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개화 이항대립 틀을 넘어 역사적 맥락에 입각해서 대한제국을 탐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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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개화 이항대립 틀을 넘어 역사적 맥락에 입각해서 대한제국을 탐색하다
  • 김태웅 서울대학교·역사교육
  • 승인 2022.03.0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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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 나의 테제_ 『대한제국과 3·1운동: 주권국가건설운동을 중심으로』 (김태웅 지음, 휴머니스트, 752쪽, 2022. 01)

 

이 책은 소박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25년 전 한국 근대 지방재정개혁을 다룬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한 뒤 곧바로 대한제국의 헌법이라 할 <대한국 국제> 문제를 다룬 논문을 잇달아 발표했다. 이들 논문은 지방재정개혁과 헌법 제정 검토를 통해 기존의 연구 경향과 달리 대한제국 체제의 근대성과 자주성을 밝히는 데 주안을 두었다. 

하지만 30대 후반으로서 한국근대사에 대한 이해 체계가 여전히 미비하고 자료를 다방면으로 섭렵하지 않은 까닭에 갑신정변-갑오개혁-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애국계몽운동으로 연결되는 근대 민족운동에 대한 학계의 단선적인 이해체계를 조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예컨대 이른바 통설의 산물이라 할 개설서나 초‧중등 교과서에서는 일부 선학들의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광무개혁’ 명칭이 이들 교재에 제시되기는 하나 전체적인 흐름은 만민공동회 운동을 탄압한 광무정권의 보수적 개혁이라는 다소 애매모호한 평가로 일관되었다. <대한국 국제> 역시 광무정권이 근대 주권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주권의 소재와 집행 방식을 법제적으로 규정한 한국 최초의 헌법으로 평가하기보다는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제정된 악법이라는 주장이 이들 교재의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필자가 발표한 일련의 논문은 대한제국의 보수반동성을 변호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기에 충분했다. 특히 농민들의 변혁 움직임을 봉쇄한다거나 국권 상실의 책임자라는 낙인이 워낙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주류 역사학계는 물론 비주류 소장 역사학자들로부터도 외면받지 않았나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필자 자신이 한국근대사에 대한 안목과 식견이 부족하고 인식이 체계화되지 않은 채 대한제국 문제를 다루다보니 광무정권을 일본의 침략에 맞서는 대항마로 설정한 데 따른 결과였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 실마리가 새로운 주제를 찾는 가운데 뜻밖에 가시화되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한 필자는 고등학교 교사로 잠깐 재직하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교육 현장과 소통할 수 있는 매개로서 인물사 교육을 떠올렸고 곧바로 근대의 풍운아 김옥균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주지하다시피 갑신정변 3일 천하의 주인공이자 청일전쟁 직전에 홍종우에게 피살된 비운의 혁명가였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당연히 통설대로 김옥균 인물사 교육이 초등학교 현장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 인물사 교육을 다루기에 앞서 과거에 식자층의 김옥균 인식을 검토하였으며 필자의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갔다. 

 

                             웨스턴 조선호텔에 남아 있는 대한제국기 환구단의 황궁우 건물<br>
                     웨스턴 조선호텔에 남아 있는 대한제국기 환구단의 황궁우 건물 (사진=필자 제공)

김옥균은 갑신정변 직후부터 대한제국 국망 직전까지 친일파이자 역적으로 규정되었다가 일제강점 이후에는 문명개화의 선구자이자 조국의 근대 개혁을 추진하다가 희생당한 애국자로 추앙되었다. 여기에는 갑신정변에 가담한 서재필은 물론 윤치호, 이승만을 비롯한 여론주도층의 평가가 한몫을 했다. 심지어 사회주의자들조차도 이러한 평가에 동의했다. 그러나 김옥균의 다른 측면도 보였다. 즉 김옥균은 일본의 민권운동가이자 훗날 국권론자로 변신한 인물들로부터 아시아의 평화를 애쓰다 살해당한 아시아주의자로 평가되었고 심지어 이른바 대동아공영을 실현하기 위해 희생당한 선각자로 추앙되었다. 

