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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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사진
  • 박영택·경기대 교수/미술 평론가
  • 승인 2020.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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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택의 그림이야기
▲ 이선주, Memorabilia 2-6 , 칼라사진, 2018
▲ 이선주, Memorabilia 2-6 , 칼라사진, 2018

사진은 이미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가시적 세계를 다시 보여준다. 따라서 사진은 이른바 인증성, 객관성, 사실성을 주된 특성으로 거느린다. 그러나 오늘날 사진이 세계와 반드시 등가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투명하고 객관적인 지시체라고 여기는 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우선 사진은 분명 세계/사물을 재현하지만, 여기에는 작가의 주관적인 시선, 해석, 의도, 그리고 사진에 대한 여러 이해와 이에 따른 방법론이 개입하면서 다양한 굴절을 겪는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사진을 보는 즐거움, 그리고 사진이 현대미술과 구분 없는 중요한 매체로서 경험되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디지털사진이 보편화되면서 사진의 조작과 연출이 무척이나 용이해졌다. 아울러 작가들은 사진의 재현에 대한 다양한 이의를 제기하고 있고 그러한 기능에서 벗어나려 시도한다. 이미 오래전 일이다. 

이선주의 사진은 너무 밝거나(흰색) 너무 어두워서(검은색) 사진에 담긴 내용/대상을 거의 파악할 수 없도록 하는 사진이다. 작가는 사진이 지닌 일반적인 덕목을 의도적으로 무화시키거나 훼손한다. 분명 특정 대상을 촬영한 정물이지만 얼핏 봐서는 사진에 담긴 대상이 좀처럼 시선에 잡히지 않거나 가려져 있어서 가시적 시계視界에서 줄줄 새어나가는 느낌이다. 순간 인지할 수 있는 대상이 한 눈에 걸려들지 않기에 망막은 초조함과 조바심을 느끼며 다소 무력해진다. 흔히 사진이 특정 대상을 다시 보여주고, 그것도 대체로 멋지고 선명하게 재현하는 것에 반해 이 사진은 그러한 기대치를 의도적으로 잠재우는 편이다.

따라서 이선주의 사진은 한눈에 걸려드는 사진이 아니라 찬찬히, 주의 깊게 표면을 더듬어 그 안에 담긴 대상(정물)을 비로소 하나씩 찾아 나가는 여정을 독려시키는 사진이고(너무 희고 검은 사진들) 보이는 것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 이면에 담겨있는 실체에 대해 사고하게 한다. 또한 지나치게 희고 검은 색조로 물든 표면은 사진을 예민한 색 층으로 환원시켜, 인지하는 대상 이전에 우선적인 색의 포화로 압도하는 황홀감, 충격을 안기거나 그러한 색 층이 동반하는 다분히 낯선 감수성, 촉각적인 마티에르와 접촉시킨다. 이처럼 시각 이외의 또 다른  감각들이 사진의 피부 위로 떠도는 편인데 이는 망막에 저당 잡힌, 대체로 시선에 결부된 사진을 다층적인 감각의 관여 아래 풀어헤치는 편이다.

