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기관 의금부의 도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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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기관 의금부의 도사 이야기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2.02.20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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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㉗_ 사법기관 의금부의 도사 이야기


중범죄 처리를 맡은 의금부

지난 2019년 10월에 서울의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 개관 1주년을 맞이하는 특별전으로 ‘의금부 금오계첩’을 개최하여 가본 적 있다. 의금부는 잘 알려진 것처럼 조선의 대표적인 사법기관 중 하나로 현재 서울 종로 2가 SC제일은행 자리에 있었다. 금오(金吾)는 의금부의 별칭인데, 금오계첩이란 의금부 관리들이 의금부 관청에서 계 모임을 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과 거기에 참여하는 관원 명단이 수록된 계첩을 말한다. 해당 전시에는 의금부 관료들의 계회 모습을 담은 현존하는 다양한 금오계첩을 출품하여 조선왕조 의금부의 업무와 역할을 잘 보여준 것으로 기억한다.

 

<그림1> 도성도에 그려진 의금부. 종로 일대가 표시된 지도 중앙에 ‘금부(禁府)’가 의금부를 말하며, 지도 좌측 상단은 육조 거리이다. 규장각 소장 『여지도(輿地圖)』 수록.

그럼 구체적으로 의금부는 어떤 기관이었나? 의금부는 일반 평천민의 형사범죄를 맡은 형조와 달리 양반관료들의 범죄, 그리고 대역죄인이나 강상죄인 등 중범죄를 다스리는 관청으로 사극에서 종종 나오듯이 왕명을 받들어 이들 중대 범죄인의 추국(推鞫)을 담당하였다.

조선후기 의금부 고위관료로는 판사(判事), 지사(知事), 동지사(同知事) 등 당상관 4명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다른 관직을 겸하고 있어서 실제 의금부에 배속되어 주요 실무를 전담한 관리는 도사(都事)이다. 도사의 정원은 모두 10명인데, 종6품 5명과 종8품 5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밖에도 서리(書吏) 20여 명과 나장(羅將) 80여 명 등 하급 관속들이 배치되었다.


의금부 아전들의 위세와 횡포

의금부는 권력기관이라는 점에서 소속 관리들은 물론 아전들조차 목을 뻣뻣하게 하고 다녔다. 즉 도사의 지휘를 맡아 옥사 관리, 죄인 체포 등 사법행정의 잡무를 담당했던 의금부의 최말단 나장들의 횡포가 적지 않았다. 나장들은 전국을 오가며 들르게 되는 역(驛)의 역리들에게 물자와 편의를 요구하며 침학했으며, 옥을 감시하는 나장인 옥졸은 불법적으로 수감자와 가족들과의 내통을 주선하여 뇌물을 챙기기도 하였다. 심지어 사헌부에 관리가 임명되면 의금부 옥졸들은 “오늘은 비록 사헌부에 앉아 있지만, 내일은 반드시 하옥되어 우리들에게 꼼짝 못할 걸!”하며 신임 사헌부 관리를 비웃었다는 얘기가 세종대인 1433년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이처럼 나장의 위세가 대단하다 보니 일반인들이 의금부 나장을 사칭하는 범죄가 종종 발생하곤 했다.

 

<그림2> 의금부 나장의 복장. 나장은 의금부에서 죄인을 문초할 때 매를 때리거나 의금부 도사의 지휘 아래 죄인의 체포, 압송하는 일을 맡았다. 나리프치히그리시민속사박물관 소장.

그럼 의금부 건물은 어디에? 의금부 청사는 한성부 중부 견평방, 즉 앞서 말한 지금의 종로의 SC제일은행 자리에 있었는데, 이와 별도로 의금부 분소에 해당하는 당직청이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밖에 있어서 도사 1명이 당직을 서며 근무했다.
 
의금부 청사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는 죄인을 심문하고 공초를 받는 호두각(虎頭閣)이 있었으며, 그 주변에 당상관과 도사들의 근무 공간이 위치했다. 또 호두각 주변 삼면으로 옥(獄)을 두었는데, 가벼운 죄를 지운 죄수를 가둔 서쪽에 위치한 옥과 달리 동쪽과 남쪽의 옥에는 무거운 죄를 지은 중죄수를 가둔 것으로 전해진다.


도사, 무슨 일을 했나?

