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 이상한 중늙은이가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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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 이상한 중늙은이가 하나 있다
  •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22.02.27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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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명의 생활에세이]

우리 동네에 이상한 중늙은이가 하나 있다. 아파트 테니스장을 언제나 배회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냥 배회하면 일 없을 텐데 테니스회 회원도 아니고 테니스를 치는 것도 아니면서 코트 출입은 매일 출근하는 코치 다음으로 자주 한다. 서너 해 전부터 출몰하는 것 같은데 나와 있는 회원들한테 괜히 말을 걸고 안마를 해준다는 둥 하면서 친분을 쌓는다. 거기까지는 좋다. 어쨌든 같은 동네 사람이니 모른 척하기도 그렇고 좀 이상하다 하면서도 사람들이 그냥 받아준다. 

그런데 문제는 회원들만 출입하게 되어 있는 라카룸 비밀번호를 어떻게든 알아내어 아무도 없는 실내에 혼자 들어가서 난로를 쬐고 심지어 라면도 끓여 먹는다. 총무가 그러지 말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그때뿐이다. 한적할 때 가 보면 그 사람 혼자 락카룸에 들어가 있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자기 말로는 명문 대학을 나오고 대기업에서 은퇴한 사람이라고 한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제법 유식하기도 한데, 쓸데없이 아는 척 말을 걸어 대꾸하기 귀찮게 만든다. 처음에는 우호적으로 대하고 대화도 하였다. 그러지 않을 까닭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락카룸에 들어가지 말라고 총무가 인상까지 써도 막무가내인 것을 보고 상대하지 않게 되었다. 보아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래도 소용이 없다. 약간 내 눈치는 보는 것 같아도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가끔 나오는 회원들은 그러지 않을 까닭을 못 느껴서인지 그에게 친절하게 대하기도 하고 비밀번호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그것이 문제이기도 하다. 테니스장 옆에 두어 평가량의 조그만 공터가 있는데, 그곳에 버려진 탁자와 의자들이 있어 춥지 않은 날에는 자기 사무실(?)로 쓴다. 조약돌과 버려진 장난감들을 모아놓고 자기 나름의 정원을 꾸몄다. 

행색은 초라하다. 20년 이상 되어 보이는 낡고 유행 지난 옷들만 입고 다닌다. 아무리 은퇴했어도 우리 아파트에 살면 그래도 중산층인데, 너무 초라해 보인다. 가족도 다 있는 것 같은데 왕따를 당하고 있나? 갈 데가 없으면 도서관도 있고 공원도 있고 1000원짜리 커피 파는 카페나 맥도날드도 있다. 같이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운지도 모른다.

이렇게 행동이 이상하니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된다. 남들이 그렇게 싫은 소리를 해도 남의 영역에 저렇게 꿋꿋하게 출근(?)하는 저 정신 상태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다른 무엇보다 너무 염치도 없고 수치심도 없고 자존심도 없는 것 같아서 나는 그를 미워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치매가 아닐까 의심해보기도 했다. 

궁금한 건 풀어야 하는 나인지라 이를 네이버 지식인에 문의했다.(나도 참!) 그랬더니 답이 올라왔는데, 이는 필시 조현병 중의 과대망상증일 거라고 한다. 과대망상증이라면 지가 잘 났다고 떠드는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과연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긴 나만 보면 대학 얘기, 법과 정치학 얘기, 자기 강의한 얘기를 떠들었던 거 보면 일리가 있기도 하다. 어쨌든 정신 병적인 문제이지 자존심이나 염치의 문제는 아닌 것 같고, 그에 따라 대응해야 할까 보다. 그 대응이라는 것이 결국 무대응이지만 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내게도 정신 문제가 있다. 여기서 자세히 까발릴 수는 없지만 일종의 강박이 있다. 아무 의미 없는 기준이나 사항을 하나 정해놓고 여러 번 확인하는 것. 예를 들면 지금 몇 시일까? 수시로 확인한다. 자려고 누웠다가 금방 잠들지 않으면 몇 시인지가 궁금해진다. 몇 분쯤 되었겠다 하고 시계를 보면 신기하게도 비슷한 시각이다. 이 능력을 좀 써먹을 데는 ... 아무 데도 없겠지. 

박근혜 정부 말기에 조윤선 씨(직책은 잊어먹었다)가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맞나?) 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 교도관(맞나? 모르는 것 투성이다)에게 자꾸 시각을 확인했다는 기사를 보고 역시 내 후배로다(후배 맞다)했던 기억이 있다. 

하여간 사람들은 이런저런 크고 작은 정신상의 문제를 안고 산다. 신체 건강과 마찬가지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나는 그 중늙은이에게 앞으로도 잘 대할 생각이 없다. 계속 모르는 척할 것이다. 좋은 사람인 척하기 싫기 때문이다. 까칠한가?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최근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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