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의 나라 중국(?), 그리고 비단을 가리키는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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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의 나라 중국(?), 그리고 비단을 가리키는 말들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2.02.06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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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74)_ 비단의 나라 중국(?), 그리고 비단을 가리키는 말들


. . . . . 

눈물은 새우잠의
팔굽베개요
봄꿩은 잠이 없어
밤에 와 운다.

두동달이베개는
어디 갔는고
언제는 둘이 자던 베갯머리에
'죽자 사자' 언약도 하여 보았지.
. . . . . 

- 素月 詩 <원앙침(鴛鴦枕)> 중에서 -

갓 태어난 외손주가 흰 비단처럼 깨끗한 사람이 되길 바라며 비단 백(帛)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다. 문득 비단이라는 단어가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아무런 의심 없이 그저 우리말로만 생각하고 사용해오던 터였다. 사전을 찾아보니 비단은 한자어였다. 붉은 빛깔의 누인 명주라는 뜻의 비(緋)와 비단 단(緞)의 합성어가 비단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어려서부터 들어서 익히 알고 있던 공단, 양단, 우단이 다 비단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공단(貢緞)은 감이 두껍고 무늬가 없는 비단을 말하며 영어로는 satin이라고 한다. 양단(洋緞)은 은실이나 색실로 여러 가지 무늬를 놓아 두껍게 짠 고급 비단을 가리키는데, 1900년대 영국에서 수입된 단(緞)직물을 과거부터 사용했었던 기존의 무늬 넣은 비단인 문단(紋緞)과 구분하여 사용한 데서 연유한 말이다. 양단은 또 구단, 수단 등으로 나뉜다. 우단(羽緞)은 거죽에 곱고 짧은 털이 촘촘히 돋게 짠 비단으로 영어로는 벨벳(velvet), 포르투갈어로는 비로드(veludo)라고 한다. 일이 이쯤 되니 궁금한 게 또 생겼다.

실크로드를 중국식 한자로는 ‘사주지로(絲綢之路)’라고 한다. 絲綢가 영어 silk의 대응 표현인데, 실 사(糸) 둘이 나란히 쓰인 사(絲)는 명주실을 뜻하고, 주(綢)의 훈은 ‘얽히다’이니 명주실을 가로 세로 얽어 천을 짜 놓은 피륙으로서의 비단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비단을 가리킬 때 쓰는 ‘그물 羅’가 있다. 羅는 명주실(明紬-)로 짠 피륙의 한 가지로 가볍고 부드러우며 성깃한 구멍이 있어 사(紗: 깁 사, 엷고 가는 견직물)와 비슷한데 짜임새에 따라 마름모꼴 무늬, 격자(格子) 무늬를 나타내며 생라(生羅)와 숙라(熟羅)로 구별된다. 능라(綾羅)는 무늬가 있는 비단을 이르는 말이며, 벽라(碧羅)는 푸른 옥색 비단을 지칭한다.
   
그럼 비단을 가리키는 우리말은 뭘까? 명주가 아닐까 싶어 찾아보니 명주(明紬) 또한 한자어로서 견사(絹絲) 즉 명주실로 무늬 없이 얇게 짠 피륙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는 明나라에서 생산되는 견직물(絹織物)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생견직물(生絹織物)과 연견직물(練絹織物)로 구분되는데, 정련(精練)하지 않은 생사(生絲)나 옥사(玉絲)로 짠 뒤 정련하고 염색한 것을 생명주(生明紬)라고 한다. 반면 연명주는 정련한 실로 짠 것이다. 옥사는 누에 두 마리가 함께 지은 쌍고치에서 뽑아낸 다소 거친 명주실을 말한다. 

이렇게 비단 하나에서 비롯된 이름들이 다채롭다 못해 복잡하기까지 하다. 시공간적 확장의 결과다. 문제는 교통이 불편하고 직접적 소통과 접촉이 지극히 어려웠던 고대에 먼 이방의 하나의 이름이 반대편 이방에 어떻게, 어떤 경로로 전해졌을까 하는 점이다. 정보의 전달 과정에는 당연히 적지 않은 오류와 왜곡이 있었을 것이다. 동서 간 문명 교류가 이뤄지기 전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중국을 어떻게 알고 무엇이라고 지칭했을까? 포교와 교역을 통한 언어 접촉일 개연성이 가장 크다. 다시 말해 전법 승려와 상인들의 口傳과 기록이 먼 지방에 관한 정보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1세기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우스와 2세기 그리스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 등의 저서를 보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명주실로 짠 비단을 뜻하는 사(絲)를 자신들의 어휘로 차용해 세리코스(sērikós, 비단으로 만든 제품이라는 의미)라 불렀다. 이 말이 라틴어로 들어가 serica가 되고,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치세 때에는 급기야 중국을 가리키는 말 Seres가 되었다. 세라(Sera)라고도 했는데, 이는 비단민족(silk people) 또는 비단의 나라(the Land of silk)라는 뜻의 말이다. 후기 라틴어에서는 sericum이라 하여 특히 ‘비단 의복’을 지칭하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사(絲)라는 한자어가 서방세계에 세리코스, 세리카, 세레스 등으로 차용되었다는 기존 학계의 주장을 존중하면서도, 우리말 어휘에 ‘실’과 ‘겁/깁’이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마르고 난 천 조각인 자투리를 의미하는 ‘헝겊’의 고어는 ‘헌것’이다. 국어학계에서는 헌것(15세기)>것(16세기)>헝것(17세기)>헝겁(19세기)>헝겊(20세기~현재)으로 음운변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겁’ 또는 ‘겊’은 ‘천’이라는 의미의 말이다.  

한편 우리말 ‘깁’은 “명주실로 바탕을 조금 거칠게 짠 비단”을 이르는 말이다. ‘깁’은 ‘생견(生絹)’의 옛말이다. 있는 집에서는 깁으로 창을 바르기도 하고, 모기장이나 장막을 만들기도 했다. 영남 방언에 “사기지 않고 누에고치에서 켠 명주실”을 ‘깁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세리카’와 실로 짠 천이란 뜻의 ‘실겁’ 또는 ‘실깁’의 음성적 유사성이 ‘세리카’와 ‘絲’의 그것보다 커 보인다. 실크로드의 동방 기점이 중국의 장안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주라는 주장이 낯설지 않은 시점이기도 하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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