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비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 ⟪마르크스와 함께 푸코를: 메타구조란 무엇인가⟫의 번역에 부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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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비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 ⟪마르크스와 함께 푸코를: 메타구조란 무엇인가⟫의 번역에 부쳐 -
  • 배세진 박사·정치철학
  • 승인 2022.02.2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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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마르크스와 함께 푸코를: 메타구조란 무엇인가』 (자크 비데 지음, 배세진 옮김, 생각의힘, 448쪽, 2021. 12)

 

한국에서 알튀세르 유행을 틈타 1990년대 초반 아주 반짝 소개된 이후, (제라르 뒤메닐과 공저한 ⟪대안 마르크스주의⟫의 번역 출간과 같은) 몇몇 예외를 제하고는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아 온 자크 비데라는 철학자를 왜 오늘날 굳이 읽어야 하는가? 프랑스 비판담론의 현황을 어느 정도 잘 아는 이로서 필자가 솔직히 말하자면 프랑스에서조차 몇몇 마르크스주의자를 제외하면 그에게 더 이상 주목하지 않아 왔는데 말이다. ⟪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 푸코와 함께 마르크스를⟫(오월의봄, 2020)과 ⟪마르크스와 함께 푸코를: 메타구조란 무엇인가⟫(생각의힘, 2021)의 역자로서, 또한 박사학위 논문의 중요한 두 축 중 하나가 비데의 사상이었던(다른 하나의 축은 비데의 사상과 여러 면에서 조목조목 대립되는 발리바르의 사상이다) 현대 프랑스 정치철학 연구자로서, 이는 필자 안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물음이다. 그런데 이러한 물음은 아주 최근 프랑스에서뿐만 아니라 영미권에서도 (이미 200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발리바르의 사상과 함께) 비데의 사상에 다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점으로 인해 더욱 시의적인 것이 되었다. 나는 이 짧은 글에서 ‘비데를 왜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비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알튀세르 사단 중 한 명의 자격으로 비데를 한국 지성계에 최초로 데뷔시킨 장본인 윤소영 교수가 ‘알튀세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듯)라는 질문으로 치환해 답하고자 한다.    
  
비데는 프랑스 지성계에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과 함께 상당히 늦은 나이에(비데는 1935년생이며 그의 박사학위 논문 출간은 1985년이다) 데뷔했는데, 그만큼 이 박사학위 논문에는 그의 지난 몇십 년간의 ⟪자본⟫ 연구가 농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자신의 사상 전체의 씨앗 또한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박사학위 논문, 그러니까 ⟪‘자본’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는 비데 사상 전체의 ‘시작점’인 것이다. 그런데 그의 사상의 씨앗, 모든 것의 시작점이 ⟪자본⟫에 대한 주석 또는/그리고 재구성이라는 점은 시사적이다. 이는 발리바르가 1965년 스승 루이 알튀세르와 함께 ⟪‘자본’을 읽자⟫를 집필한 이후에는 ⟪자본⟫ 자체에 대한 배타적 연구, 그러니까 정치철학 연구가 아니라 정치경제학 연구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만한 연구를 하지는 않았다는 점과 대조적이다(몇 년 안에는 발리바르의 논선집 중 ‘정치경제학 비판’ 편이 출간될 텐데, 어떤 글이 수록될지는 현재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발표된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 작업들을 고려하면 ‘정치경제학’보다는 이에 대한 정치철학적 해체, 즉 정치경제학 ‘비판’에 방점이 찍힌 글들이 수록될 가능성이 높고, 그만큼 발리바르에게 중요한 것은 비데와는 달리 마르크스의 경제사상을 하나의 사회이론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해체주의적 정치철학자로서의 발리바르가 마르크스주의를 끊임없이 해체하는 방향으로, 그러니까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 시기의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를 이론적 실천의 이론으로 구성하고자 노력했던 것과는 달리 이론, 과학, 결국 진리 그 자체에 대한 재(再)질문화를 통해 인식론적 회의주의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톺아보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과 달리, ‘정치경제학자’ 혹은 ‘사회이론가’로서의 비데는 이러한 인식론적 질문을 가볍게 건너뛰고(이것이 비데 정치철학의 약점이자 일정한 교조성의 원인이라는 점은 필자 또한 인정한다) 마르크스의 ⟪자본⟫의 진리효과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개조하고자 진력한다. 발리바르가 마르크스주의를 자크 데리다의 정신과 후기 알튀세르의 정신(결국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알튀세르 자신의 그것보다 더 철저한 사유, 결국 우발성의 유물론에 대한 긍정)에 따라 비-마르크스주의적 사상들과의 대화를 통해 해체(즉 탈구축)하는 것과 달리, 비데는 (1990년대 이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외상적 사건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비-마르크스주의적 사상들과 타협해야 할 정도로 절박했던 한국 알튀세리앵들이 행했던 것과 동일하게) 비-마르크스주의적 사상들을 흡수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개조(즉 전화)하고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이 발리바르와 비데의 현실 사회주의 몰락과 알튀세르 사망(이 두 사건 모두 1990년에 일어났다는 것은 증상적인데, 알다시피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루카치의 1923년 ⟪역사와 계급의식⟫ 출간에서 출발해 1990년 알튀세르 사망과 함께 종결된다) 이후의 분기하는 행보(서구 마르크스주의 이후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 행보라 부를 수 있는 바)의 핵심이다. 

