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러시아 억지 실패 이후: 우크라이나 사태가 동아시아에 주는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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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러시아 억지 실패 이후: 우크라이나 사태가 동아시아에 주는 함의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3.06 1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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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I 우크라이나 이슈브리핑]

 

국제사회의 우려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2022년 2월 24일,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내 최대 규모의 포격과 미사일 공격을 우크라이나 동부, 남부, 그리고 북부 3면에서 일제히 퍼부으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됐다. 군사훈련을 빌미로 작년 4월과 11월, 10만 명이 넘는 대규모 병력을 국경지대에 위협적으로 배치하며 구소련 국가들의 나토(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 신규가입 중단과 동유럽, 코카서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나토의 군사 행위 중단을 요구해온 러시아는 결국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선택했다. 

동아시아연구원(East Asia Institute: EAI)은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가 동아시아에 주는 함의를 논의하기 위해 특집 이슈브리핑 시리즈를 기획했다. 시리즈의 첫 보고서에서 김양규 동아시아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이번 사태를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의 억지전략 실패로 규정하고, 그 원인을 러시아의 기정사실화 전략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정치적 징벌실행력의 약화로 설명한다. 아울러 억지 실패가 반드시 방어 실패로 귀결되지는 않을 수 있으나,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중국과 북한이 미국 동맹체제가 가진 억지력을 오판하여 동아시아에서 도발에 나서지 않도록 적합한 징벌실행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제언한다. 

아래에 이슈브리핑의 내용을 발췌 소개한다.

 

이 이슈브리핑은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가 동아시아에 주는 함의를 미국의 억지력 약화 차원에서 살펴본다. 최근 국제안보이론에서 논의되는 “기정사실(fait accompli)화” 전략과 “징벌실행력(feasibility of punishment)”에 초점을 맞추어, 러시아가 2014년 크림반도 병합에 이어 이번에도 “확전 사다리(Escalation Ladder)”의 몇 단계를 뛰어넘는 과감한 도발에 나설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하고, 이번 미국의 대러시아 억지 실패가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북한의 오판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해 살펴본다.

I. 러시아의 기정사실화 전략과 억지 실패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는 몇 가지 측면에서 2014년 크림반도 병합과정을 상기시킨다. 우크라이나 나토 가입 문제로 불거진 이번 위기에서도 러시아는 무력 사용의 배제와 협상에 의한 문제해결을 강조하고 병력을 철수시키는 모습까지 연출하다 기습적으로 돈바스 지역 내 분리주의 세력들을 독립 국가로 승인하며 평화유지를 명목으로 러시아군을 우크라이나 영토로 진입시켰다.

푸틴의 이런 행보는 미어샤이머가 이야기한 “제한적 목표 전략(limited aims strategy)”에 해당한다. 적의 영토 중 일부만을 기습적으로 점령하여 전면전을 피함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하는 반면, 상대방이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소모전을 치르게 만드는 전술이다. 알트만(Dan Altman)은 이를 “기정사실화 전략”이라고 부른다. 1918년부터 2018년 동안 영토문제를 둘러싼 국제분쟁 151개 사례를 연구한 논문에서 그는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적국 영토 전체의 점령을 목표로 하는 분쟁은 급격하게 감소했고, 이러한 경향은 1975년 이후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이는 푸틴의 기정사실화에 의한 현상변경 시도가 21세기 국제분쟁에서는 상당히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방어국이 레드라인을 설정하고 억지 태세를 갖추고 있을 때 도전국이 이 같은 기정사실화 전략을 구사하면 방어국은 대응책을 마련함에 있어 상당히 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알트만은 도전국이 이런 기정사실화 전략을 취할 때 방어국이 도전국의 현상변경 시도를 처벌하고자 하는 ‘의지’를 얼마나 강하게 가지고 있느냐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고, 도전국의 “계산된 군사력 사용에 대한 (방어국의) 보복위협(threats to retaliate for clear-cut uses of forces)”이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II. 억지실패의 원인: 징벌실행력의 부재

