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는 개인이 아닌 사회적 영역에서 다루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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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는 개인이 아닌 사회적 영역에서 다루어야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1.3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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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포커스] 보건복지 ISSUE & FOCUS 제417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은 오랜 기간 높은 자살사망률을 보여 왔다. 자살은 트라우마 경험과 중요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정 사건이 직접적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원인이 되고, 자살사망자 대부분이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이 있다는 심리 부검 결과는 트라우마가 자살과 중요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방증한다.

트라우마란 “개인에게 신체적, 정서적으로 해롭거나 위협이 되는 단일 사건, 여러 사건, 혹은 일련의 상황으로, 신체적, 사회적, 정서적, 영적 안녕에 부정적 영향이 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집단적·개인적으로 다양한 트라우마에 노출되어 있고, 트라우마는 정신적·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삶의 질에도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

한국의 청장년은 22개 유형의 트라우마 중 평균 4.8개의 트라우마를 경험했고, 89.9%가 일생 동안 적어도 1개 이상의 트라우마를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으며, 트라우마 경험자는 정신건강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들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KIHASA)은 이같은 내용을 담은 보고서 ‘한국 청장년의 트라우마 실태’를 <보건복지 ISSUE & FOCUS>(작성자: 채수미 보건정책연구실 미래질병대응연구센터장) 제417호로 발간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 상당히 많은 유형의 트라우마가 개인이 극복해야 하는 문제로 남아 있다.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트라우마 정책은 초기 단계라고 볼 수 있는데, 향후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트라우마를 얼마나 겪고 있으며 그로 인한 부정적 영향이 어떻게 사회적 문제로 확장되고 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보고서는 향후 정신건강 정책은 사전 예방적 관점에서 강화될 필요가 있으며, 트라우마를 개인이 아닌 사회적 영역에서 다루려는 정책방향이 설정되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 보고서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 트라우마의 개념

트라우마라고 하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를 쉽게 떠올릴 수 있는데, 두 개념에는 차이가 있다. PTSD는 사람들에게 비교적 익숙한 ‘질환’이며, 트라우마는 그 자체로서 질환이라고 볼 수 없고 PTSD를 발생시킬 수 있는 전제 조건이다.

PTSD는 임상적으로 치료가 요구되는 질환으로, 진단을 받는 데 전제되는 외상성 사건은 반드시 명시된 유형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삶에서 비교적 중대한 충격으로 대다수가 흔히 경험하는 문제가 아니다. 트라우마는 PTSD뿐 아니라 그 외 다양한 부정적 건강 문제로 연결될 수 있다.

트라우마에 대한 그간의 논의는 PTSD에 준하는 증상을 유발하는 다양한 사건을 포괄적으로 검토하고 더욱 광범위하게 정책 지원을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여기서는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한국의 트라우마 문제를 확인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총 22개 유형의 트라우마를 구분한다. 임상에서 PTSD를 진단하는 데 활용되는 16개 외상성 사건, 선행 연구에서 제안하는 5개 사건, 그리고 신종 감염병 대유행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코로나19 확진을 트라우마 유형으로 포함한다.


■ 트라우마 경험 실태

트라우마 경험 실태 조사는 전국의 청년 및 장년(20~50대) 2,000명을 대상으로, 2021년 7월 9일부터 7월 30일까지 웹조사로 실시했다. 청장년 응답자의 89.9%가 22개 유형의 트라우마에 대해 일생 동안 적어도 1개 이상 경험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평균 4.8개의 트라우마를 경험했다(그림 1).

평생 경험한 트라우마 수는 성별로는 남성이 여성보다 다소 많았는데, 아동기의 경험 수는 여성이 더 많았다. 세대별로는 청년보다 장년이 더 많은 트라우마를 경험했는데, 아동기 경험만 본다면 청년이 더 많은 유형의 트라우마를 경험했다. 

청장년의 30% 이상이 경험하는 다빈도 트라우마는 교통사고, 자연재난, 신체폭력, 사고, 성적 경험, 화재 또는 폭발인데, 사고와 관련된 것이 주를 이루고 있어 이와 같은 유형의 사건에 특화된 지원 프로그램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그림 2).

한편, 관계의 문제도 개인에게는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될 수 있으며 그 경험률 또한 높은 수준이었는데, 학교·직장·가족 내 괴롭힘과 따돌림(23.4%), 본인 혹은 가족의 이혼 또는 별거(20.4%) 등이 이에 해당한다.

