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관점에서 재조명한 성리학적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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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관점에서 재조명한 성리학적 사유
  • 김우형 연세대·동양철학
  • 승인 2022.02.27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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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 나의 테제_ 『한국유학의 철학적 탐구』 (김우형 지음, 소명출판, 510쪽, 2021. 12)

 

저술 동기와 주안점

올해는 ‘근대적’인 한국유학사의 효시로 간주되는 장지연(張志淵)의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1922)이 나온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 책이 나온 이후에 현상윤의 『조선유학사』(1949)가 나왔고, 이어서 배종호(1974), 이병도(1987) 등의 『한국유학사』 출간이 이어졌으며, 최근까지도 이와 같은 한국유학사 저술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20세기에 있어서 이웃인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한국은 자국의 유학사에 대한 서술이 매우 두드러진 학술상의 현상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는 지난 세기 동안 우리나라 학자들이 한국유학에 대해 부분적으로는 서양의 ‘철학’적 틀을 가지고 접근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사상사’의 큰 울타리 속에서 한국유학의 역사적 해명에 주력해 왔음을 의미한다.  

한국유학에 대한 역사적 해명은 물론 기초적 연구로서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사적 접근과 함께 철학적인 관점에서의 연구도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역사적 접근만으로는 성리학(性理學, Neo-Confucianism)의 체계적인 이해에 도달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요 성리학자들의 시대를 거스르는 철학적 사유와 정신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일정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유학사는 사상사의 틀 속에 유학의 전통적인 학안(學案)식 서술 방법을 결합함으로써, 개별 유학자들의 사상을 유학적 한계 안에서 규정하고 나열식으로 소개하는 데 그쳤을 따름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기존 유학사는 성리학자들의 초시간적인 사유를 잘 드러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시대적 사상의 흐름을 해명하는 사상사로서의 임무도 제대로 완수하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필자는 한국성리학을 조명하는 데 있어 넓은 의미의 사상사에 포함되는 유학사의 관점에서 과감히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즉, 주요 성리학자들을 각자 나름대로 ‘철학하기(philosophizing)’를 수행했던 사상가, 말하자면 당시 시대를 앞서간 철학자로 간주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접근법이 지니는 가장 큰 장점은, 성리학을 단지 지나간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살아있고 유의미한 철학적 사유의 자원으로서 바라보도록 이끌 수 있다는 점이다. 유학사는 사상의 역사를 대상화할 뿐이지만, 철학적 접근은 성리학적 사유가 한국철학의 전통으로서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지니고 있음을 자각하도록 도울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성리학자들의 사유를 철학적 관점에서 재조명함으로써 독자의 철학적 상상력과 탐구욕을 자극하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성리학적 사유의 연원과 복권(復權)

성리학은 우리가 그동안 외면해왔고 잊고 싶어 했던, 혹은 그 가치를 인지하지 못해서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사유다. 흔히 그것은 조선의 망국(亡國)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리학은 조선의 망국과 논리적인 관련성을 지니지 않는다. 오히려 성리학은 철학적인 사유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그것을 다시 복원해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철학적 사유로서의 성리학은 동아시아 철학사와 연결되어 있고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때문에, 조선시대 성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 송대(宋代)의 정주(程朱)성리학 - 중국 송대 신유학 철학자인 정이(程頤)와 주희(朱熹)를 합쳐서 부르는 말 - 부터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이 책은 한국성리학에 앞서 정주성리학을 개괄적으로 검토하였다. 그것은 한국유학이 ‘주자학 일색’이라는 이전의 잘못된 견해를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한국성리학은 정주성리학의 사유를 비판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대안을 모색했던 철학적 탐구와 모험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정주성리학의 철학적 문제와 사유는 어떤 것인가? 정주성리학은 11세기 동아시아에서 주류 형이상학의 지위에 있었던 도교와 불교의 본체론(本體論)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사상이다. 여기서 노불(老佛)의 본체론이란 우주와 세계의 근본이 되는 하나의 실체를 상정하는 사상이라 하겠는데, 그것은 체용(體用, 본체와 현상)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사유라 할 수 있다. 정주성리학은 이러한 본체론적 사유를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서 심물(心物, 마음과 사물) 관계, 즉 주체와 객체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인식론적 사유로서의 지각론(知覺論)을 제시했던 것이다. 주희는 이러한 지각론적 사유와 연결되는 도덕철학으로서의 인심도심론(人心道心論)을 구상하게 된다. 감각 지각으로서의 ‘인심’과 도덕적 지각으로서의 ‘도심’을 구분하고 인심은 도심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보는 주희의 도덕이론은 이전의 그 어떤 도덕학설과도 다른 독특성을 지닌 것이었다.

 

               사단칠정논변을 촉발시켰던 「천명구도」(퇴계집 권41)

조선성리학의 전개는 이와 같은 지각론과 인심도심론이라는 심성론의 두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주희의 논리 체계에 국한되거나 한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성리학은 주희의 철학적 문제와 해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 대안을 모색했던 사유의 모험들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어, 저 유명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辨)은 성리학적 사유의 두 유형이 대조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계기였다. 이황(李滉)의 주리(主理)론과 이이(李珥)의 주기(主氣)론은 지각론의 상반된 두 입장을 의미한다. 비록 오늘날 일부 연구자들은 주리와 주기 개념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성리학에 대한 편견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인식에 근거한 것이 못 된다. 주리와 주기는 실상 철학적 사유의 두 가지 유형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주리적인 사유는 자연법칙이나 도덕법칙 등 법칙에의 지향성을 띠며, 선험적인 이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입장이다. 반면, 주기적인 사유는 선험적인 원리나 법칙보다는 경험적인 질료나 추론에 의해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경향을 보이며, 경험적 자료와 데이터를 중시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적 맥락에서, 주리론은 행위의 동기를 중시하는 동기주의(motivationalism)로써 인심도심을 설명하는 반면, 주기론은 결과를 중시하는 결과주의(consequetialism)적 입장에서 인심도심론을 구성하고자 한다. 나중에 정약용(丁若鏞)은 이러한 지각론적인 두 사유를 비판-지양하면서 덕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덕 윤리학(virtue ethics)을 제시하게 된다. 

성리학적 사유의 이 같은 전개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시사점을 준다. 송대 정주성리학은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도덕론을 비판하고 지각론과 인심도심론의 새로운 사유를 제시했던 ‘철학하기’ 였다면, 조선성리학은 정주성리학의 지각론과 인심도심론을 주리와 주기의 입장에서 각각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했던 ‘철학하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의 ‘철학하기’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철학적 사유로서의 성리학에 진지하게 접근해보는 것은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의 ‘철학하기’는 어떤 것이어야 할지에 대해 힌트를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김우형 연세대·동양철학

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 연세대학교에서 독문학과 철학을 수학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 연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주희의 지각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주희철학의 인식론-‘지각(知覺)’론의 형성과정과 체계』, 『새로운 유학을 꿈꾸다-내일을 위한 신유학강의』, 『심경철학사전』(공저), 『성리학의 우주론과 인간학』 (공저) 등이 있고, 『주자어류(권1~13)』 (공역) 등의 역서 외에도 다수의 논문을 썼다. 주요 관심사는 송대성리학과 조선성리학의 인식론과 도덕철학, 가치론적 형이상학의 체계적인 이해와 현대적 의미 탐색에 있으며, 근래에는 동아시아와 한국의 근현대 철학사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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