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롤, 구조 언어학을 분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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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롤, 구조 언어학을 분쇄하라!
  • 이윤일 가톨릭관동대·철학
  • 승인 2022.02.13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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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에게 듣는다_ 『파롤』 (조르주 귀스도르프 지음, 이윤일 옮김, 도서출판b, 200쪽, 2021.12)

 

이 책 『파롤』은 조르주 귀스도르프(1912~2000)의 La parole(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52, Paris)을 옮긴 것이다. 프랑스 일반 교양인에게 실존 현상학적 관점에서 언어철학을 소개하기 위해 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개론서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 철학자 앙리 뒤메리Henry Duméry는 이 책을 ‘작은 걸작un petit chef-d'oeuvre’이라고 상찬하기도 하였다. 

조르주 귀스도르프는 1912년 프랑스 보르도 근교에서 태어났다. 소르본느 대학에서 레옹 브렁슈비크의 지도로 철학을 공부하고, 1939년에 철학교수 자격을 획득하였다. 1948년에 가스통 바슐라르의 지도로 「자아의 발견」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같은 해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철학 개론 및 논리학 교수로 임명되어 오랫동안 봉직하였다. 귀스도르프는 2000년에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생 동안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신화와 형이상학Mythe et métaphysique』이 번역되어 나와 있다. 

귀스도르프는 에드문트 후설과 막스 셸러의 현상학, 그리고 하이데거, 키르케고어, 칼 야스퍼스 등의 실존주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은 1940년대 프랑스 철학자 세대에 속한다. 따라서 귀스도르프의 철학은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폴 리쾨르의 실존주의적 현상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실존 현상학의 입장에서 언어의 문제를 다룬다. 

『파롤』은 이미 그 제목만으로도 소쉬르의 랑그 우위 구조 언어학을 비판하겠다는 의도를 십분 담고 있다. 구조 언어학의 단점은 대체로 말하는 인간으로서의 인간 주체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소쉬르의 구조 언어학은 이후 로만 야콥슨, 레비-스트로스 등과 같은 후속 세대의 학자들을 통해 구조주의라는 철학 사조 또는 방법론을 탄생시켰다. 이때 구조주의는 의식, 시간, 역사성의 범주에서 맴돌고 있었던 현상학이나 실존철학의 주체 중심적 사유에 반대해서 주체의 해체라는 기치를 높이 들었다. 구조주의는 인간 중심적 주체가 사실은 무의식적 보편 구조의 산물이며, 따라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로부터 독립된 구조에 의해 고유한 자리와 의미가 부여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우리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적인 보편 구조를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구조주의 방법론은 무의식을 이야기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그 맥을 같이 하지만, 늘 또렷한 의식의 상태를 전제로 하는 현상학과 같은 방법론과는 상극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조르주 귀스도르프

