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정치학…“이 죽음에서 자유로운 이는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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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정치학…“이 죽음에서 자유로운 이는 아무도 없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1.23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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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배 애도 적대: 자살과 한국의 죽음정치에 대한 7편의 하드보일드 에세이 | 천정환 지음 | 서해문집 | 400쪽

 

종교나 문화뿐 아니라 정치 역시 죽음을 매개물로 한다. 또는 정치란,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죽음을 처리하고 죽음과 싸우고 다스리는 일에 다름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늘 죽음에 개입하고 사람들의 애도와 죄책감을 사용해왔다. 민주화의 과정에서 희생된 숱한 죽음들은 물론이거니와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한국 사회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너무나 아픈, 때로는 무책임한, 죽음(자살)이 끊이지 않았다. 이렇듯 비통하고 때 이른 죽음을 야기한 것은 바로 이 나라의 정치며 사회이고, 한국 사회는 그런 죽음들이 초래한 어둡고 비통한 ‘마음’을 또 에너지로 삼아 전후좌우로 비틀대며 나아간다. 이 책은 그러한 집합적 감정의 에너지, 즉 정치적 ‘정동(情動)’의 발생과 효과를 분석함으로써, 자살이 이 사회의 비참 또는 관계의 한계를 증거한다는 점을 다시금 깊이 성찰케 한다.

1991년 봄 이른바 ‘분신 정국’에서 산화한 꽃다운 젊은 ‘그들’을 비롯해 1980-90년대 ‘열사’들의 죽음, 그리고 2000년대로 이어지는 ‘노동자’들의 죽음과 노무현·노회찬·박원순 등 정치인들의 죽음, 그리고 대한민국 공직자들의 잇단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죽음의 정치학 또는 한국 정치의 감정구조의 메커니즘을 살펴본다. 나아가 최진실·설리·샤이니 종현 등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잔혹한 사회’의 면면을 들여다보며, 한국 사회의 자살 현상과 자살 문제의 전망을 고찰해본다.

제1부는 ‘열사의 정치학’의 기원부터 소멸까지, ‘열사’를 둘러싼 죽음의 정치학을 다룬다. 전태일 이래 1980-90년대까지 이어진 ‘노동열사 정치’의 계보, 그리고 ‘5월 광주항쟁’으로부터 물려진 ‘1980년대적 죽음’의 사회적·도덕적 연원들을 살펴본다. ‘애도되지 못한 (광주의) 죽음’의 죄의식은 어떻게 ‘열사정치’로 계승되었을까?

약자들의 최후의 도덕적 무기로서 왜 ‘분신’이라는 죽음의 형식(‘숭고의 스펙터클’)이 선택된 것일까? 이른바 ‘민주화’ 이후에도 왜 노동자들의 죽음은 멈추지 않았으며, 오늘날과 같은 ‘강성 노조’ 혹은 ‘노조의 전투성’은 어떠한 맥락을 거쳐 형성돼온 것일까? 그리고 1986년 스물세 살 박혜정의 죽음과 1991년 열아홉 살 박승희의 죽음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열사의 시대’ 이후, 2000년대 들어 노동자들의 죽음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살펴본다. 여전히 ‘노동열사’라는 이름의 죽음이되, 뜨거운 ‘열(烈)’에서 고독한 ‘울(鬱)’로, 이들의 죽음은 점점 추방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21세기형 ‘합법적’ 노동탄압인 ‘손해배상소송’을 비롯해 노동의 분할과 억압이 더욱 교묘해지고 악랄해지는 가운데, 여전히 ‘해고는 살인’이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더욱 고독한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50년 전 전태일의 유서가 여전히 쓰이고 있는 나라, 오늘날 대한민국의 초상이다.

제2부는 노무현·노회찬·박원순 등의 정치인을 비롯해 대한민국 공직자들(이를테면 국정원 직원들)의 죽음을 둘러싼 ‘애도의 정치, 증오의 정치’를 다룬다. 2009년 노무현의 죽음은 한국 사회를 크게 요동치게 만든 새로운 정치사의 시작이었다. 7일간의 장례식 기간 동안 거대한 집합적 에너지로 분출된 강렬한 감정들의 충돌. 한편에서는 미안함과 복수심과 증오가, 다른 한편에서는 공포와 조롱과 혐오가 횡행했다. 정작 노무현은 유서에서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라고 남겼지만, 한국의 정치는 정확히 그 반대의 길을 걸었다.

노무현에 대한 대중의 극도의 죄의식(또는 우상화)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또 그 반대편에서 엘리트 ‘특권동맹’은 어떤 정동을 갖고 있었나? 이후 노회찬과 박원순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애도’ 또는 ‘반(反)애도’는 어떻게 정치에 소환되고 이용되었나? 촛불혁명 이후에도 이 원한의 정치는 왜 끝나지 않는 것일까? 극단적이고 무자비한 진영정치를 멈추기 위해 이 공동체에 필요한 윤리는 무엇일까?

제3부는 2000년대 이후 부쩍 빈번해진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을 통해 한국 사회의 ‘잔인성의 체제’를 들여다보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 만연한 자살 현상을 되짚어본다. 또한 자살 예방을 위한 법과 제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발전해왔는지, 그럼에도 왜 이 사회와 개개인의 삶에 드리운 어둡고 무서운 심연을 잘 고치지 못하고 여전히 ‘자살공화국’을 유지하고 있는지, 한국인들은 생애주기·연령대별 어떤 요인들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게 되는지를 살펴본다.

무엇보다 ‘사회적 잔인성의 체제’의 최전선에 있는 직장과 노동을 둘러싸고, 이 많은 비극을 야기하는 거시적 배후는 무엇일까를 묻는다. 바로 자본과 효율의 논리, 경쟁의 압박,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합친 자본주의의 현 단계, 즉 ‘신자유주의’다.

한국은 분명 경제력, 군사력, 소프트파워, (형식적) 민주주의의 측면에서 선진국의 문턱에 이르러 있지만, 그 화려한 외관을 한 꺼풀만 벗기면 피가 강처럼 흐르는 ‘극단적 선택’이라는 절망이 창궐한다. 소외와 고독도, 경쟁과 잔인함도 더 심해졌으며, 엄청나게 커지고 복잡해진 불평등의 구조 때문에 혐오와 차별이 횡행하는 현실도 바뀌지 않았다. 오늘날의 ‘K-번영’은 여전히 지속불가능성 위에 구축돼 있다.

한국 사회는 끝없는 경쟁, 극단적 개인주의, 일상의 사막화, 생활 리듬의 초가속화라는 특징을 지닌다. 이런 상황을 멈추거나 늦추어야만 자살과 이를 부추기는 광증과 폭력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사람을 자살에 이르게 하는 어두운 힘은 바로 우리가 사는 학교, 가족, 이웃이 근거하는 세계에 있기에, 그 힘들을 조절하고 제어할 수 있는 힘 또한 ‘정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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