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혁신의 아젠다, 4차 산업혁명과 융·복합교육을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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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혁신의 아젠다, 4차 산업혁명과 융·복합교육을 돌아보다
  • 허태구 가톨릭대학교·한국근세사
  • 승인 2022.01.23 22:1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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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4차 산업혁명, 메타버스,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ICT 융합, 디지털과 스마트, 스타트업과 벤처, 문화콘텐츠, 융·복합교육 등등. 이들 용어의 공통점은 창의성 있는 인재의 양성과 대학교육의 혁신이라는 명분 아래, 한국의 대학가 안팎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아젠다라는 것이다. 기계치에 가까운 나로서는 하나하나의 개념을 좇아가기도 벅차지만, 이와 같은 풍조 속에서 왠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곤 한다. 예를 들면, 여러 이유로 한국사 교육과 4차 산업혁명과의 연관성에 대해 머리를 짜내 글을 써야 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대학에 재직 중인 교원 상당수가 직면한 상황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풍경은 묘한 기시감을 들게 한다. 90년대 중반 병역을 마치고 복학한 대학은 세계화‧국제화의 열풍이 감싸고 있었다. 모든 전공에 영어 교육이 강조되기 시작하였고, 국제학부 또는 국제지역원과 같은 기관이 전국 대학에 속속 생겨났다. IMF 이후 대학원에 진학할 무렵에는 학제 간 통합 교육 또는 간학문적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글과 발표를 수없이 접했다. 이러한 용어를 구사하지 않으면 어쩐지 촌스러워 보여, 나도 각종 기관에 제출하는 보고서나 연구계획서의 첫 머리에 부러 삽입하곤 했었다. 또 몇 년이 지나 한‧일 월드컵이 개최된 2002년 전후가 되자 대학에서의 기초교육, 교양교육, 인문학 고전 읽기, 글쓰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결과 기초교육원, 교양교육원, 글쓰기센터와 같은 기관들이 여러 대학에 설립되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변화와 개혁의 몸부림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다음 단계로 향했는지는 의문이다. 외국인 학생이 캠퍼스 곳곳에 보이는 외형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세계사 교육의 퇴조가 보여주듯이 그들의 문화와 역사를 깊게 이해하려는 움직임은 여전히 미약하다. 학제 간 통합, 간학문적 연구, 통섭 등의 슬로건은 어느새 슬그머니 융·복합교육, 융·복합연구 등에 자리를 내어주고 사라진 지 꽤 오래이지만, 전자와 후자의 본질적 차이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 하나 궁금해 하지도 않고 설명해주지도 않는다. 인문학 고전 읽기나 글쓰기 교육에 대한 신드롬도 이와 같은 추세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라 확신한다. 그렇다고 이와 연관된 대학생들의 문해력이나 글쓰기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지금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 ‘대학생 기초 학력 부실’이란 타이틀의 기사는 이를 방증한다.

따라서 작금의 대학가를 휩쓸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이란 구호와 서두에 제시한 연관어 역시 그 운명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경험한 한국 대학의 풍조상 언제 연기처럼 사라지고 또 다른 아젠다로 대체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욱 서글픈 것은 이러한 아젠다 대부분이 대학이란 학문 공동체 내부의 광범위한 공감대 속에서 숙성되어 나온 것도 아니요, 한국의 대학 현실을 진단하고 고민하는 우리의 문제의식 속에서 발현된 것도 아닌 외래종이자 카피본이라는 사실이다.   

주지하다시피 4차 산업혁명을 강조하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창의적 인재의 육성을 목표로 한 융·복합교육의 필요성을 대학에 강력히 제기하고 있다. 필자 또한 그 필요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현행과 같은 방식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탑다운 방식의 시행이 갖고 있는 한계이다. 다수의 대학이 앞다퉈 융·복합교육의 선도를 표방하고 커리큘럼을 개편하는 데 힘쓰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대학 예산의 외부 지원과 밀접하게 연관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충분한 준비 없이 급작스럽게 시행되는 융·복합교육은 짐작컨대 여러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을 것이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몫이 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창의성과 자율성을 지향하는 융·복합교육이, 정작 그 시행 과정이나 예산 집행은 획일화되고 관료화된 절차에 철저하게 속박되어 버리고 마는 구조적 환경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과연 융·복합과 창의성을 교수자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이다. 창의성의 사전적 의미는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특성이나 능력’이다. 무언가를 융합‧복합해서 새롭고 유의미한 것을 창출하는 일은 교수자 수준에서도 지극히 어려운 과제이다. 결국 강의의 내용은 새롭지만 별로 의미가 없거나, 새로웠지만 이제는 새롭지 않은 뻔한 사례로 채워지기 십상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개인적 의견이지만 학부 수준에서 조급한 성과를 기대하는 융·복합교육은 분명 지양되거나 제한될 필요가 있다. 융·복합이 제대로 이루어져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려면 여기에 참여하는 구성원의 수준이 정점에 있어야 한다는 기본적 전제를 잊지 말았으면 한다. MIT 미디어랩의 구성원이 학부생이 아닌 대학원 석‧박사 과정생으로 채워졌다는 사실이 아마 우연은 아닐 것이다.

세 번째, 세계화‧국제화부터 4차 산업혁명‧융복합교육에 이르기까지 대학 혁신 아젠다의 급속한 변동은 정작 개별 학문과 학과 교육의 내실화를 다지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는 점이다. 아젠다의 전환과 이에 연동되는 예산 지원은 학과 교수들에게 새로운 업무를 부과하기 마련이다. 커리큘럼 수정, 교내외 위원회나 학회의 소집, 연구비 신청, 각종 행정 절차에 이르기까지 미치는 파장이 적지 않다. 여기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다 보면 정작 본인의 관심 분야 연구에 투자할 여력은 조금씩 소진되고 만다.

그러므로 대학에서 유의미한 융‧복합교육과 창조적 인재의 육성을 바란다면 좀 더 신중하고 장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것은 형식적이고 표준화된 교육보다 새롭고 깊이 있는 질문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질문이 반드시 융‧복합교육의 테두리에서 제기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100년 후 지금의 MZ 세대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는 메타버스, 인공지능, 전기차, 비트코인 등에 대한 과학적 소양을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각자의 연구 분야에서 한계를 넘으려는 힘겨운 발걸음을 내디딜 때, 융‧복합연구는 저절로 연구자에게 그 실체를 드러낼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더 이상 발묘조장(拔苗助長)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할 때이다.

 

허태구 가톨릭대학교·한국근세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과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중화주의(中華主義)와 연관된 조선후기 정치사, 군사사, 외교사, 지성사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정조의 무치』, 『병자호란과 예(禮), 그리고 중화(中華)』, 『조선의 국가의례, 오례(五禮)』(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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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2022-01-26 18:22:57
이런 유행 또한 이윽고 모두 지나가겠죠. 문제는 고등교육과 학문의 본질에 대해 무지한 관료주의적 행태와 그에 기생하는 대학 내외부의 담합으로부터 비롯되는 난맥상이겠죠.
'4차 산업혁명'도 한물 간 요즘, 다시 이름만 좀 바꿔서 '첨단학과' 운운하며 대학 구조조정하라는 꼬라지를 보면, 새마을운동 하던 시기 개발독재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현 학령인구 감소의 위기는 대학설립준칙주의 등 근본적으로 국가실패로부터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국가경쟁력에 뒤처지는 대학경쟁력' 운운하는 관료들의 후안무치함은 정말 세계 최고 수준일 겁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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