기정사실화 전략은 도전국의 입장에서 방어국의 억지 태세를 우회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를 방어국 입장에서 뒤집어 생각해 보면, 결국 세밀하게 계산된 도전국의 현상변경 시도에 대응할 수 있는 적절한 징벌 능력을 방어국이 보유하고 있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알트만의 연구결과를 기준으로 생각해 볼 때, 억지 실패는 대부분 방어국이 현상을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발생하기보다는, 방어국의 억지 태세를 교묘하게 우회하여 도발하는 도전 행위를 징벌할 수 있는 정교한 대응 ‘능력’을 방어국이 보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최근 연구는 바로 이 ‘능력’을 “집행력(ability to follow through)” 혹은 “징벌실행력(feasibility of punishment)”이라고 부른다. 방어국이 이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군사적 차원(military feasibility)에서 “신속투사능력”과 정치적 측면(political feasibility)에서 “정책실행력”이 필요하다. 즉, 방어국이 설정한 레드라인에 매우 근접해 있으나 명백하게 그 선을 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회색지대 영역에서 도전국이 현상변경을 시도할 때, 이를 그 도발 수준에 부합하는 효과적인 징벌수단을 사용하여 신속하게 격퇴할 수 있는 ‘전력투사능력(power projection capability)’과, 이같은 위기 고조 행위에 대해 국내정치적 반대를 극복하고 격퇴정책을 즉각 집행할 수 있는 ‘정치력’이 있어야만 방어국은 안정적인 억지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신속투사능력과 정책실행력 가운데 한가지라도 결여하고 있을 때 방어국은 억지 전략 구사 단계에서 공언한 ‘용납하기 어려운(unacceptable) 비용’을 억지 실패 이후 도전국에 실제로 부과할 수 없게 된다. 이 경우 도전국은 기정사실화 전략을 구사해도 아무 비용을 지불하지 않게 되므로 목표로 했던 전략자산을 쉽게 차지할 수 있다. 따라서, 만약 안보위기가 더욱 심각한 문제로 악화하지 않도록 방어국이 억지 전략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신속투사능력과 정책실행력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를 도전국에게 보내게 되면, 도전국은 보다 대담하게 현상변경 시도에 나설 수 있게 된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도 이런 차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바이든(Joe Biden) 미 대통령은 세 차례 푸틴에게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미국의 “강력한 경제적 조치 및 기타 조치들(strong economic and other measures)”을 야기하게 될 것이고, 미국과 동맹국의 “신속하고, 혹독하며, 연대된 대응(swift, severe, and united response)”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단호한 대응에 따라 신속하고 심각한 비용(respond decisively and impose swift and severe costs)”을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경고했다. 이는 명백히 미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막기 위해 억지 전략을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이같이 국가수반이 공식석상에서 여러 차례 반복하여 레드라인을 설정하는 경우, 차후에 이를 번복할 때 높은 “청중비용(audience cost)”를 치르게 되기에 이는 억지 실패 시 방어국의 징벌 의지를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특히, 선거에 의해 행정부의 수장이 되는 민주주의 국가의 리더가 높은 청중비용을 의도적으로 부과할 때, 그 위협의 신뢰성은 제고되고, 억지 전략 성공 가능성은 높아진다. 이런 측면에서 바이든 대통령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억지하기 위해 나름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 것이라 평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푸틴은 왜 바이든의 경고를 무시하고 우크라이나 침공에 나선 것인가? 많은 보고서들은 우크라이나에 걸려있는 러시아의 지정학적 안보이익이 매우 크고, 국제경제제재와 코로나19의 여파로 지지율이 계속 하락하는 푸틴에게 분위기 반전을 통한 국내지지 회복이 절실하며, 러시아 강대국화를 추구하는 푸틴 입장에서 미국과 나토에게 러시아의 존재감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불가피한(overdetermined) 사건인가? 푸틴의 의지가 매우 강했기 때문에 미국이 어떤 정책을 펼치든지 간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막을 수 없었던 것인가?

징벌실행력 관점에서 이번 사태를 살펴보면 꼭 그런 것 같지 않다. 첫째, 바이든 행정부는 군사력 사용 카드를 일찌감치 배제했다. 최초로 러시아에 선명한 경고 신호를 보낸 2021년 12월 9일, 나토 연합국과 상관없이 단독으로 미군 병력을 배치하여 러시아의 침공을 억지할 계획이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바이든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not on the table)”라며 분명히 선을 그었다. 이는 러시아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전략적 모호성을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 스스로 대러 억지력 강화에 필요한 신속투사능력을 가지지 않겠다고 공언한 셈이다.

둘째, 우크라이나에 러시아 침공을 막거나 효과적으로 보복할 수 있는 군사적 수단을 지원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고,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군사기술이 러시아로 흘러 들어갈 수 있으며, 우크라이나가 첨단무기들을 운용할 능력이 부재하다는 등 다양한 이유로 계속해서 대 우크라이나 무기지원을 정책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셋째, 바이든 행정부는 집권 이후 계속해서 정치력의 부재 문제를 노출해왔다. 1월 20일 여론조사 결과 바이든 행정부의 지지율은 43%로 조사되었고, 정부 정책에 대한 강한 불만도 36%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바이든 행정부에 대한 미국인들의 불만이 가중되고 있다. 결정이 더디고 추진력도 약하다고 평가받는 바이든 정부의 낮은 정책실행력을 푸틴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로 여기는지 과학적으로 검증하기는 어려우나, 이것이 미국 억지 태세 전반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바이든 행정부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막기 위해 기울인 억지력 강화 노력들은 러시아의 기정사실화 전략 추구를 막는 징벌실행력 구비의 측면에서는 뚜렷한 한계를 보이는 행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이 억지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곳은 우크라이나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번 사태를 통해 부각된 미국 억지력의 한계는 미국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른 지역에서 미국과 대치상태에 있는 잠재적 도전국들에게 중요한 변화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III. 억지실패 이후: 중국, 북한, 그리고 미국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가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주는 함의는 무엇일까? 우선 중국이 이번 사태를 바라보며 대만을 생각하게 될 것은 자명하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듯 대만이 중국이 레드라인으로 설정한 독립을 선언하게 될 때 중국 정부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지난 2014년 크림반도 병합과 같이 이번에도 러시아가 신속히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고, 이에 나토와 서방 국가들이 단호한 대응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푸틴의 기정사실화 전략이 그대로 새로운 현상(status quo)이 되어버린다면, 중국 역시 대만에 대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답습한 방식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대만 영토 주변부에 있는 동사군도, 펑후 제도, 혹은 마쭈 열도 등의 섬을 먼저 점령하는 기정사실화 전략을 펼칠 수 있다.