ⓒ 이선주
ⓒ 이선주

이선주는 여행을 통해 특정한 사물을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미국에 체류하던 시기, 우연히 수집하게 된 밀크 글래스 혹은 포장지는 작가의 지난 삶의 동선과 여행의 추억,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사물로 기술된 텍스트이자 그것들을 불현듯 호출해내는 매개들이다. 작고 아름다우며 저마다 다양한 형태를 지닌 컬렉션이자 동시에 특별할 것 없는 비교적 소소한 수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밀크 글래스는 작가에게 있어 사라져버린 지난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가는 이상한 오브제들이기도 하다. 문득 자신의 수집품을 볼 때마다 그것으로 인한 추억들이 스멀거리며 피어날 것이다. 그러나 밀크 글래스는 기억하고자 하는 것과 사라지려는 것 사이에 끼어있으면서 기억이 결코 단일하거나 동질의 것이 아님을 일러주기도 한다. 또한 밀크 글래스는 서서히 낡아간다. 상품의 표면에 붙은 라벨처럼 지워져 간다. 명백한 사실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가시적인 존재들은 결국 시간의 흐름에 의해 격렬하게, 혹은 현기증 나게 사라져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라지는 사물의 끝은 어딘지 멜랑콜리하다. 사라짐은 존재가 겪는 독특한 사건인데 이는 사물과 존재 모두의 불가피한 운명이다. 그래서 모든 실재의 확고한 본질은 결국 공허다. 존재했던 것들은 사라지기에 그렇다. 인간은 그 사라짐을 응시하고 그에 대해 사유하는 유별난 존재다. 이때 현재의 삶 속으로 설핏 죽음의 그림자가 들이닥치고 현실계를 이루는 완강한 사물들의 배후가 유령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생명으로 충만한 현재의 삶이 깨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세속적인 시선이 거두어지는 어떤 순간이 찰나적으로 번쩍이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사물의 현상적 측면이 아니라 그 이면, 즉 사물의 본질을 보는 시선에 접근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여행의 과정에서 수집한 다양한 밀크 글래스를 소재로 한 일련의 정물 사진은 다분히 ‘바니타스’ 정물화의 흔적이 감지되기도 한다. 물론 개인의 기억과 그로 인한 심리적 상태가 좀 더 강하게 밀고 들어온다.

작가는 밀크 글래스를 배치한 후 밀크 글래스 및 지지대와 주변의 모든 것을 하얗게, 검게 도포했다. 분사된 물감의 가루, 입자들이 사물의 피부를 덮어버리고 그 본래의 특징들을 억압하고 은폐했다. 이는 단호한 색칠, 붓질에 해당한다. 백색으로 물든 사진은 작가의 지난 시간을 봉인하고 있는 밀크 글래스가 맹렬하게 지워지는 중이자 기억 속에서 점차 희박해지면서 흐려지는 순간을 표현한 것이다. 짙은 어둠 속으로 소멸하는 듯한 사진 역시 유사한 맥락이다. 이것들은 작가의 언급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것이자 ‘Black out’ 되는 일이기도 하다. 바로 그러한 문장의 시각화, 심리적인 상태의 색채화에 해당한다. 과거의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었던 밀크 글래스 역시 너무 환하게 눈부신 공간 속에서 사라지고 너무 어두운 공간 안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한때 유의미했던 것이 돌연 무의미해지거나 망각되는 과정이다. 

이처럼 이선주의 작업은 자신의 사적인 수집품을 매개로 사진에서 요구하는 혹은 사진이 당연히 제시하는 재현의 기능을 슬쩍 거둬들인 자리에 또 다른 감각을 부단히 불러내는 한편 사진에서의 색채와 질감의 힘, 그리고 통감각적인 매개로서의 가능성을 찾는 점 등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작업이다. 나로서는 흰색과 검은색으로만 절여진 듯한 컬러 사진, 그러나 그 안에 서서히 불길하면서도 매혹적으로 드러나는 밀크 글래스를 ‘겨우’ 보여주는 작업이 무척 아름다웠다. 그것은 회화와 사진의 경계가 녹아내린 지점에서 보는 이의 눈을 멀게 만들면서 동시에 다른 감각을 죄다 일으켜 세우는 힘으로 긴장되어 있다.


박영택·경기대 교수/미술 평론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뉴욕 퀸스미술관에서 큐레이터 연수를 마쳤다. 금호미술관 큐레이터를 거쳐 1999년부터 현재까지 경기대학교 서양화·미술경영학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전시분석, 미술비평, 큐레이터십, 이미지 읽기, 현대미술의 이해 등을 강의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식민지시대 사회주의미술관의 비판적 고찰」 「한국 현대동양화에서의 그림과 문자의 관계」 등이,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테마로 보는 한국 현대 미술』을 비롯해 다수가 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 서울시립미술관 운영위원, 한국미술품감정연구원 이사, 정부미술품 운영위원, 아트페어 평가위원, 2020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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