 

                                      원서와 저자 자크 비데(Jacques Bidet)

그런데 제대로 푸닥거리 되지 못하고 그저 억압되기만 했던 마르크스의 유령이 되돌아오기 시작하면서 이 둘의 서로 다른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혹자는 이러한 마르크스 유령의 귀환 시기를 신자유주의가 지배적인 통치 이데올로기로 확고히 자리잡은 1990~2000년대(워싱턴 컨센서스의 확립)로 잡기도 하는데, 그러나 비판이론 연구자로서 필자가 보기에 마르크스 유령의 진정한 귀환은 2007~2009년 세계금융위기 이후인 것 같다. 게다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구조적, 체계적 모순을 드러냈던 이 경제위기가 2020년대의 생태위기(기후위기에서 촉발된 코로나19 팬데믹)와 결합되면서,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구조적, 체계적 모순이 극한에 달한 상황이 마르크스 유령의 귀환을 더욱 강제하고 있기까지 하다. 비데는 다른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생태위기에 대해 극도의 경각심을 발휘하면서, 지금의 상황을 ‘극현대성’(ultimodrnité)으로까지 규정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이었다면 기후위기에 따른 생태위기를 인류를 절멸시킬 것으로까지 보는 인문사회과학자나 자연과학자를 미치광이로 간주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러한 생태위기가 자연과학자들의 허황된 착각이 전혀 아니라는 점에, 그리고 생태위기로 인해 인류의 절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이들의 의견에 자연과학 밖의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한다. 그러나 자연과학자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생태위기가 항상 경제위기(더 나아가서는 정치위기)와 결합되어 전개된다는 것, 절대로 생태위기‘만’의 해법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문사회과학자의 관점에서는 어떠한 신박한 과학기술혁신으로 인해 생태위기가 해결될 수 없고, 결국 생태위기 극복의 전제는 사회적 관계의 정치경제적 변형일 수밖에 없다. 정치와 경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구조적, 체계적 모순에 대한 사유가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필자는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생태위기, 더 정확히는 자유주의 정치의 위기와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와 결합된 자연의 위기이자 인류 그 자체의 위기의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의 귀환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해체된 마르크스주의 이후의 마르크스주의, 굳이 이런 표현을 쓰자면 ‘실정적으로’ 재구성된 사회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다시 생겨나는 것이다. 발리바르 당신에 의해 마르크스주의가 진리가 아닌 진리‘효과’에 불과함을 잘 알았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바로 이 ‘효과’(그것이 진리효과이든 아니든)로서의 마르크스주의다. ‘발리바르 당신이 모든 것을 해체시킨 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발리바르의 입장에선 부당해 보일) 질문들이 끊임없이 등장할 수밖에 없고, 사람들은 절박한 정세 속에서 진리의 정치를 계속 요구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비데의 마르크스주의, 후기 알튀세르보다는 초중기 알튀세르에(게다가 ⟪역사유물론 연구⟫로 대표되는 초기 발리바르에) 준거하면서 인식론적 질문들을 무시하고 재구성해나간 마르크스주의에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식론적 질문에 대한 이러한 무시는 분명 비데의 약점이고 어떠한 교조화의 위험을 초래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약점을 상쇄할 만큼 비데는 알튀세르의 제자답게 발리바르만큼이나 철저한 방식으로 비-마르크스주의적 사상들을 마르크스주의 내로 흡수했다. 필자는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주의 해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해체 이후의 마르크스주의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설득력 있는 하나의 답변을 비데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가능한 결합임에도, 필자는 알튀세르를 매개로 비데와 발리바르를 함께 읽는 것이 이 위기의 시대에 유익하리라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마르크스주의를 제출하고 있는 이 비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지면의 제약으로 아주 간단히, 하지만 앞서의 성찰에 의거해, 필자의 단상들을 도식적으로 제시해보겠다. 첫째, 비데 작업의 핵심은 알튀세르가 제시한 방향, 즉 이론적 실천의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또는 사회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비-마르크스주의적 사상들을 마르크스주의 내로 흡수하는 것이다. 이러한 흡수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재구성, 개조, 쇄신, 결국 전화하는 것이 비데의 궁극적 목표이며, 그렇기에 넓은 의미에서 비데의 마르크스주의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하지만 샹탈 무프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의 그것과는 대립되는…)이다. 그래서 비데를 읽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비-마르크스주의적 사상들 또한 공부해야 하는데, (필자와의 대담에서의 비데 자신의 발언에 따르면)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다름 아닌 위르겐 하버마스이다(아쉽게도 필자는 하버마스에 대한 이해 수준이 낮기 때문에 비데의 하버마스 수용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를 더 해나가야 한다). 그다음이 필자의 관심사이자 두 권의 저서에 대한 번역을 통해 한국에 소개한 미셸 푸코이다. 하버마스와 푸코, 이 두 사상가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비데의 기획이 그의 메타구조적 정사각형을 통해 명확히 인식할 수 있듯 정치경제학과 정치철학을 절합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서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에 대한 비데 식의 수용(이른바 ‘혁명적 계약이론’에 따른)이 중요한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이러한 비-마르크스주의적 사상들에 대한 흡수를 통해 비데는 메타/구조론에 기반한 메타-마르크스주의를 확립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확장해 이를 하나의 사회이론으로 재구성한다.  

