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과 인문학은 어떻게 연결되나?…역사, 철학, 윤리, 문학, 예술 그리고 의학
상태바
의학과 인문학은 어떻게 연결되나?…역사, 철학, 윤리, 문학, 예술 그리고 의학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1.23 23: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의료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의학과 인문학의 경계 넘기 | 황임경 지음 | 동아시아 | 516쪽

 

‘의료인문학’이라는 단어는 여러 사람에게 생소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학’은 무엇보다 ‘과학’에 기반을 두고 임상 활동을 하는 학문이지 ‘인문학’이 들어갈 여지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의학의 역사를 조금만 따라가 보면 의학과 인문학이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고대부터 의학과 인문학의 관련성은 강조되었다. 고대 그리스 의사들에게는 진료 능력 못지않게 진단이나 예후를 환자나 대중에게 설명하고 치료법을 설득하는 웅변술이 요구되었고 증상에 관해 환자가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이를 정리하여 납득할 만한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는 서사적 능력도 필수였다. 중세 시대에 대학에서 의학부가 생겨 근대적인 의학 교육이 체계를 잡아갈 때도 교양 과목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했는데, 이는 예과와 본과로 나누어져 있는 오늘날의 의학 교육 체제에까지 그 기본 정신이 지속되고 있다.

의학이 과학의 방법론과 성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인문학과 거리가 생긴 것은 19세기 이후였다. 이 시기부터 윌리엄 오슬러, 에이브러햄 플렉스너 등은 의학에서 휴머니즘의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60년대 들어 의료기술이 발전하면서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도덕적·사회적 문제들이 발생했다. 혈액 투석기와 같은 새로운 의료기술을 누구에게 먼저 배분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심장 이식이 성공함에 따라 심폐사 중심의 전통적인 죽음 관념에도 변화가 필요해졌다. 시민들이 권리 의식에 각성하면서 의료에서의 권리, 즉 건강권과 환자의 자기 결정권이 주목받고 상대적으로 의사의 권위는 약화되었다.

또한 병원이 점점 비대해지고 영리를 추구하게 되면서 관료적인 체제로 발전해 갔고 환자들은 돌봄의 대상보다는 치료의 대상이나 고객으로 바뀌어 갔다. 만성질환을 앓으면서 오래 사는 환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질병 치료에만 중점을 두고 질병을 앓는 환자의 ‘삶의 질’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현대의학의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도 증가하게 된다. 이 모든 도덕적·사회적 이슈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과학으로서의 의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서구 사회는 의료계에 인간적인 의료와 함께 사회적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했으며, 그에 따라 의료계에서는 인문학을 도입하여 의학 교육과 임상 의료를 개혁함으로써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에 대처했다. 그 과정에서 의학의 인간적인 면을 보강하여 의료의 질을 향상하자는 생명의료윤리와 근대적 의미의 의료인문학이 탄생하게 된다.

그렇다면 의료인문학이란 무엇일까? 의료인문학의 정의나 개념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비판을 살펴보면 대개 두 가지 특정한 사유의 틀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의학과 인문학의 이항대립 구도에서 의료인문학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며, 둘째, 의료인문학의 개념이 대부분 ‘인간적인 의료’라는 규범적 관점에서 논의된다는 점이다.

이 책의 주장에 따르면 의료인문학의 개념과 성격은 의학과 인문학이라는 이항 대립에서 벗어난 지점에서 새롭게 사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의료인문학의 시작이 교육적 목적이건 학문적 목적이건 상관없이, 그것이 전개되고 상호작용 하는 과정에서 의학과 인문학은 모두 일정한 변화 혹은 변형을 겪게 되고, 결국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경계에 위치하며 끊임없이 양쪽을 횡단하고 사유와 실천을 진행해야 하는 유동적인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의료인문학의 개념은 기존의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매우 느슨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의료인문학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의학과 인문학이 만나는 지점들을 포괄한다. 예를 들어서 의료는 구체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실천적인 활동이지만, 그 과정에서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철학적인 활동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의학에서 철학적인 논의를 해야 할 필요성이 발생한다. 지난 40년간 건강과 질병이라는 개념은 가장 많이 논의되었는데, ‘질병이 없는 상태가 곧 건강’이라는 기존 의료계의 정의가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규범주의 입장에 따르면 건강과 질병 개념에는 항상 개인적·사회적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있다고 보고 건강은 단순히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추구해야 할 그 무엇이라 본다. 반면 자연주의 입장에서는 질병이 사회의 가치와는 무관한 생물학적 현상이며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 본다. 건강과 질병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어떤 입장에 서느냐 하는 문제는 결국 건강과 질병에 관해 특정한 시각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미시적인 환자-의사 관계부터 거시적으로는 국가의 의료제도나 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철학뿐 아니라 역사, 윤리, 문학, 예술, 과학기술학 등이 의학과 관련을 맺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든 의료 활동이나 의학 교육에서 실천적으로 쓰이고 있다. ‘누구를 살릴 것인가’로 대표되는 의료윤리의 영역은 이미 많은 미디어에서 다루면서 대중에게도 친숙해졌고, 서사의학이나 퍼포먼스의학처럼 문학이나 예술이 의학과 접목되는 사례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결국 의사의 역량 속에 과학에 기반한 임상 능력과 한 인간으로서 아픈 이를 돌보려는 인본적 태도가 균형 잡힌 채 녹아 있는 것이 의학의 휴머니즘 전통이다. 그 전통에서 인문학은 언제나 의학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의료윤리학자인 앨버트 존슨은 이것을 호르몬에 비유한다. 매우 탁월한 비유이다. 호르몬은 미량으로 존재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신체 기능은 마비되고 말 것이다. 의료인문학은 의학의 호르몬이다. 복잡하고 급변화하는 의료 환경에서 의학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호르몬으로서 의료인문학이 담당해야 할 역할이며, 그 항상성이란 바로 의학의 휴머니즘 전통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