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원형과 ‘이야기’의 위상 ― 『삼국유사의 재구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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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원형과 ‘이야기’의 위상 ― 『삼국유사의 재구성』을 말한다
  • 고운기 한양대·국문학
  • 승인 2022.02.13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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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 나의 테제_ 『삼국유사의 재구성』 (고운기 지음, 역락, 596쪽, 2021. 12)

 

졸저 『삼국유사의 재구성』은 문화콘텐츠의 한 분야인 창작소재와 관련된 연구에 발을 들인 지난 10년의 결실이다. 서문에서 밝힌 바, 『삼국유사』를 통해 ‘이야기와 그 원형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지금의 결에 맞춘 이야기의 재구성을 논리적으로 받쳐주어야’ 해서 쓴 논편(論編)이 실려 있다. 여기서는 원형과 디지털 시대의 서사에 대한 짤막한 소견을 말하려 한다.  

벌써 오래전의 일이지만,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지금의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관하는 ‘2004년 우리 문화원형의 디지털 콘텐츠화 사업’에 참여한 것은 나에게 연구의 새로운 경험이었다. 

바야흐로 문화콘텐츠의 시대가 열리는 때였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은 2001년에 설립되었다. 이듬해 문화산업진흥기본법이 발효되는데, 이 법의 31조 4항 8호 및 10호에 문화원형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여기에 근거하여 위 진흥원을 통해 시작한 사업이 ‘우리 문화원형의 디지털 콘텐츠화’였다. 콘텐츠의 개발에 앞서 소재 개발이 우선시된 것이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고,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 세계에 널리 팔자면, 가장 민족적인 것을 발굴해야 한다는 지상과제가 떨어졌다. 이는 2005년에 ‘문화원형 사업’이라는 명칭으로 바뀌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때 규정된 문화원형의 개념은 다음과 같았다. 

문화원형은 민족문화의 고유성을 표출할 수 있는 ‘한국(우리) 문화원형’과 글로벌 차원의 선험적이고 역사적인 보편성을 담보하고 있는 ‘글로벌 문화원형’의 주제를 콘텐츠화하여 권리관계(원저작권 또는 2차, 인접 저작권 등)를 주장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원형소재이다.  
  
본디 ‘민족’이라는 말이 앞에 있다가 떨어져 나갔지만, 기본 개념에서는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만, 이 규정에서는 문화원형을 한국과 글로벌로 나눈 점이 눈에 띄고, 모든 종류의 ‘원형소재’라는 용어를 들여온 점이 달라졌다. 원형을 소재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한마디로 문화원형은 콘텐츠의 창작 소재를 찾아 나갈 때에 우리 것의 순도(純度)와 정도(精度)를 가늠하는 잣대이다. 그러므로 문화콘텐츠 개발 사업이 시작되자마자 문화원형의 개념을 정하고, 구체적인 자료를 찾아내는 일이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이렇듯 문화콘텐츠가 시대의 아이콘처럼 부상한 지금, 『삼국유사』는 우리 문화원형의 좌표 속에 새로운 논의 거리를 제공하였다. 이 책이 원형 규정과 소재 개발에서 한 몫 단단히 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문화원형의 틀을 만드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적어도 13세기에 일연은 ‘자국 문화의 독자성 확보’라는 과제를 『삼국유사』 안에서 풀어보려 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이내 묻히고 말았다. 적어도 조선 왕조 500년간 이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긴 시간의 외면 끝에 같은 과제를 찾아 나선 지난 20세기의 100년간 『삼국유사』와 일연의 생각은 다행히도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그만큼 논의되었다. 이제는 자국 문화의 독자성 속에서 우리 문화원형의 모습을 찾는 데 공헌할 자료로 인식된다. 

 

                 허물어진 터에서 옛탑을 떠올리듯 이야기는 재구성되어야 한다. (경주 황룡사터)

어떤 점에서 그럴까?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 설명해 보자.

지금 ‘코로나19’로 부르고 있는 괴질의 진원지는 중국의 무한(武漢)이다. 한중에서 출발한 한수(漢水)가 양자강으로 흘러드는 곳, 강 건너 무창(武昌)과 합하여 만든 도시 무한은 『삼국지』의 강하태수 황조(黃朝)가 다스린 바로 그 강하군이다. 형주의 변경이었지만 내륙의 항구도시로 사통팔달 교통의 요충지, 이제는 인구 천만 명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이 중원의 변방에서 발생한 괴질이 단박 우리에게 전파된 것은 일도 아니었다. 무한과 인천을 잇는 비행기의 편수며 유동 인구를 보라. 전파되지 않았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다. 