향후 트라우마 유형별로 대응이 이루어진다면 어떤 집단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는데, 실제로 트라우마 유형별로 특정 인구·사회학적 특성별 집단에서 더 두드러지는 결과가 나타났다(그림 3). 

성별로 보면, 남성은 주로 사고나 신체적 위해와 관련된 트라우마를, 여성은 성폭력·성적 경험, 대인관계 및 정서적 문제와 관련된 트라우마를 더 많이 경험했다.

세대별로는 청년 세대가 장년 세대에 비해 대인관계 및 정서적 문제와 관련된 트라우마를 더 많이 경험했고, 혼인 상태별로는 이혼, 별거, 사별한 경우 배우자가 있거나 미혼인 경우에 비해 다양한 유형의 트라우마를 더 많이 경험했다.

경제 수준별로 보면, 경제적 수준이 높은 집단이 정신질환 및 자살 시도자와의 동거를 더 많이 경험했고, 경제적 수준이 낮은 집단은 무기로 공격을 당하거나 심각한 인간적 고난, 이혼 또는 별거, 경제적 파탄, 대인관계 등 다양한 트라우마로 고통받고 있었다.

트라우마 경험자는 정신건강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들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보였다(표 2). 단, PTSD, 우울, 중독 등의 질환을 정확히 진단하기 위해서는 임상전문가의 판단이 필요하며, 특히 PTSD는 ‘PC-PTSD-5’ 도구를 통해 평가했는데 이는 진단을 위한 사전적 스크리닝의 의미를 가지므로 잠재적 PTSD 위험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트라우마 경험이 정신적·신체적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점차 회복되기도 하고 외상 후 성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그림 3).

트라우마 경험자의 다수가 사건 경험 이후 회복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인식(85.6%)하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실제 트라우마가 충분히 애도 또는 해소되었다고 응답한 비율(65.1%)은 긍정적 인식에 비해 낮았다.

외상 후 성장 경험률은 76.3%인데 이 역시 회복 가능성에 대한 긍정적 인식에 비해 낮은 수준이었다. 외상 후 성장은 부정적인 사건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단순한 적응과 회복을 넘어 주관적으로 지각하는 긍정적인 심리 변화를 경험한 경우이다.

■ 트라우마 대응을 위한 정책 제언

o 향후 정신건강 정책은 사전 예방적 관점에서 추진될 필요가 있으며, 트라우마를 개인이 아닌 사회적 영역에서 다루려는 정책 방향이 설정되어야 한다.

지금의 정신건강 정책은 정신질환, 자살 시도, 중독 등에 대한 인프라 확충과 서비스 강화에 집중돼 있으나, 조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있다. 

트라우마 정책 방향은 치료적 대응에 한정하기보다 사회안전망을 확대하는 넓은 범위에서 검토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정책 지원이 필요한 트라우마를 개념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o 트라우마 정책 수립에 앞서 한국 사람들의 트라우마 경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향후 트라우마 경험 이후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등의 질환이 아닌 트라우마 경험 실태가 주기적으로 점검될 수 있는 국가 조사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 

트라우마는 회복되기도 하고 외상 후 성장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자살뿐 아니라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우울, 자살생각이 나타나는 등 정신건강이 악화될 수 있고, 다양한 신체적 증상을 유발하기도 한다. 트라우마가 우리의 신체적·정신적 건강과 사회적 안녕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면, 이를 예방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트라우마 회복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에도 불구하고, 트라우마를 충분히 애도 또는 해소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거나 아직 애도 또는 해소가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가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또한 어떤 측면에서 외상 후 성장을 경험한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이 트라우마가 충분히 애도 또는 해소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중요한 측면이다.

o 트라우마 피해자 심리 지원 프로그램은 한국인의 다빈도 트라우마에 대한 전문성이 강화되어야 하며, 인구집단 간 차이를 기반으로 특화되어야 한다.
응답자의 다빈도 트라우마는 교통사고, 자연재난, 신체폭력, 사고, 성적 경험, 화재 또는 폭발 등이었음이 확인되었는데, 인구집단별 문제는 또 다른 양상을 보였다는 점에서 대상별로 중점 전략을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향후 트라우마 유형별, 대상자별 심층 분석이 이루어져야 하며, 그에 따른 한국형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더불어 우리의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발생하는 트라우마 과제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이 높은 국가로 그에 따른 유가족도 많이 발생하고 있는데, 유가족은 가족의 자살이라는 중대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채 살아가고 있으므로 이들의 정신건강과 영향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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