북한 역시 중국과 유사한 해석을 내릴 수 있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 정책실행력의 한계는 단기간에 극복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북한 입장에서는 한반도에서 자국의 전략적 목표와 협상력 제고를 위해 더욱 과감한 도발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물론 대만과 달리 한국에는 북한이 기정사실화 전술을 동원하여 전면전을 피하면서도 성공적으로 기습 점령할 수 있는 지역이 거의 없다. 그러나 미국이 약화된 징벌실행력의 문제로 강력한 군사적 보복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면, 내부단결과 고도화된 북한 군사력 과시를 위해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무력 도발을 감행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시험, 추가 핵실험, 연평도와 같은 도서지역에 대한 포격 공격, 천안함 혹은 푸에블로호와 같은 해상 경계 자산에 대한 공격 또는 나포 감행 등의 카드를 사용할 수도 있다. 북한이 이같이 위협적인 도발에 나선다고 해도, 이미 고강도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북한에게 미국이 추가로 가할 수 있는 보복 수단은 많지 않다.

그러나 대만과 한국은 우크라이나와 다르다. 비교를 위해 단순히 군사비 지출만 따져보면 2020년 기준으로 미국이 7조 7천억, 중국이 2조 5천억, 러시아가 6백억, 한국이 4백 5십억, 대만이 1백 2십억, 우크라이나가 6십억 정도를 사용한 것에서 보듯, 상기 6개국이 대략 77 : 25 : 6 : 4.5 : 1.2 : 0.6의 국력배분을 보인다. 물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군사력 격차보다 중국과 대만의 격차가 더 크다고 볼 수도 있으나, 대만은 미국의 9번째로 큰 무역파트너(우크라이나는 67번째)이고 글로벌가치사슬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의 동맹국이 아니듯 대만도 미국의 공식동맹은 아니지만, 우크라이나와 달리 대만에 대해서 미국은 대만관계법(Taiwan Relations Act)이라는 독특한 장치를 두고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다(Haas 2022/02/22). 반면, 한국은 미국의 군사동맹국으로 미군 주둔기지가 있고, 각종 첨단 정보자산, 방공체제, 및 신속투사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억지실패는 인도-태평양지역에서 미국이 더욱 단호하게 대응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미국의 억지력을 제외한 대만과 한국 자체 역량만 보아도 우크라이나와 비교할 수 없는 신속투사능력과 정책실행력을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중국과 북한이 미국 동맹체제가 동아시아에서 가지는 억지력의 크기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로 확인된 동유럽 내 미국과 나토의 약한 억지력을 기준으로 미국 동맹체제가 동아시아에서 유지하고 있는 억지력을 오판하여 중국과 북한이 대만과 한반도에서 무모한 도발에 나서지 않도록 명확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은 지역 내 미국 동맹국들과 협력하여, 중국과 북한이 추진할 가능성이 있는 기정사실화 전략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각각의 도발 수준에 맞는 징벌실행력을 구비한 뒤 이를 공개적으로 노정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와는 별도로, 향후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의 군사작전이 얼마나 성공을 거두느냐도 이후 중국과 북한의 군사전략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군사비 지출면에서 러시아의 십분의 일 수준에 불과한 우크라이나가 예상보다 훨씬 더 잘 러시아의 침공을 막아내고 있는 가운데, 해빙기가 되면 악명높은 라스푸티차 속에서 러시아의 기갑병력의 진군은 더욱 어려워지고 주요 거점지역에서 시가전도 소모전 양상을 띌 수밖에 없다. 즉, 억지의 실패가 반드시 방어의 실패로 이어지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고, 러시아는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도 결국 목표했던 것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사태를 주시하고 있을 중국이나 북한도 섣부른 도발에 나서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지구 반대편 남의 나라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셈이다.

 

김양규 동아시아연구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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