두 번째는 이러한 사회이론적 맥락에서 비데의 마르크스주의가 인식에서의 진리를, 더 나아가 정치에서의 진리를 긍정하는 사유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샹탈 무프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와 그 포퓰리즘에 대한 긍정에 찬동하면서,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와 우리⟫에서 강조하듯 모든 정치는 이데올로기의 공간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적 정치 이외의 정치란 불가능하다고, 결국 진리의 정치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비데는 2018년의 ⟪‘그들’과 ‘우리’? 좌파 포퓰리즘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나 곧 출간될 ⟪포퓰리즘의 빈곤! 마르크스주의의 무력함?⟫과 같은 저서에서 좌파 포퓰리즘을 끊임없이 비판하는데, 그 토대에는 이러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그 정치에 대한 ‘진리주의적’ 인식이 놓여있다. 인식론적 논쟁 속으로 진입하는 대신, 비데는 마르크스주의를 끊임없이 재구성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자신의 관점이 정당한 것임을 이론의 장 내에서 실천적으로 입증하고자 노력한다. 비데는 자본주의를 정면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 없이는 자본주의가 초래한 생태학적 파국을 넘어서는 좌파정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비데를 한 명의 세계체계론자로 읽는 것이다. 곧 <두번째테제> 출판사에서 한국어 출간이 예고되어 있는, 발리바르가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함께 쓴 1988년의 ⟪인종, 국민, 계급⟫의 발리바르 서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에 대한 세계체계론적 확장은 (한국에서 윤소영 교수가 과천연구실의 집단작업을 통해 보여주었듯, 그리고 백승욱 교수가 정력적으로 소개하고 연구했듯) 마르크스의 사유를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으로 개조하는 설득력 있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이 작업 이후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에 대한 세계체계론적 확장보다는 정치철학의 영역 내에서 마르크스의 사회이론에 대한 보편주의적 확장, 즉 복수의 보편들, 인종주의, 국민주의, 다문화주의, 문화와 종교 등에 대한 이데올로기론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미국에서 세계체계론 자체 또한, 월러스틴과 아리기의 사망 이후 그 발전이 중도반단(中途半斷)되었는데, 그러나 다행히도 현재 제이슨 무어가 생태론의 관점에서 그 바통을 이어받아 연구를 발전시키고 있다(⟪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각별한 중요성을 지니는 저서이다). 반면 비데는 하버마스와 푸코를 통해 현대의 경계 내에서 메타-마르크스주의를 재구성한 뒤, 이 현대의 경계를 넘어서는 세계체계에 대한 사유, 결국에는 극현대성의 관점에서의 생태주의에 대한 사유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사유를 역사학의 도움을 받아 전개하고 있다. 이렇게 비데는 메타-마르크스주의의 경계를 현대성 너머로까지 확장하고자 하는데, 필자의 생각에 비데가 역사학자 또는 세계체계론자가 아닌 만큼 이 작업이 이전 작업들만큼 섬세하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지만, 어쨌든 우리가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그 개요 정도는 이미 2011년의 ⟪세계-국가⟫에서 제시되었다고 판단한다. 