중국에서 번져오는 전염병은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읽는 저 멀고 오랜 역사 속의 신라에도 중국으로부터 괴질은 때때로 쳐들어왔다.  

신라 승려 혜통(惠通)은, 승려이자 의사였지만, 그가 중국 체류를 서둘러 마무리 짓고 귀국한 데는 사정이 있었다. 당나라 황실의 공주에게 난 병을 고쳐주었는데, 병의 원인은 괴질, 몸 안에 있다 혜통에게 쫓겨 나와 이무기로 변했다. 공주는 거뜬히 나았으나 이 이무기가 신라로 도망쳐, 경주에서 사람을 해치며 지독하게 굴었다. 혜통을 원망해 복수하는 것이었다. ‘혜통항룡(惠通降龍)’이라는 제목 아래 나오는 『삼국유사』 속의 이야기이다. 

여기 나오는 괴질이 오늘날로 치면 전염병이다. 괴질은 이무기나 버드나무로 그때그때 몸을 바꾸는데, 이는 괴질의 여러 현상을 나타낸 것이며,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에서 신라의 경주까지 퍼진 병에 관한 사실(史實)이 여기서는 이야기의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다. 장안이라면 지금의 서안(西安)이다. 서안에서 경주까지 이 천문학적 거리를 전염병은 거침없이 달려왔다. 앞서 ‘저 멀고 오랜 역사’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괴질은 흉악한 형태로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다. 처음에는 이무기로, 마지막에는 흉악한 곰으로 나타나 사람을 해친다. 그런데 버드나무는 기상천외하다. 순하다 못해 푸르디푸른 나무가 실은 괴질이라니! 괴질은 흉측한 방법만으로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다. 버드나무는 순박한 사람의 정신을 홀리고, 헛소리를 지껄이게 한다. 병은 이렇게도 나타난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겪는 팬데믹의 원형처럼 보이지 않는가.    

이처럼 『삼국유사』의 이야기는 당대를 증언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진다. 적실하고 흥미롭다. 

다시 말해 이야기의 어느 한 대목과 이에 견주는 지금을 마주보게 한다. 역사의 고금(古今)을 떠나 인정의 곡진함은 같은 것이고, 새삼 고려 말의 편찬자 일연의 심정을 한 발 더 들어가 헤아리게도 된다. 예와 이제가 이야기를 통해 만나는 것이다.

여기서 문화원형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 보자. 어떤 자료가 ‘선험적이고 역사적인 보편성을 담보’하고 있어야 한다 했다. 그 자료는 이야기의 형태이면 더 좋다. 저 오랜 ‘괴질 이야기’가 오늘날의 팬데믹과 만나는 자리에서 그 의미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연구자는 찾아내고 해석하고, 콘텐츠 기획자의 손에 넘겨준다. 이런 시스템을 학문적 정합성의 담보 아래 이뤄낸다면, 오늘날 우리 문화콘텐츠 산업의 기반은 한결 튼튼해 질 것이다.     

실은 이런 점에서 『삼국유사』만큼 강한 자료가 드물어서, 문화콘텐츠 소재로서의 활용은 더 넓고 다양한 분야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는 본디 『삼국유사』를 원전으로 삼는 한국 고전문학의 연구자였다. 그런데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문화원형 사업은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하였다. 나는 그것이 ‘블루오션’이며, 새로운 비전과 자기희생을 요구한다고 보았다. 사실 학계의 분위기는 이를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는 데 주저한다. 꼼꼼한 텍스트 해석과 전거 자료로서의 활용 등이 연구의 본령이어서 그렇다. 그것을 그만두어서는 안 되지만, 원효가 빈 무덤에서 잠을 자며 해골 바가지 물을 마신 다음 날 깨우쳤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봐도 만들어진 이야기 같은데, 이것이 강력한 전승력을 가지고 정착된 저변을 바로 이해하자면, 지금까지의 방법론에서 나아간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 서사의 디지털 시대에 부응하는 이론적 모색이 그렇다.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웅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 믿음을 공유하는 세계이다.    


고운기 한양대·문화콘텐츠학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이오대학(慶應大學)에서 방문연구원으로 3년간 한일 문학 비교연구를 수행한 뒤,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일연을 묻는다』를 냈다.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객원교수로 한국 고전문학과 삼국유사를 강의했다. 이 기간의 공부가 바탕이 되어 필생의 작업인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기획하고,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 『삼국유사 글쓰기 감각』,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 『신화 리더십을 말하다』, 『모험의 권유』를 펴냈다. 삼국유사를 연구해 인문 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이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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