이제 의금부 도사는 어떤 일을 맡아 했는지를 알아보자. 휘하에 서리, 나장을 데리고 의금부의 사법행정 전반의 실무에 관여한 도사는 여러 다양한 업무를 맡았다. 구체적으로 도사가 맡은 업무를 열거하면 먼저 죄인의 체포, 압송이다. 예컨대 1478년(성종 9) 7월 평안도 도내로 이주해온 백성들을 잘 관리하지 못해 유리(流離)한다는 이유로 관찰사 이파(李坡)의 체포 명령이 떨어졌는데 이때 도사 홍호(洪浩)가 파견되었다. 의금부 도사 홍호의 품계는 당상관인 관찰사보다 훨씬 낮지만 이는 문제되지 않았다.

 

<그림3> 의금부 청사 속 도사들의 모습. 1787년 『금오계첩』 속 장면으로, 그림 좌측 상단에 앉아 있는 열 명의 관리가 도사들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국왕의 사사(賜死) 명령을 전하는 임무도 도사가 맡았다. 생모 윤비의 폐위를 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중에 승정원 형방 승지로서 윤비에게 사약을 전달했다는 이유로 연산군은 1504년(연산군 10)에 이세좌(李世佐)에게 자진 명령을 내렸는데, 의금부 도사 안처직(安處直)은 경상도 곤양군 양포역까지 내려가 그 명령을 수행하였다. 안처직은 복명하면서 이세좌가 스스로 대들보에 목매 죽는 과정을 소상하게 연산군에게 보고하는 내용이 실록에 전한다.

죄인을 유배지로 압송할 때 도사가 압송관(押送官)으로 차출되기도 하였다. 유배죄인들이 배소(配所)로 떠날 때의 압송관은 규정상 죄인의 관직 고하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예컨대 정2품 판서급 이상 고위관료는 도사가 맡았지만, 그보다 품계가 낮은 종2품부터 정3품 당상관까지는 서리가, 그리고 당하관은 나장이 각각 맡아서 압송했다. 

죄인의 유배지를 옮길 때도 도사가 파견되었는데, 1520년(종종 15) 충청도 금산에 안치된 김정(金淨)의 배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져 그 명령을 집행하러 내려간 의금부 도사 황세헌(黃世憲)은 뜻밖에 김정의 불법을 목격한다. 즉 황세헌이 금산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를 보기 위해 김정이 고을을 이탈했던 것인데, 홍세헌의 복명으로 유배인 관리를 소홀히 한 금산군수 등이 곤욕을 치렀다.

이 밖에도 추국장 정비, 의금부 옥사(獄舍) 관리 등도 모두 의금부 도사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1615년(광해군 7) 윤 8월에는 의금부 옥사에 갇힌 죄인들이 서로 내통하며 말을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담당 도사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신참 도사의 신고식과 『금오계첩』

한편 새로 임명된 의금부 도사들의 신고식이 매우 심했음은 도사들의 조직 문화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대목이다. 조선시대 신참 관리들에 대한 신고식은 면신례(免新禮)가 불렀는데, 원래 면신례의 목적은 선후배 관리들 간의 위계를 엄격히 하고 결속을 돈독히 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애초의 취지와 달리 면신례를 거쳐 동료 관원으로 끼워주기까지 선배들이 신참 관리들을 괴롭히고 잔치를 요구하는 등의 악습이 만연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내부 규율이 엄하고 상명하복이 분명한 관청일수록 면신례가 매우 심했는데, 의금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림4> 1804년 의금부 도사 명단. 조문검(曺文檢)을 비롯한 재직 중인 10명의 의금부 도사 명단과 출생 연도, 본관, 생원·진사 시험 합격연도 등이 기재되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의금부에서 면신례를 할 때 새로 의금부에 부임받은 신참 도사들이 반드시 준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앞서 이야기한 『금오계첩』이다. 『금오계첩』에는 대개 의금부 도사들이 청사에서 모임을 갖는 장면이 들어가 있는 그림 한 점과 도사들의 명단을 적은 좌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신례 때 신참 도사는 『금오계첩』 열 부를 만들어 선배 도사들과 자기 자신이 한 부씩 나눠 가졌다. 이러한 의금부의 면신례 전통은 의금부의 내부 규정집인 『금오헌록(金吾憲錄)』에도 실려 있다. 말하자면 『금오계첩』은 열 명의 도사들이 의금부에 함께 근무했음을 기록한 기념물인 셈인데, 과연 이들이 그만큼 끈끈한 유대와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뭐든지 자발적으로 해야지 억지로 해서 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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