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가 - 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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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가 - 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 승인 2022.02.27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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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설 연휴 동안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전편을 연속 방송했다. 유혹을 떨치지 못해 하던 일을 미뤄두고 몇 년 만에 명작 드라마를 다시 감상했다. 전에 보고 잊어버린 것인지, 줄거리를 따라가느라 미처 보지 못한 것인지 모르나 새로운 생각거리를 많이 얻었다. 제도는 철폐되었다 해도 신분제의 오랜 전통이 골수에 박힌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 왕부터 백정에 이르는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조국에 대해 갖는 애정이나 믿음 등등. 지금의 나와 다른 상황, 조선 말기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삶이 지금 내 삶과 자연스럽게 대비되었다.

이번 방학 때 번역한 러시아 첩보 소설도 그러했다. 소련 정부의 전폭적 지원 속에 공부하고 연구해 살인 독가스를 개발하는 화학자가 주인공이다. 그는 자랑스러운 조국을 위한 화학 무기 연구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가 받은 교육이나 그가 처한 업무 상황은 조금의 의혹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체제 붕괴 후 더 이상의 연구가 불가능해지자 자기의 분신인 독가스를 들고 망명하게 된다.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서 태어나는지는 개인이 선택할 수 없다. 그런데도 선택 불가능한 그 요소는 개인이 무엇을 당연하고, 무엇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게 될지를 결정해버린다. 

이후 읽게 된 이반 일리치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는 비교 대상을 더 과거로 끌어갔다. 중세 연구자인 저자는 중세라는 거울로 현재를 비춰보도록 한다. 과거라고 하면 멀리 가 봤자 150년 정도로 생각했던 내게 12세기를 현대와 대비시켜 보게끔 한다. 그리하여 ‘20세기 말에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언제나 그래왔던 것은 아니라는’(92쪽)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책은 1926년에 태어난 저자가 50~60년대에 했던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70~80년대에 했던 강연들을 묶은 것이다. 70~80년대에 저자가 포착한 문제들은 21세기인 지금,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해결된 것 없기에 현재 시점으로 읽는 데 아무 무리가 없다. 그리고 강연을 위한 원고답게 물 흐르듯 내용이 전달되어 더 뭉클한 마음으로 읽게 된다.

저자는 공용의 공간과 공용의 자원을 특징으로 했던 전통문화가 ‘발전’이라는 명목의 경제 체제 등장과 함께 사라지면서 우리의 삶이 팍팍해졌다고 분석한다. 각 개인은 결핍된 존재가 되었고 다수의 산업기관이 기계적으로 공급하는 여러 가지 묶음 상품에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모으는 갖가지 가구나 물건이 결코 내면의 힘을 키워주지 못한다거나, 불필요한 물품과 재화를 소유할수록 행복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윤리적 종교적 통찰을 하다가 (저자는 가톨릭 신부였다가 이후 스스로 사제복을 벗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곳은 주거의 공간이라기보다 수송 수단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에 밤새 노동력을 보관해두는 수납 창고로 바뀌어버렸다는 냉소적인 섬뜩한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죽는다’는 자동사로 표현 가능한 행동 대신 의료의 감시하에 이루어지는 살해가 만연하다는 것, 농민 사회와 초기의 도회지에서는 폐기물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등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들도 곳곳에서 제기된다.

저자의 모든 주장에 다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표준어가 교육되면서 사라지는 토착어의 가치, 교육 제도로 파괴되는 자연스러운 성장의 가능성 등에 대해서는 강연문을 넘어서 저자의 생각을 조금 더 찾아봐야 납득이 갈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내게 가능성을 제시했다. 지금 현재 우리의 문제들이 결코 해결될 수 없다고 체념했던 건 너무 짧은 역사만 고려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조금 더 먼 과거를 떠올려본다면 다른 삶의 모습이 더 큰 가능성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글쓰기 강좌를 운영하며 저서 『번역은 연애와 같아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등을 출간했으며, 『첫사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안톤 체호프 단편선』과 같은 러시아 고전을 비롯하여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홍위병』, 『콘택트』, 『레베카』 등 9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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