네 번째는 비데를 한국에서의 알튀세르 효과의 자장 내에서 읽는 것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발리바르, 피에르 마슈레, 도미니크 르쿠르, 미셸 페쇠, 이브 뒤루, 쉬잔 드 브뤼노프, 샤를르 베틀렘, 더 나아가 알랭 바디우와 자크 랑시에르까지)의 이론이 정력적으로 수입된 후, 몇몇 예외를 제외한다면 이 이론의 수용과 발전은 중도반단되고 말았다. 물론 프랑스에서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유고집 출간을 계기로(또한 앞서도 언급했던 마르크스의 유령의 귀환이라는 정세 속에서) 알튀세르가 부활함으로써 넓은 의미에서 알튀세르 학파라 부를 수 있을 이들의 사유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여러 곳에서 다시 제기되고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한국에서의 알튀세르 효과를 다시금 톺아보면서 2020년대 이후의 알튀세르 효과를 위해 비데를 이 자장 내에서 읽는 작업이, 그러니까 결국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를 읽는 것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했듯 사실 비데의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하고 있다. ⟪‘자본’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서문을 달고서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마르크스와 함께 푸코를⟫은 말할 것도 없고 최신작인 ⟪인민의 공통의 정치생태학⟫ 또한 출간과 동시에 영국 루틀리지 출판사에서 영어판 출간이 예고되었다. 최근 집필을 마친 ⟪포퓰리즘의 빈곤! 마르크스주의의 무력함?⟫ 또한 프랑스에서 출간을 앞두고 있다(이외에도 일본, 중국, 터키,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서 그의 최근 저서들이 발 빠르게 번역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초기 저서로까지 번역의 관심이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다). 비데 사상의 이러한 유행은 경제위기와 결합된 생태위기,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극현대적 위기로 표상되는 지금의 정세가 매우 엄중한 것이며, (자연과학적으로 말해) 인류의 절멸, 결국 (인문사회과학적으로, 마르크스 식으로 말해) 투쟁하는 두 계급의 공멸을 예상하는 것이라는 점을 방증한다. 그렇기에 비데 사상의 이러한 유행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대문자 이론 없이, 결국 대문자 이념 없이 세계의 변혁이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해체 이후의 실정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이러한 관심에 힘입어 연구자들이 이를 조금이라도 더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진전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면, 지금까지와는 달리 지식인들이 인민의 곁에서 세계의 변혁에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배세진 박사·정치철학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프랑스 파리대학교 ‘사회학 및 정치철학’ 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같은 학과 대학원에서 『푸코-마르크스주의와 화폐: 노동-가치, 물신숭배, 권력관계 그리고 주체화』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셸 푸코, 루이 알튀세르, 에티엔 발리바르, 자크 비데 등의 현대 프랑스 철학을 사회과학 내 문화연구의 틀에서 연구·번역하고 있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의 철학』과 『역사유물론 연구』, 루이 알튀세르의 『무엇을 할 것인가?』와 『검은 소』, 제라르 뒤메닐·에마뉘엘 르노·미카엘 뢰비의 『마르크스주의 100단어』와 『마르크스를 읽자』(공역), 자크 비데의 『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과 『마르크스와 함께 푸코를』, 피에르 부르디외·로제 샤르티에의 『사회학자와 역사학자』(공역)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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