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이 탄생하는 곳이 선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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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이 탄생하는 곳이 선진국이다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1.23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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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보고서]
■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인문정책연구총서_ 〈뉴리버럴아츠(A New Liberal Arts) 인문학의 정립: 뉴노멀 시대 한국 인문학의 길〉

최근 30년가량 한국에서는 ‘인문학의 위기’가 대두되었고,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수많은 ‘인문학 지원정책’이 쏟아져 나왔다. 일부 유의미한 성과를 달성했으나, 한 세대가 지난 현재까지도 인문학 위기의 그늘은 걷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인문학의 위기의식이 지난 30년을 지나오며 상시화되었는데도 여전히 ‘위기’의식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면, 인문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단계부터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인문학에 대한 정의와 관점은 인문학 내부에서도 다양한 갈래로 분화하지만, 인문학의 본질에는 인간이 있으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특정 시공간을 살아가는 인간상과 사회상에 대한 고찰이 있다. ‘인간’을 둘러싼 삶의 조건은 매 순간 변하기 때문에, 인문학은 그 변화의 순간을 포착하고 고찰하며 그로부터 성찰하면서 발전해왔다. 바로 이 지점에 인문학의 역사성이 발견된다.

인문학이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며 갱신되는 학문이라면, 격변하는 시대에는 언제나 늘 새로운 인문학이 도래해왔고, 사상으로서의 새로운 인문학을 탄생시킨 곳이 그 시대를 선도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사상이 탄생하는 곳이 선진국이다. 서양 근대의 사상과 가치 시스템이 의문시되고 있는 지금, 아니 파국의 강력한 징후를 목격한 지금, 누가 다음 시간의 사상과 가치 시스템을 제창할 것인가? 이 경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에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인문정책연구총서의 하나로 연구보고서 <뉴리버럴아츠(A New Liberal Arts) 인문학의 정립: 뉴노멀 시대 한국 인문학의 길>(연구책임자: 김재인 경희대 교수)을 지난 1월 7일 발간했다. 이 보고서는 『경제·인문사회연구회 2021년도 인문정책연구사업』의 일환으로 수행된 연구과제 중 하나이다.

이 연구는 지금 한국의 실정에 맞는 인문학 모색과 방향 제시를 목표로 한다. 여기에는 인문학 개념의 재정립과 학문단위와 교육제도 개편도 포괄한다. 특히 ‘인간’과 ‘인문학’을 고정불변의 진리로 파악하지 않으며, 언제나 늘 변화 중이며 변화해야 하는 학문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우리는 뉴노멀의 기술ㆍ사회ㆍ경제적 조건을 분석하고 지금 시점에 추구해야 할 가치 시스템과 사상을 발명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인문학은 이 작업을 선도할 수 있도록 변신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이 연구는 상시화된 위기의식을 넘어 현시대가 요청하는 새로운 인문학의 재정립을 시도한다.

이런 배경 하에서 연구진은 인문학을 재정립하고 융합적 역할을 모색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두 가지 연구 주제를 제시했다. 첫째, 국내외에서 난무하는 ‘인문학’ 개념을 재규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인문학은 주로 사회학, 체육학, 예술학 등처럼 하나의 학문단위를 총칭하거나, 전공분과를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어왔지만, 이 연구에서는 ‘인간과 시대상’을 포착하는 인문학의 본질을 담아내는 방식으로 인문학 개념을 확장·재규정한다. 연구보고서는 이를 ‘뉴리버럴아츠(A New Liberal Arts) 인문학’이라 명명한다. 둘째는 뉴노멀 시대에 재규정된 뉴리버럴아츠 인문학이 삶과 구체적으로 만나는 지점과 양태를 분석하여, 인문학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실질적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진단이 진단에서 그친다면, 인문학의 실천성은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따라서 이번 연구는 인문학을 재규정하기 위해 관련 개념과 이론을 분석 틀로 활용하지만, 이론을 위한 이론 또는 개념을 위한 개념은 지양한다. 급변하는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는 인문학은 그 어느 학문보다 현실과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기존 문사철 중심의 인문학이 현실과 유리되었다는 비판에 통감하며, 이론과 실천의 유기적 연결방안을 모색하고 현실에 접목 가능한 정책 제안을 시도했다.

