년에도 이렇게 묻고 백 년 후 하고도 일 년이 지난 2022년에도 이렇게 묻는 『아Q정전』은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이다. 아울러 아Q로 살지 않을 방법을 찾는 반성의 계기로도 충분한, 의미 있는 책이다. 인간의 영혼의 문제와 사회적인 삶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여전히 묻고 있는 『아Q정전』은 그래서 그레이트 북으로 꼽을 만한 책이다. 특히나 고통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무엇보다 중요한 오늘날 아Q가 쏟아내는 아웃사이더로서의 방백에 차분히 귀 기울일 일이다.

 

문선영 서평위원/동아대·국문학

동아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시인·문학비평가. 부산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국문학(현대시)을 전공하였다. 1990년 『문학예술』 제1회 신인상 시 부문 당선, 1991년 『심상』에 평론으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는 『익숙한 소리』(시집), 『현대시와 문화의식』, 『한국전쟁과 시』 등이 있으며, 그 외 공저로 『한국 현대시와 패러디』, 『한국 서술시의 시학』, 『한국 현대문학의 성과 매춘』, 『몸의 역사와 문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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