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의 멸망은 한 문명의 멸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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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의 멸망은 한 문명의 멸망이었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1.23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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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나라의 슬픔: 근대의 문턱에서 좌절한 중국 문명을 반성하다 | 샤오젠성 지음 | 조경희·임소연 옮김 | 글항아리 | 600쪽

 

이 책은 중국 선진 시대의 기초 논의부터 시작해 진한 시대, 당송 시대, 명청 시대, 민국 시대 등을 큰 틀로 하여 중국사를 통관한다. 진한 시대는 황제 중심의 중국의 권력 제도의 씨앗이 뿌려지고 제도적으로 완성을 본 시기다. 명청 시대는 중국 문명이 가장 타락한 시대였고 그 구체적인 실상은 우리를 아연하게 할 정도다. 그리고 서양의 충격 이후 중국은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서 거듭나고자 했으나 그때마다 과거의 악령이 되살아나 발목을 잡았다. 저자는 그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구체적인 일화와 함께 서술하고 있다.

반고와 여와의 전설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의 원시문화는 신본문화였다. 이 점에서는 세계 각 문명의 원시문화와 방향을 같이한다. 하지만 문화의 발전과정에서 이 신본문화는 점차 인본문화로 대체되었다. 인간을 신격화하고 신을 인간의 위치에 두었기 때문에 인간과 신의 관계는 혼란스러워졌고 조물주와 피조물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도 흐려졌다. 이것이 이후 중국 문명의 비극적 잠재 요소가 된다.

서구 현대 문명은 기독교 문명의 산물, 곧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산물이었다. 『성경』에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한 과정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유대교와 천주교, 기독교 모두가 인본문화로 대체되지 않았고 신본문화를 간직해 내려올 수 있었다. 서양인들은 성인을 맹신하지 않았고 광폭함에 굴복하지도 않았다. 바로 이런 관념상의 차이 때문에 서구 사회는 개인 숭배라는 관념이 생기지 않았고 강권에 극력 반대하게 되었다. 하느님을 제외한 그 어떤 권위도 믿지 않았고 모든 권력에 제약을 가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을 장악한 사람이 권력으로 사리사욕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구 사회는 정부의 권력을 제한하는 데 치중했다.

그런데 중국인은 인간 세상에서 신과 같이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성인이 나타나고 그들이(인간 세상의 신) 사회를 다스리기를 바라며 동시에 강권과 폭력에 대해서도 참고 견딘다. 이러한 이유로 고대 중국의 신화가 가지는 중요한 의의 중 하나가 생겨난다. 바로 ‘성인이 나라를 다스린다聖人治國’는 고대의 권위와 황권 강화에 최초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원제가 “중국 문명을 반성한다”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어판 제목을 “송나라의 슬픔”으로 지은 이유는 이 책에서 가장 강조되는 대목이 “송나라의 멸망”이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많은 이는 송나라가 전제적이고 부패하고 낙후했으며, 가난하고 쇠약했던 왕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나라가 화약·나침반·활자인쇄술 등의 위대한 발명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또 송나라의 상품경제가 그렇게나 번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송나라 사람들이 “천하가 근심하기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가 다 기뻐한 후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는 위대한 정서를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많은 사료를 분석해 중국 문명의 흥망성쇠를 풀어낸다. 동서양의 경험을 결합해 중국의 일원화 문명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어떻게 발전하고 강화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중국 문명 전환이 실패한 과정과 이유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고찰한다.

중국 문명이 최고조로 고양되었던 때가 바로 송나라 때다. 정치에서부터 경제, 문화, 사회, 복지, 무역, 외교, 의료체계 등 모든 면에서 송나라는 당시의 어떤 문명 세계도 도달하지 못한 정점에 올라섰다. 그야말로 그대로 100년만 더 갔으면 근대는 세계적으로 몇 백 년이나 앞 당겨졌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송나라의 체제는 훌륭했다. 황제가 존재하는 상태였지만 실질적인 통치 내용으로는 민주주의의 여러 씨앗이 잉태되었으며, 부의 분배에 있어서도 오늘날보다 훨씬 나았다. 상업문명은 화려했으며 사회복지 제도 등이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었고,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장치도 잘 작동했다. 중앙에 권력이 몰리지 않고 지방분권이 이뤄졌으며 문화면에서도 사상적 다양성이 분출했으며 성리학이 지배적이었을 것이라는 후세의 인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울러 문학적·과학적 성과도 특출했다.

말하자면 송나라는 황제 전제제도가 그 틀을 깨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물질과 정신적인 문명 형태로 구현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국방 분야에 소홀했고, 과학문명 또한 산업혁명에 도달할 만큼 한 단계 나아가지 못했다. 그 결과 외부의 침입에 문명이 철저하게 짓밟혔다. 송나라의 멸망은 한 문명의 멸망과도 같았다. 송대 이후 중국은 한 번도 그와 같은 문명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과잉된 황제 중심, 중앙 중심, 권위주의적인 사상 중심 사회로 검열과 폭력으로 일관하다가 서양에 의해 왕조 시대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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