1950년대 프랑스에서 주체의 죽음을 역설하는 구조주의 사조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을 때, 귀스도르프는 실존 현상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실존적 주체로서 ‘말하는 인간Homo loquens’의 지위를 회복시키는 데 분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귀스도르프는 역시 실존 현상학의 입장에서 언어를 바라보고자 한 메를로-퐁티, 폴 리쾨르, 방브니스트 등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언어 체계의 폐쇄성을 상징하는 공시태가 실제 언어생활과는 무관한 추상적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언어 행위는 항상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실제 상황 속에서 구체적으로 말하는 행위를 통해 세계 속의 현실과 관계를 맺는다. 소쉬르의 구조 언어학에서 말하는 개인은 랑그의 규칙에 지배받는 비자율적인 존재이지만, 실제 구체적인 언어 행위에서 말하는 주체는 상황마다 달리 파악되는 자율적인 존재이다. 특히 귀스도르프가 쓰는 ‘파롤’이라는 어휘는 개인에 의해 구체화된 ‘말해진 말la parole parlée, speech’이라는 통상적인 뜻 이외에도, ‘구체적으로 말하는 행위la parole palante, speaking’를 강조하는 면이 더 크다. 따라서 이때의 ‘파롤’은 늘 ‘말하는 인간 주체’를 암시하는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귀스도르프에게 언어는 자기의식에로 옮겨진 인간 존재로서, 말mot의 출현은 인간의 주권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건이다. 인간은 세계와 자기 사이에 말이라는 그물을 설치하고, 그것에 의해 주인이 된다. 따라서 인간이 세계 속에 온다는 것은 말을 해가기 시작한다는 것prendre la parole이고, 자신의 실존적 경험을 담론의 세계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때 낱말의 효력은 구조 언어학에서처럼 객관적인 기호가 아니라 의미의 지표라는 사실에 신세 지고 있다. 이름은 현실을 결정화하되, 사람의 태도에 따라 현실을 간결하게 표현한다. 즉, 각 낱말은 상황의 낱말이고, 나의 결정에 따라 세계 상태를 요약하는 낱말이다. 이처럼 낱말의 차원에서만 보아도 언어는 그것을 작동시키는 개인의 주도권보다 먼저 존재하지 않는다. 기존의 랑그는 언어적 활동을 전개하는 뼈대만을 제시할 뿐이다. 그렇다면 언어에 대한 반성은 파롤 안에서 자기주장의 양태로 있고, 또 세계 속의 거주의 양태로 있는 인간적 현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문제는 언어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파롤을 삼인칭인 객관적인 체계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기획인 것으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귀스도르프에 따르면, 인간 파롤은 어디까지나 주어진 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행위이다. ‘내’가 말을 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사물’과 관계 맺고, 타인과 의사소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경우 말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곧 새로운 상황을 창조하는 ‘행동’이 된다. 이 파롤의 창조적 성격 때문에 한 낱말의 의미는 단번에 고착되어 있기는커녕, 매번 재생될 때마다 새로운 것이다. 이런 파롤의 차원에서는 세계도 우리들에게 다르게 폭로될 뿐인 의미체로서 나타난다. 파롤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인 명명하기도 존재를 부르는 것이며 무에서부터 창조하는 것이다. 명명되지 않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도 존재할 수 없다. 명명하기는 일종의 존재권을 주장한다. 사물들과 존재들을 만드는 것은 말들이고, 그에 따라 세계 질서를 이루는 관계가 결정된다. 우리들 각자에게 있어 세계 속에 위치한다는 것은 환경 속에서 각 사물에 제 자리를 주는 어휘의 그물망과 함께 조화롭게 지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넓게 말해 언어는 세계 창조를 동반한다. 언어는 이 창조의 장인이다. 파롤을 통해 인간은 세계로 들어오고, 파롤을 통해 세계는 사고로 들어온다. 파롤은 세계의 존재, 인간 존재, 사고의 존재를 표출한다. 

이상의 이야기는 대략 『파롤』의 전반부 내용에 해당한다. 9장 ‘의사소통의 진정성’에서는 의사소통의 실패가 세계를 다 담지 못하는 언어, 파롤의 본래적인 성격 때문이 아니라 소통하는 인간의 책임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표현의 한계와 의사소통의 한계는 바로 개인 존재의 한계라는 것이다. 10장 ‘파롤의 세계’에서는 어휘, 문법, 논리, 의미로 이루어진 파롤의 다양한 층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파롤은 인간 실존과 자기주장의 시작이자 만남의 구성적 원리로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11장 ‘말하는 인간’에서는 다양한 언어 사용의 행태를 구분한다. 독백, 대화, 좌담, 웅변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귀스도르프는 대화를 파롤 사용의 진정한 출발점이라고 평가한다. 12장 ‘파롤의 고정 기술’에서는 문자의 발명 이후 파롤이 겪는 상황 변화를 추적한다. 인쇄술, 책, 및 기타 신기술에 의한 새로운 의사소통 매체의 출현이 앞으로 인간 실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전망한다. 마지막 13장 ‘파롤의 도덕을 향하여’에서는 철학만이 인간 파롤 전체에 대한 이해를 제공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도덕적인 차원에서 파롤에 대한 존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이면서 타인에 대한 존중임을 역설한다. 이때 파롤의 윤리는 “파롤을 항상 그 모습에 있어서 완전하고 의미 있는 파롤이게 하라.”라는 칸트식 정언명법으로 요약된다. 

실존 현상학의 관점에서 언어만을 주제로 삼아서 접근한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그리 많이 소개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이 책이 기존 분석철학 위주의 언어철학을 보완해주는 입문서의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해본다. 대체로 까다로운 철학책을 읽는다는 것은 일정 수준 정신의 경지에 도달해 계신 분들의 독서 체험일 것이기에, 소수일 독자층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윤일 가톨릭관동대·철학

숭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의미, 진리와 세계〉, 〈논리로 생각하기 논리로 말하기〉, 〈현대의 철학자들〉, 〈논리와 비판적 사고〉(공저)를 낸 바가 있으며, 번역서로는 〈콰인과 분석철학〉, 〈철학적 논리학〉, 〈인간의 얼굴을 한 윤리학〉, 〈마이클 더밋의 언어철학〉, 〈진리와 해석에 관한 탐구〉, 〈예술철학〉, 〈포스트모던 해석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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