 

【연구요약】

본 연구는 (1) 코로나19 감염병 대유행, 기후위기,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등 첨단기술의 오남용이라는 최소 3중 위기 혹은 대격변을 뜻하는 ‘뉴노멀 시대’와 (2) 경제, 기술, 군사 등 하드파워(hard power)는 물론 문화예술, 매력도 등 소프트파워(soft power) 양 측면에서 이미 ‘선진국’에 올라선 대한민국의 새로운 위상을 고려하여, 흔히 문사철(文史哲)로 표현되는 전통 인문학을 갱신하여 확장된 인문학으로서 뉴리버럴아츠(A New Liberal Arts) 인문학을 제안함으로써, ‘인문학의 위기’를 돌파함은 물론 시대에 적합한 ‘학문과 교육 방안’을 모색했다.

기존의 인문학 관련 정책 연구들은 인문학이 처한 상황을 ‘위기’로 설정하고, 이러한 위기는 외적 조건(산업기술의 발달, 신자유주의 세계화 등)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지 못한 한계와 내적 조건(통합적ㆍ학제적 사고의 실패, 전통 학문과의 단절, 전문화와 폐쇄성 등)에 의해 개방과 융합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진단한다. 본 연구는 선행연구를 충분히 참조하면서도 관점을 달리하여, ‘위기’를 하나의 ‘변화’로 인식하고 이에 부응하는 ‘뉴리버럴아츠’로서의 새로운 인문학 개념을 제안했다. 이는 전통적 문사철의 틀 대신, 전통 인문학 개념의 역사적 변화과정, 기술과 사회의 비약적 발전에 따른 인문학 생태계의 변화, 중고등학교 및 대학 현장에서 커리큘럼과 교육내용의 변천, 기업 현장과 시민사회에서 인문학에 대한 기대와 요구 등을 ‘현실’로 삼는 인문학의 새로운 개념을 종합한 결과다. 언어, 문학, 역사, 철학 외에도 수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예술의 기초 역량을 키워주는 교육 체계로서 뉴리버럴아츠 인문학은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낼 것으로 기대된다. 그 핵심은 언어(文)를 자연어를 넘어 자연과 예술을 읽는 언어로까지 확장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문헌 연구, 실태 조사, 전문가 자문, 학생 설문 조사 등을 통해 본 연구는 몇 가지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었다. 먼저, 뉴리버럴아츠 인문학의 실제 내용이라 할 대학의 교양수업과 시민 인문학 강좌에 대한 만족도와 수요가 높게 나왔다. 이는 ‘인문학의 위기’가 인문학에 대한 선호의 감소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학문후속세대의 재생산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다음으로, 인문학 생태계를 구성하는 인자를 (1)연구자, (2)교육자, (3)학생, (4)시민으로 세분함으로써, 종래 대학교수 중심의 관점과 담론을 탈피하고 새로운 분석의 시야를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인문학 생태계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학문후속세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기업과 사회가 대학에 요구하는 교육 내용은 20세기의 유물인 전공 능력이라기보다 메타스킬(meta-skill), 학습 역량, 관계 역량 같은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학부 교육과정이 뉴리버럴아츠 인문학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를 뒷받침하며, 중고등학교(문이과 폐지)와 대학원 교육(전공 능력)의 변화 방향도 설계할 수 있게 해주었다. 뉴리버럴아츠 인문학은 인간, 시민, 인재를 길러낸다는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융복합 실천이 가능한 미래 세대를 육성하는 최선의 전략이다.

인문학은 초역사적 개념이 아니며 시대의 요구에 따라 끝없이 변신해왔다. 전문 분과들은 더 전문적인 쪽으로 발전해야 마땅하지만, 그와 동시에 뉴리버럴아츠 인문학을 교육함으로써 전문성의 토대를 확장된 공통 기초 역량 위에 두는 것은 시대를 선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정책 제안】