그럼에도 해방 후 김옥균은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 김일성은 1950년대 후반 김옥균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친일파 혐의를 벗겨주었다. 자신들의 이른바 사회주의 혁명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갑신정변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설정한 가운데 그를 부르주아 개혁을 추진한 애국자로 추켜세웠던 것이다. 대한민국 학계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본격화하면서 김옥균에 대한 평가는 부정보다는 긍정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후에도 이러한 기조는 일부 선학들의 문제 제기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필자는 우리 학계를 덮고 있는 이른바 수구‧개화 이항대립 틀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아무리 새로운 사료를 발굴하고 기발한 해석을 한다한들 이러한 틀을 고수하고 있는 한 좀처럼 역사의 실체에 다가갈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필자와 일부 연구자들은 이러한 틀이 역사적 사건을 직접 겪거나 서술한 당대인들의 인식에 입각하기보다는 후대 문명개화론자들 또는 부일협력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호도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산출물임을 입증하기 시작했다. 나의 소박한 문제의식이 이들 연구자의 성과 덕분에 이제는 좀더 명료해졌다. 그리고 필자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주된 소재로 다루었으며 이른바 온건개화파의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어윤중을 다시 한번 주목하였다. 그것은 그 자신이 무엇보다 급진개화파와 달리 외세의 지원을 받아 선동이나 폭력적 수단으로 조급하게 개혁을 추진하기보다는 당대의 시대적 과제와 함께 현실적 여건을 감안하면서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합법적이고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윤중은 정약용의 실학 전통을 이어받은 가운데 1880년대 초반 일본과 중국을 방문하여 서구 근대 문명을 수용하여 부국강병론‧상업입국론‧교육입국론을 뼈대로 삼은 변법자강론을 펼쳤다. 또한 그는 국력의 신장과 민생의 안정을 고려하여 대국주의를 취하기보다는 소국주의를 취했으며 스위스 같은 중립국을 본보기로 삼아 급변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독립과 주권을 보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1880년대 이래 재정개혁을 추진한 끝에 갑오개혁기에는 조세제도 개혁을 비롯하여 국가재정을 개혁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그의 이런 개혁활동이 아관파천의 여파에 따른 피살로 중단될 위기에 처했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그의 개혁방향을 고스란히 계승하였다. 그렇다면 그를 두고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친청파라든가 김홍집 내각에서 활동한 친일파라는 극단적인 낙인은 과감하게 지워야 한다.
 

                            인천 짜장면 박물관. 한말에 세워진 공화춘 건물에 찍은 것이다<br>
                               인천 짜장면 박물관. 한말에 세워진 공화춘 건물에 찍은 것이다

나아가 필자는 이러한 개혁 활동의 철학적 원천이 조선국가 개창 이래 정부 관료와 식자층들이 견지해 온 『중용』의 ‘시중’(時中)과 『주역』의 ‘변역’(變易)이라는 유교적 논리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혔다. 즉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혁을 추진하되 당대의 역사적‧사회적 조건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제도를 변통한다든가 체제를 변혁하고자 하는 역사적 전통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논리에 입각한 시무개혁론은 시대 변동과 사회적 요구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분출되었다. 

박은식과 신채호에서 볼 수 있듯이 유학 내부의 이러한 변화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대한제국 역시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의 침략과 내부의 도전 속에서 법제를 정비한다든가 양전지계사업을 추진하고 산업도시 서울을 조성하고자 했다. 그러한 개혁의 궁극적 목표는 주권국가의 건설이었다. 물론 광무정권이 개혁의 구심점으로서 당대의 여러 개혁론을 충분하게 수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여타 정치 세력을 탄압함으로써 자신의 개혁 기반을 스스로 축소한 측면이 적지 않다. 이어서 1905년 을사늑약을 거쳐 1910년 일제에게 주권을 송두리째 강탈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는 결과론으로 접근할 사안이 아니다. 더욱이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인식 틀로 재단해서는 안된다. 비록 대한제국의 여러 개혁이 외세의 침략과 내부 동요로 좌절되었을지라도 이 시기에 성장하거나 활동했던 인물과 그들이 체험했던 역사적 현상은 대한제국 체제와 떼래야 뗄 수 없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3‧1운동에 참가했던 각계각층의 인물과 청산리 전투에 참가한 군인들이 어떤 체제 속에서 경험하며 성장하였는가. 

대한제국은 이후 역사에 많은 부채를 전가하기도 하였지만 적지 않은 자산도 넘겨 주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보이는 ‘대한’이라는 국호는 이러한 체험의 산물이 아니던가. 후속 세대는 민주공화정 수립을 통해 대한제국의 한계를 극복하면서도 국호를 계승하여 자신의 법제적 정통성과 신국가 건설의 역사적 기반으로 삼지 않았던가. 오늘날 대한민국 역시 그러한 선상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오리엔탈리즘의 조선판이라 할 수구‧개화 이항대립 틀에 대한 창조적인 전복은 민족주의‧근왕주의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맥락적 이해에 근거한 과학적인 접근의 결과물인 셈이다.


김태웅 서울대학교·역사교육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공저), 『어윤중과 그의 시대』, 『신식 소학교의 탄생과 학생의 삶』, 『한국사의 이해』(공저), 『이주노동자, 그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왔나』, 『국사교육의 편제와 한국근대사 탐구』, 『우리 역사 어떻게 읽고 생각할까』(공저),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6: 근대』, 『한국근대 지방재정 연구』(2013년 두계학술상 수상), 『우리 학생들이 나아가누나』 등이 있으며, 박은식의 『한국통사』를 우리말로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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