1) 새로운 중등교육과 대학교육을 위한 정책 방향 제시 ― ‘뉴리버럴아츠’라는 새로운 이념에 따라 가장 먼저 대학의 교과과정이 재편될 수 있다. 이는 뉴리버럴아츠가 대응하는 새 시대에 필요한 핵심 능력이 ‘메타스킬(meta-skill), 학습 역량, 관계 역량’ 등이기 때문이다. 산업화 시대에는 대학이 산업사회의 요구에 직접 대응하면서 산업인력의 주요 공급처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나 눈부신 기술 변화는 이러한 대학-산업 간 직접 연계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맥락에서 어떤 기술 변화에도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 새로운 지식을 스스로 찾아서 익힐 수 있는 능력, 즉 ‘메타스킬, 학습 역량, 관계 역량’ 등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대학의 역할이 됐고, 이런 인재라야 급변하는 산업계에서 거듭 생존할 수 있다. 뉴리벌아츠로 구성되는 학부과정에서는 전통 문사철 인문학 외에도 언어, 수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예술 등을 통합적으로 교습할 것이다. 이렇게 토대를 튼튼히 한다면, 현재 기준으로 통상 2, 3학년 때부터 배우기 시작하는 전공수업은 상급 과정에서 담당하는 쪽으로 재편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중등교육의 교육과정도 변할 수밖에 없다. 문과/이과 체제에서 학생들의 선택은 ‘수학을 잘하면 이과, 사회과를 잘하면 문과’라는 식의 기준을 따를 뿐이며, 이는 결국 통합적인 관심을 키우고 다양한 지식을 맛봐야 할 어린 학생들에게 지적 편향을 조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 기업 및 산업계와의 협력 거버넌스 구축 ― 대학의 인문학 교육에 대한 주요 비판은 취업과의 연계성 약화이다. 이는 ‘인문학의 무용론’ 담론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본 연구의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학과 기업의 협력이라는 측면에서 두 가지 점을 시사한다. 첫째, 학생들은 향후 졸업 후 취업과 별개로 자기 나이 때의 절실한 삶과 실존의 문제, 학습 동기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대학에서 학생들의 취업 역량 배양과 별개로 이러한 학생들의 절실한 문제에 대해 해답을 제공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의 방향 제시, 내면의 역량 배양 등은 대학에서 인문학 중심의 교양수업이 담당해야 할 역할이다. 또한 사회에서 인문학 수강 열풍이 부는 것은 이러한 삶과 실존의 문제가 유적 존재로서 인간에게 항상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라는 점을 보여준다. 둘째, 그렇지만 학생들은 대학의 교양수업이 자신들의 취업에 큰 도움이 되지 않고, 연계성도 없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는 교양수업의 본질에서 비롯되는 문제인 만큼 취업에 대한 학생들의 수요는 교양수업과는 별개로 전공수업이나 기타 취업 연계 교과목 등을 통해 해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된다. 이는 인문학 중심의 교양수업과 전공 및 취업 연계 과목 간의 역할 분담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인문학 중심의 교양수업이 산업계의 요구와 수요와 완전히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인문학 수업을 통해 학습 동기를 강화하고, 자기를 더 잘 이해한 학생들은 빛의 속도로 변하는 사회와 기술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면서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역량을 배양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학부 고학년 혹은 대학원 단계에서는 대학과 기업이 손잡고, 현장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전문지식과 기술을 배우는 전공과목을 공동 개설하고 운영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이때 이 전공과목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이미 학부 단계에서 메타스킬, 학습 역량, 관계 역량 등을 충분히 배양한 인재이기 때문에 기업의 수요에 더욱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부응할 수 있을 것이다.

3) 국가의 장기적 인문학 정책 수립의 근거 제시 ― 지금까지 국가 차원의 인문학 정책은 ‘인문학 위기’ 담론과 이에 근거한 ‘인문학 지원정책’이라는 큰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은 항상 국가의 재정지원만으로 생존을 모색하는 수동적인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고, 정책결정자도 인문학에 대한 금전적 지원을 인문학 정책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해왔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인문학의 고답적 정체성 고수와 이로 인한 새 시대에 맞는 정체성 확립의 지체라고 판단된다. 본 연구가 제시한 ‘뉴리버럴아츠’ 인문학은 인문학 르네상스의 비전을 연구자, 교육자, 학생, 시민 등의 집단 간 동역학(dynamics)으로 설명했다. ‘인문학의 위기’라고 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학생-시민으로 이루어진 수요자 집단 가운데 연구자-교육자라는 미래의 인문학 공급자가 될 학문후속세대의 생산이 중단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들 핵심 수요층, 즉 학문후속세대가 사라진다면 이는 연구자-교육자의 공급 위기와 질적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로 인해 다시 수요자 측면에서 인문학 교육에 대한 실망과 수요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나타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공급측과 수요측을 연결하는 핵심 고리인 학문후속세대가 끊어질 경우 공급측의 질적 하락, 이에 따른 수요측의 실망과 수요 감소를 만들어낼 것임이 명약관화하다. 이는 수요측에 속하는 개별 시민의 소양 하락, 나아가 이들 시민으로 구성된 시민사회의 성찰 담론 빈곤과 이에 따른 민주주의 위기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인문학에 소명을 건 학문후속세대의 단절은 단순히 대학의 위기에 머물지 않고, 사회의 위기, 공동체의 위기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이런 문제의식에 근거해 본 연구는 인문학 갱신의 이념으로 ‘뉴리버럴아츠’를 제시하고, 이 방향으로 중등교육과 대학교육의 개혁, 대학과 기업의 협력 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위한 핵심 고리로서 인문학 학문후속세대의 양성을 위한 국가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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